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번째 단역
제후들 사이를 오가며 이 나라 저 나라의 힘을 종횡으로 합쳐서 힘센 나라에 맞서기를 주장했던 이들을 흔히 일러 종횡가라고 한다. 이들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귀곡鬼谷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귀곡자鬼谷子이다. 사마천의 ‘열전’ 일흔 편 가운데 당당하게 각각 한 편씩을 차지한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는 모두 귀곡자의 문생이었다. 귀곡의 위치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여럿이지만 사마천은 ‘낙양洛陽 동쪽의 제나라 땅’이라고 일렀다. 귀곡 선생 곁을 떠난 소진이 제후국의 군주를 찾아 유세를 펼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당한 부끄러움과 욕됨을「소진열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소진은) 집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유세했지만 큰 어려움만 겪고 돌아왔다. 이때 형제, 형수, 누이, 아내와 첩이 모두 슬며시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나라 풍속에는 농사를 주로 지으며 물건 만들고 장사에 힘써서 열에 둘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힘쓰는데 지금 그대는 본업을 버리고 입과 혀만 놀리고 있으니 곤궁한 게 당연하지 않겠소!”
出遊數歲, 大困而歸. 兄弟嫂妹妻妾竊皆笑之, 曰 : “周人之俗, 治産業, 力工商, 逐什二以爲務. 今子釋本而事口舌, 困, 不亦宜乎!”
소진의 형수는 이렇게 무대에 등장한다. 형제, 형수, 누이, 아내와 첩과 함께 소진을 중앙에 두고 등장하는 이들의 숫자가 모두 몇 명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대여섯 속에 섞인 한 사람으로 무대에 올랐으니 단역 중에 단역이다. ‘본업을 버리고 입과 혀만 놀리고 있으니’ 그 꼴이라고 비웃으며 말하는 이가 문맥으로 보면 대여섯이지만 그 중에 어느 하나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경우 가족들이 소진을 냉대한 모습은『전국책』이 더 실감난다.
(소진이) 집에 돌아오자 베를 짜던 아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형수는 그를 위해 밥을 지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와 말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歸至家, 妻不下紝, 嫂不爲炊, 父母不與言.
이런 냉대에 소진은 부끄럽고 슬펐다. 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공부에 몰두했다. 그의 ‘열전’은 한 해쯤 지나서야 유세의 방법을 제대로 터득했다고 기록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냉대가 그를 분발시킨 촉매였던 셈이다. 한신을 분발시킨 ‘빨래하는 아낙네’의 한 마디 말이 ‘따스한 촉매’라면 오늘 소진을 분발시킨 가족들의 말 한 마디는 ‘차가운 촉매’ 라 하겠다.
2. 다시 등장한 형수
여러 해 뒤,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를 성공적으로 합종시킨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소진은 초나라에서 조나라로 가는 길에 고향땅 낙양에 들렀다. 그가 지나는 길은 왕의 행차에 견줄 만했다. 여기서 잠시「소진열전」을 펼친다. 독자들은 특별히 여기 등장하는 몇몇 인물의 모습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주의 현왕顯王은 이 소문을 듣고 두려워 소진을 위해 길을 쓸도록 하고 사람을 교외에까지 보내 위로하게 했다. 소진의 형제와 아내와 형수는 곁눈으로 볼 뿐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식사를 했다. 소진은 웃으면서 형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찌하여 전에는 그리 오만하더니 지금은 이리 공순합니까?”
그의 형수는 얼른 몸을 굽혀 바닥을 기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사죄하며 말했다.
“도련님의 지위가 높고 재물도 많을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周顯王聞之恐懼, 除道, 使人郊勞. 蘇秦之昆弟妻嫂側目不敢仰視, 俯伏侍取食. 蘇秦笑謂其嫂曰 : “何前倨而後恭也?” 嫂委蛇蒲服, 以面掩地而謝曰 : “見季子位高金多也.”
제후왕에게 봉지를 내리고 식읍을 나눠주던 주나라 왕실의 권위도 사라지고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처지에 이르렀다. 지금은 전국시대, 전국칠웅 가운데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된 소진의 명성과 위세 앞에 두려워하는 주나라 현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울어가는 나라, 주나라 임금 현왕의 모습이 애처롭고 슬프다.
곁눈으로 힐금거리며 감히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숟가락질하는 형제와 아내와 형수. 몇 년 전, 유세에 실패하여 헤진 옷 입고 돌아온 소진을 냉대했던 이들이었다. 베를 짜던 아내는 돌아온 남편 소진을 보고도 베틀에 앉은 채 내려오지도 않았으며, 형수는 그를 위해 밥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 가족도 죗값을 받을세라 얼마큼은 두려웠을 것이다. 숟가락질하면서도 소리 날세라 조심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3. 염량세태炎涼世態
그런데 소진은 이런 장면 속에서도 웃는 여유를 보인다. 옛날과는 달라진 자기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바로 자기 자신 아닌가. 칠웅 가운데 육웅이 그에게 재상의 인수印綬를 내렸으니, 명예와 부귀는 물론 권세까지 손에 넣지 않았는가. 남루하여 곤궁이 가득하던 때는 이미 흘러간 옛일, 그의 웃음에는 넉넉하여 차고 넘치는 여유가 보인다.
소진은 가족 가운데 유독 형수에게 물음을 던졌을까? 형제도 아내도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베 짜던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았고 끼니를 책임진 형수는 솥에 불을 지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푸대접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런 냉대가 소진을 분발시키는 촉매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가슴에 맺힌 멍울은 몇 년이 지났어도 쉬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쳐 돌아온 그에게 밥 한 그릇은 다른 어떤 것보다 긴했기에 형수에게 맺힌 감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형수의 모습은 자신을 한껏 낮추기이다. 바짝 바닥에 엎드린 채 기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은 땅에 대고 잘못을 빈다. 사람이면 마땅히 가져야 할 품위 따위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은 모습이다. 그저 미안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다. 먼저 ‘도련님’의 높은 지위 때문이다. 높은 지위는 그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의 원천이다. ‘권력’이 무엇인가? ‘남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아닌가? 권력은 그녀가 원하는 또 다른 ‘그 무엇’을 줄 수 있는 힘이다. 또 하나 ‘도련님’이 가진 많은 ‘재물’도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재물’은 그녀를 곤궁한 처지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큰 힘이다. 이 두 가지는 ‘형수’만이 아니라 온 가족들을 ‘오만’에서 ‘공손’으로 한순간에 바꾸었다.
그렇다면 소진은? 지금이야 얼굴에 웃음 가득 여유만만이지만 그가 이제까지 온갖 고통을 이기며 추구해온 가치는 바로 ‘돈’과 ‘권력’ 아니었던가. 소진도 자기만의 주장이나 견해를 뚜렷하게 가지지 않았던 것은 여느 종횡가와 다름이 없었다. 그도 자기가 가진 여러 장의 카드 가운데 제후국의 군주에게 맞을 만한 카드를 때와 장소에 맞게 뽑아 보일 생각만 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세 치 혀가 무기일 뿐이었다. 단 하나 분명한 목표는 ‘돈’과 ‘권력’이었다. 지금 그는 이를 달성했기에 비로소 침착과 느긋함을 갖출 수 있었다.
전국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돈’과 ‘권력’을 붙좇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소진과 그의 가족들이 보인 풍경이 바로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피가 튀고 창날이 번득이는 시대에 인간의 존엄은 입으로만 외는 헛된 염불일 뿐이었다. 몇 십 년 뒤, 현상금 걸린 항우의 몸뚱이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군상들도 이런 점에서는 ‘닮은꼴’이다.
'역사 인물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의 첫 번째 남총男寵-설회의薛懷義 (3) | 2023.06.11 |
---|---|
멸문지화를 막은 여인-조괄趙括의 어머니 (0) | 2022.11.21 |
전쟁 중에도 지켜진 예의-유방과 항우 (3) | 2022.09.21 |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한 여인-마부의 아내 (2) | 2022.09.21 |
은혜도 원수도 덕으로 갚은 사나이-한신韓信 (0) | 2022.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