역사 인물 산책

다 가지려다 다 놓친 사나이 - 노애嫪毐

촛불횃불 2021. 12. 23. 19:10

 시황제가 장년이 되어 가도 태후는 음란한 행동을 그치지 않았다. 여불위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세라 두려워서 남몰래 거시기가 큰 노애를 찾아 사인으로 삼고, 걸핏하면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노애의 거시기를 오동나무 수레바퀴에 달아서 걷게 하였다. 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다.

 

始皇帝益壯, 太后淫不止. 呂不韋恐覺禍及己, 乃私求大陰人嫪毐以爲舍人, 時縱倡樂, 使毐以其陰關桐輪而行, 令太后聞之, 以啗太后.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이 몸이 진왕의 의붓아비인 줄 알고나 있는가? 네까짓 거지같은 것들이 감히 나와 맞서겠다고?”

 몇 순배 돈 술이 이 양반의 간을 배 밖으로 끌어냈던 것일까? 이미 얼굴은 불콰하니 술기운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벌어진 말싸움에서 목소리를 높여 내뱉었지만 사태는 이미 제 길을 벗어난 수레였다. 눈을 크게 부릅뜬 이 사나이 앞에서 감히 대거리하는 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린 채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진왕을 향해 내닫는 인물이 있었다.

 입이 탈이었을까? 아니면 태후의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을까? 부귀와 영화에다 권력까지 손에 쥐었다고 함부로 우쭐거리는 이의 끝장을 역사는 번번이 보여주었지만, 이들은 이를 거울로 삼지 못했으니, 바로 이 사람 노애嫪毐가 그랬다.

 

자신의 거시기를 축으로 수레바퀴를 돌리는 노애

 노애는 원래 저잣거리의 무뢰한이었다. 뒷날, 양기에 좋다는 민간 처방 한 가지를 귀여겨듣고 그 뛰어난 효력을 시험으로 증명하며 약장수로 뛰어들었다. 이 약의 효과에 반한 고객들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질 무렵, 노애는 당시 정계의 큰 별이었던 여불위呂不韋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저택으로 들어가 문객이 되었다. 이곳에서도 노애는 자신의 물건을 가만 감추어두지 못했다.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자신의 거시기를 축으로 삼아 돌리는 동작을 이사李斯 앞에서 시범했던 것이다. 대진大秦 정계의 두 별 가운데 첫 번째는 여불위,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이는 이사였다. 아직 여불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사가 노애의 시범 동작을 여불위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여불위는 원래 전국시대 말기 위衛 나라 출신의 이름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각지를 오가며 낮은 가격으로 산 물건을 높은 가격에 파는 방법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그가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장사를 하던 때, 곧 전국시대 말기, 칠웅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 나라와 조趙 나라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대대로 내려오는 원한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조나라 서울 한단邯鄲에 머물던 여불위는 인질로 조나라에 와 있던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아들 이인異人을 지나치지 않았다. 제대로 대접도 못 받던 이인을 알게 된 여불위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높은 값에 팔 만한 귀한 물건이야.”

 여불위는 한단에서 함께 살고 있던 조나라 여자 조희趙姬를 이인의 품에 안겼다. 결딴난 왕자였지만 앞으로 크게 쓸 계산을 촘촘하게 셈하며 여불위가 던진 주사위는 결과적으로 정확했다. 조희가 낳은 아들 영정嬴政이 바로 전국시대를 끝장내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지 겨우 세 해만에 세상을 떠난 장양왕, 곧 이인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영정은 이때 겨우 열세 살이었다. 작은아버지로 불리며 힘을 얻은 여불위와 태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희가 무대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불위와 조희는 한단에서처럼 자연스레 다시 정을 나누는 사이로 돌아갔다.

 

진시황의 생모 조희의 모습

 그러나 여불위는 두려웠다. 그 옛날 장사꾼이었을 때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지만, 영정이 마냥 어린아이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눈치를 채기 전에 조희와 멀어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바로 이때, 이사가 노애의 연기를 그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여불위의 머리는 재빨리 회전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반짝 불이 켜지며 드디어 앞이 환하게 밝아왔다.

 남성의 기능을 거세한 자가 아니면 금지된 구역에 들어올 수 없었던 옛적에 여불위는 노애를 거세된 남자처럼 만들었다. 수염과 눈썹을 깨끗하게 뽑은 뒤에 궁중에 진입할 수 있도록 안배했던 것이다. 그 이전에 여불위는 노애의 남다른 물건 정보를 조희에게 짐짓 알리는 세밀함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이때, 조희의 나이 서른넷, 노애와 한 번 몸을 섞은 그녀는 날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다. 그녀에게 밤과 낮은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TV 연속극 《尋秦記》 속 노애의 모습

 당시 진왕 영정은 아직 어렸기에 진나라의 대권은 권신 여불위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노애에 대한 태후 조희의 사랑과 신임이 날마다 커짐에 따라 여불위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노애가 하는 일마다 큰소리치며 간섭했을 뿐만 아니라 노애 자신도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지며 나름의 힘을 행사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태후 조희는 노애에게 아들을 둘이나 안기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노애는 장신후에 봉해진 뒤, 산양山陽(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쥐예현巨野縣 일대)에 주로 거주하며 황하 서쪽 지방 태원군太原郡을 봉지로 받았다. 게다가 조희의 큰 권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궁중의 크고 작은 일들이 노애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하인들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노애에게 기대어 벼슬길에 나서려는 이들이 천 명에 육박했다. 날마다 찾아오는 손님이 그야말로 저잣거리처럼 흥성거렸다. 그런데 노애는 근본이 저잣거리의 소인배였다. 소인배가 부귀와 권력을 손에 쥐면 너무 흥에 찬 나머지 앞뒤를 셈하는 법을 잊기 마련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해서는 안 될 말도 내뱉곤 했다.

 

진왕 영정이 천하를 통일한 뒤 시황제가 된 모습

 진왕 영정이 자리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기원전 238년, 어떤 이가 진왕 영정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긴히 올릴 말씀 있사오니, 곁을 잠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이때, 진왕 영정의 나이 스물둘, 천하의 흐름을 알 만한 나이였다. 주위를 물리친 영정이 자기를 찾은 이에게 눈짓으로 채근했다.

 “황송하오나, 노애, 그 양반은 가짜 태감이옵니다. 이뿐만 아니라 태후와 남몰래 내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영정의 눈에 시퍼런 불이 번쩍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굳게 물었다.

 “여기에 더하여……,”

 잠시 뜸을 들이자 영정이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재우쳤다.

 “그래, 여기에 더하여?”

 “폐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자기 아들을 폐하의 자리에 올리겠다며 태후와 함께 남몰래 모의를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

 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사실을 파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랬다. 여기에 더하여 여불위마저 이 일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진왕 영정이 자리에 오른 지 9년, 그러니까 기원전 238년 정월, 바람 온화하고 햇볕 따스한 4월에는 옹성雍成(지금의 산시성陝西省 바오지시寶鷄市)에서 진왕 영정의 관례를 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정이 직접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정사를 돌볼 날이 코앞에 다가왔던 것이다. 이에 따라 노애의 머릿속엔 위기감이 날마다 키를 높여갔다.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당하기 전에 먼저 칼을 빼들기였다. 당시 노애는 왕후장상에 못지않은 호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들이에 필요한 수레며 의복이며 원림까지 궁중보다 더 화려할 정도였다. 이런 부귀와 영화를 어찌 잃으려 하겠는가?

 

진왕 영정의 '관례冠禮' (극중 모습)

 옹성에서 이루어질 성대한 관례에 왕족과 대신들이 모두 참가할 터, 수도 함양은 정치적으로 텅 빈 곳이 될 수밖에 없었다. 코너에 몰린 노애로 말하자면, 이야말로 하늘이 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더구나 옹성은 진의 도성 함양咸陽에서 3백여 리 떨어진 이 나라 옛 도성으로 선왕의 무덤과 종묘가 곳곳에 있었으며, 또 각 시대를 지나며 세워진 별궁도 적지 않았다. 영정은 이곳 종묘에서 관례를 거행할 터였다. 관례란 성인이 되는 의례를 일컫는다. 영정은 이를 통하여 성인이 되었음을 정식으로 널리 알리고, 보검을 차고 왕관을 머리에 얹게 된다. 진나라 제도에 따르면, 이때부터 위탁했던 대권을 찾아오며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할 수 있다.

 진왕 영정이 옹성에 머물던 때, 장신후 노애는 함양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진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새를 몰래 사용하여 함양현의 군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궁정 경호를 책임진 근위병은 물론 기병부대와 함양 부근 소수민족의 군대까지 동원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 저택에 머물던 가신과 문객까지 불러들여 대규모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몰래 꺼내 쓴 진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새가 이렇게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노애는 이들을 이끌고 옹성의 기년궁鄿年宮으로 진공할 셈이었다.

 

 그러나 ‘노애의 난’은 노애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모든 걸 다 가지려던 그는 모든 걸 다 내놓아야 했다. 죽음이 하나밖에 없는 그의 우주를 끝장냈던 것이다. 멈출 줄 아는 것도 큰 지혜이다. 그러나 그는 멈출 줄 몰랐다. 진왕 영정이 열세 살에 자리에 올라 여불위와 조희의 섭정을 받았지만, 이제는 스물두 살, 세상을 두루 살필 만한 나이가 되었음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장신후 노애는 조희의 힘만 믿었다.

 

 영정은 빠르게 움직였다.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주어 노애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을 재상 여불위가 지휘하라는 명령까지 함께 내렸다. 이들은 함양에서 벌어진 큰 전투에서 노애가 이끄는 군대를 대파했다. 만약 노애가 이끄는 군대가 승리했더라면, 곧 ‘노애의 난’이 성공했더라면, 진나라 정권의 골격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물론 영정의 삶도 또 다른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노애의 난’은 노애와 영정의 맞섬이었다. 그러나 이는 진왕 영정과 그의 어머니 조희의 맞섬이기도 했다. 정권을 둔 싸움에서 패배한 자의 운명은 언제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삼족三族도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노애도 마찬가지였다. 거열형, 온 몸이 여섯 도막으로 비참하게 찢어져야 했다. 그럼 여불위는? 노애를 궁중 조희 곁으로 끌어들인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불위는 영정의 오늘을 만든 인물로서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오늘 영정의 분노를 잠재우기엔 그가 진즉 세운 공은 결국 하찮은 것이었다. 영정이 내린 짐주鴆酒를 두 손에 받아 쥔 여불위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여불위의 모습

 야사는 태후 조희의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이 무측천武則天에 뒤지지 않았다고 이른다. 언젠가 노애와 함께 야외로 나갔다가 마차 안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닷새 동안 육체의 향연을 벌였다고 한다. 이들이 마차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태후의 얼굴은 환하기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듯했지만, 노애의 얼굴은 초췌하고 몸뚱이는 한껏 왜소해졌으며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했다고 한다. 수행했던 사병들이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저잣거리에 떠도는 이야기였겠지만 여기에도 상당한 진실이 있을 것 같다.

 어떻든 태후 조희는 이 험한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은 보전하여 간직할 수 있었다. 진왕 영정이 자기를 낳은 생모를 죽여 없앨 정도로 모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왕 영정도 생모 조희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태후 조희를 함양성 밖 부양궁萯陽宮으로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모자 관계를 단절하고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 대신들에게는 태후를 두고 간언을 올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간언을 올렸던 스물일곱 명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노애와 태후 조희의 두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화근이 될 게 분명한 이 둘을 그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다. 진왕 영정은 이 두 아들을 자루 하나에 함께 넣어 묶은 뒤 성벽 저 아래로 내던졌다.

 그런데 ‘노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창평군과 창문군의 이름을 이 뒤의 역사 기록에서 찾을 수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일까? 역사가 남긴 수수께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