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만필 ③
나-2. 설결齧缺과 왕예王倪의 문답
a. 일문삼부지一問三不知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갖가지 사물들이 모두 서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설결이 또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모르는 바를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설결이 이어서 또 물었다.
“그렇다면 모든 사물에 대하여 알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 그 문제를 한번 대답해 보기로 하자꾸나. 자네는 내가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내가 모른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는가?”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曰:「吾惡乎知之!」「子知子之所不知邪?」曰:「吾惡乎知之!」「然則物無知邪?」曰:「吾惡乎知之!雖然,嘗試言之。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설결齧缺과 왕예王倪는「제물론」뿐만 아니라「응제왕應帝王」에도 등장합니다. 외편「천지天地」에는 ‘요堯 임금의 스승이 허유許由이고, 허유의 스승은 설결이다. 또 설결의 스승이 왕예이고, 왕예의 스승은 피의被衣이다’[堯之師曰許由, 許由之師曰齧缺, 齧缺之師曰王倪, 王倪之師曰被衣.]라고 하여 왕예와 설결이 스승과 제자 사이임을 알립니다. 설결과 왕예는 은거하며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로서 장자와 그의 후학들이『장자』에 데려온 허구의 인물입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에 데려온 작은 문단에서 설결은 스승 왕예에게 세 번이나 거듭 물음을 올립니다. 그러나 왕예는 ‘내가 어찌 알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사실 물음은 ‘도道’를 중심이 둡니다. ‘갖가지 사물들이 가진 공통점’이야 말로 ‘도’가 아니겠습니까? 왕예도 ‘도’에 대한 깊은 무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앎’의 한계에서 뛰어넘어 존재함을 표현합니다. ‘도’의 신비성을 강조하면서 ‘앎’, 곧 지식의 범주에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합니다.
왕예는 참 지혜는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함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세계의 본질을 체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데까지 이릅니다. 이런 사상이 장자 철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으며 체험으로써 ‘도’의 이해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앎’, 곧 지식이나 논리적인 추리를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b. 상대주의 철학
“이제 내가 자네에게 한 번 물어보겠네. 사람은 축축한 곳에서 자면 요통에 반신불수로 죽을 수도 있지만 미꾸라지도 그런가? 사람은 나무 위에 있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런가? 사람, 미꾸라지, 그리고 원숭이, 이 셋 가운데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안다고 하겠는가? 사람은 소·돼지 따위의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으며, 지네는 뱀을 즐겨 먹고, 올빼미는 쥐를 맛나게 먹네. 사람, 사슴, 지네, 그리고 올빼미, 이 넷 가운데 누가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원숭이는 원숭이로 짝을 삼고, 순록은 사슴과 교배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니네. 모장毛嬙이나 여희麗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 여기지만 물고기는 이들을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는 이들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은 이들을 보면 온 힘 다해 달아나네. 사람, 물고기, 새, 순록, 이 넷 가운데 누가 이 세상의 참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내가 보건대, 인의仁義의 단서나 시비是非의 길은 어수선하고 어지럽네. 그러니 어찌 내가 그들 사이의 분별을 이해하겠는가!
且吾嘗試問乎女: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且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為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
장자는「제물론」에서도 비유를 통하여 사물을 인지하는 데 주관성과 상대성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습기로 축축한 곳에서 잠자면 요통은 말할 것도 없고 반신불수가 될 수도 있지만 미꾸라지는 요통을 앓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물속에 지내야 즐겁습니다. 또 인간은 높은 나뭇가지에 서 있으면 두려움으로 손발이 떨리거나 풀리지만 원숭이는 아무리 높은 나뭇가지일지라도 평지를 밟듯 두려움을 모릅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통하여 인간의 환경과 사물에 대한 판단이 매우 제한적임을 우리에게 가리킵니다. 게다가 자신의 경험과 인지 능력에 제한을 받기도 합니다.
미꾸라지와 원숭이는 물속이나 높은 나뭇가지라는 환경에 있을지라도 인간처럼 불편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올바른 거처’[正處]나 ‘올바른 맛’[正味]이 상대적임을 웅변합니다. 각자의 생존 방식이나 감각과 지각으로 쌓인 습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이렇게 사물에 대한 좋고 나쁨, 그리고 옳고 그름이 종종 관찰자의 입장이나 감각과 지각이라는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고 봅니다.
장가가 여기에 등장시킨 모장毛嬙과 여희麗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장은 춘추시대 월越 나라 군주 구천句踐의 애첩으로 알려진 미인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시西施와 같은 시기를 살았으며 뒷날 아름다움의 화신과 상징으로 손꼽힙니다. 여희는 춘추시대 진晋 나라 군주 헌공獻公의 애첩으로 알려진 미인입니다. 장자는 설결의 스승 왕예의 입을 통하여 인간과 동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임으로써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드러내 보입니다.
모장과 여희는 인간의 눈에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요 화신입니다. 그러나 물고기나 새, 그리고 사슴의 눈에는 이들 미인의 존재가 위험이나 상서롭지 못한 존재로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멀리 몸을 피합니다. 아름다움이란 결코 절대적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관찰자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처한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야기죠. 동물이 인간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듯이 인간도 동물의눈에 비친 아름다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들 동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은 온전히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잠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매우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자연적인 반응이기에 더욱 아름다움을 상대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동물들의 행동은 생존 본능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살펴 찾으며 내린 판단의 결과에 따른 행동이 아닙니다. ‘참 아름다움’[正色] 도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장자는 왕예를 통해 인의의 근본이나 시비의 경로가 어지럽고 복잡하여 그들 사이를 분별하기 힘들다고 강조합니다. 인의에 대한 정의도 사람마다 달라서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서로 달리 이해합니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밝혀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표준은 없다는 게 바로 장자의 상대주의 철학입니다.
c. 이로움과 해로움을 뛰어넘은 지인至人
설결이 입을 열어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모르십니다만, 그렇다면 지인至人도 물론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모르겠지요?”
왕예가 말했다.
“지인은 신비로우니라. 못가 숲이 타올라도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黃河나 한수漢水가 얼어도 춥게 할 수 없으며, 사나운 천둥이 산을 깨뜨리고 모진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도 놀라게 할 수 없네. 이런 이는 엷게 흐르는 구름을 몰아 해와 달에 올라앉아 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네. 삶이나 죽음도 그에게 변화를 주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로움이나 해로움 따위에 흔들리겠는가!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지인至人에 대해서는 앞서「소요유」만필 가운데 견오와 연숙 이야기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습니다.『장자』에서 지인은 성인이나 신인처럼 도덕적으로 완전한 경지에 이른 이상적인 인물을 이릅니다. 이곳에서 지인은 활활 타는 불에도 뜨거움을 모르고 꽁꽁 언 황하나 한수의 얼음에도 차가움을 모르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지인의 경지에 이른 인물은 이렇게 모든 것을 초월하여 사물 밖에 우뚝하니 선 모습입니다. 외계의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경지에 이른 인물이기에 보통 사람이 보기에 매우 신비롭습니다.
지인은 지극히 높은 정신적 경지에 이른 인물입니다. 보통 사람의 지혜나 감정을 뛰어넘은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지인은 온갖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신神’의 경지에 이른 인물인 셈이지요. 지인은 외계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활활 타는 불길이나 꽁꽁 언 얼음 같은 극단적인 자연 현상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외계의 극단적인 조건이 주는 영향을 받지 않기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지인은 바깥 환경이 주는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엷게 흐르는 구름을 몰아 해와 달에 올라앉아 이 세상 밖에서 노닙니다. 이는 속된 세상을 초월한 모습입니다. 게다가 아무런 제약이나 속박이 없는 정신 상태에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지인은 삶과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었기에 이로움이나 해로움 따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지는 만물에 대한 통찰이 최고점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거처나 맛,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기호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듯이 인의나 시비에 대한 판단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며 어느 것이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단정하는 순간 마찰과 분규가 발생하겠지요. 지인은 이런 것들을 벗어난 경지에서 노닐기에 절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