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이야기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만필 ①

촛불횃불 2025. 6. 21. 13:13

3-. 포정해우庖丁解牛

 

a. 사각사각 삭둑삭둑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 앞에서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손을 대는 곳, 어깨를 기댄 곳, 발로 짓누르는 곳, 무릎이 닿는 곳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칼이 움직이는 대로 삭둑삭둑 울리는데, 그 소리가 모두 음률에 어긋남이 없었다.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에도 장단이 맞고, ‘경수經首의 리듬에도 맞았다.

 

庖丁為文惠君解牛手之所觸肩之所倚足之所履膝之所踦砉然嚮然奏刀騞然莫不中音合於桑林之舞乃中經首之會

 

포정庖丁은 정이라는 이름의 숙수입니다. 중국 옛적에는 이렇게 직업으로 이름을 삼는 일이 많았습니다. 내편인간세人間世와 잡편서무귀徐無鬼에 등장하는 장석匠石은 석이라는 이름의 목수입니다. 또 외편천도天道에 나오는 윤편輪扁은 편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 만드는 사람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문혜군文惠君은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일웅이었던 위나라의 세 번째 군주 양혜왕梁惠王을 가리킵니다. 이 양반이 도읍을 동쪽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위혜왕보다 양혜왕으로 널리 불립니다.맹자첫 꼭지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포정이 양혜왕 앞에서 소를 가른 이야기는 장자가 만든 허구입니다.

위 작은 단락에서 포정이 소를 가르는 모습은 그 묘사가 일품입니다. 제물론에서 남곽자기가 안성자유에게 이르는 땅이 부는 퉁소소리묘사에는 못 미치지만, 장자가 글쓰기의 대가임은장자이곳 저곳에서 발견됩니다. ‘사각사각이나 삭둑삭둑같은 의성어를 씀으로써 글의 효과를 높은 데로 올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상림의 무악에도 경수의 음악에도 장단도 맞고 리듬에도 어울린다고 표현함으로써 아득한 옛적 은 나라 탕왕 때 무곡이나 요 임금의 음악까지 눈앞에 데려와 실감을 더합니다. 포정의 동작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이 막힘이 없습니다. 어떤 막힘도 없습니다. ‘상림의 무악이나 경수의 음악처럼.

 

b.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득도得道

 

이를 본 문혜군이 감탄하며 물었다.

, 정말 멋지오! 기술이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소?”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추구하는 건 도입니다. 손끝의 기술보다야 훨씬 나은 것입죠. 처음으로 제가 소를 잡을 땐 눈에 보이는 게 온통 소 아닌 게 없었지요. 세 해가 지나자 소의 온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죠. 지금은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이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감각이 멈추니 정신의 작용만 남습니다. 소의 자연스러운 본래의 구조에 따라 살과 뼈 사이의 틈에 칼을 집어넣고 뼈마디의 빈틈을 따라 칼을 놀리고 움직이지요. 이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살이나 뼈를 건드린 적이 없습죠.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 없습죠!”

 

文惠君曰:「善哉技蓋至此乎?」庖丁釋刀對曰:「臣之所好者道也進乎技矣始臣之解牛之時所見无非牛者三年之後未嘗見全牛也方今之時臣以神遇而不以目視官知止而神欲行依乎天理批大郤導大窾因其固然技經肯綮之未嘗而況大軱乎

 

포정은 오랜 기간의 실천과 깨달음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침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소를 잡는다는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포정이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은 제대로 갖추어진 한 마리 소뿐이었습니다. 세 해 뒤엔 소의 살과 뼈의 구조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추구한 것은 도라고 말합니다. 이 도는 곧 사물의 자연법칙과 본질이지 단순한 기술이나 기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도를 추구했기에 포정의 기술은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c. 자연법칙 따르기

 

솜씨가 뛰어난 소잡이가 한 해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자르기 때문입죠. 솜씨가 평범한 소잡이가 달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뼈를 찍기 때문입죠. 지금 제가 쓰는 이 칼은 열아홉 해가 되어 수천 마리나 되는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고 칼날엔 두께가 없습죠. 두께 없는 칼날을 빈틈 있는 뼈마디에 집어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이 움직이는 데 여유가 있습죠. 그러니까 열아홉 해가 되었어도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죠.”

 

良庖歲更刀割也族庖月更刀折也今臣之刀十九年矣所解數千牛矣而刀刃若新發於硎彼節者有間而刀刃者无厚以无厚入有間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열아홉 해 동안 몇천 마리나 되는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여전히 숫돌에 새로 갈아 낸 것처럼 날카롭습니다. 자연법칙에 순응했기에 때문입니다. 소의 살의 자르지도 않았으며 소의 뼈를 찍지도 않았습니다. 소의 뼈마디의 빈틈을 찾을 줄 알았다는 말은 칼을 쓰는 솜씨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솜씨입니다. 그러기에 칼날을 놀리면서도 오히려 여유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그 어떤 것보다 앞에 놓았기에 얻을 수 있는 도입니다.

 

e. 양생의 도는 자연법칙을 따르기

 

그렇긴 하지만 살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면, 저는 이 일의 어려움을 알아채고 두려움으로 경계하며 눈길을 그곳에 멈추고 천천히 움직입죠. 이제 칼의 움직임이 아주 가벼워지면 털썩하고 뼈와 살이 떨어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죠. 칼을 들고 일어나서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면 혼자서라도 마음이 흡족해지면 칼을 깨끗이 닦아 챙겨 넣습죠.”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오! 그대의 말을 듣고 나서, 내 이제 양생養生의 도를 깨달았소.”

 

雖然每至於族吾見其難為怵然為戒視為止行為遲動刀甚微謋然已解如土委地提刀而立為之四顧為之躊躇滿志善刀而藏之。」文惠君曰:「善哉吾聞庖丁之言得養生焉。」

 

이 글의 순서에 따라 소를 잡는 포정의 모습을 움직임 있는 영상으로 머릿속에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리드미컬하고 멋집니다. 살과 뼈가 엉긴 부분에 이르렀을 때, 포정은 두려움으로 경계하기까지 합니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가졌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솜씨를 단순한 기술로 보지 않고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는 기술을 넘어 자연의 이치, 곧 자연법칙을 따르는 데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사상입니다.

문혜군이 깨달았다는 양생의 도는 바로 참된 삶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장자내편의 세 번째 편명양생주養生主는 참된 삶을 누리는 방법, 또는 참된 인생을 누리게 하는 요체를 말합니다. 장자는 양생의 길은 자연에 순응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자면 감정에도 치우치지 않고 외물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핀 포정해우’, 이 문단 바로 앞 문단에서도 역시 양생의 도를 이야기합니다. 자수가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글이기에 데려옵니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소문나지 않게 하고, 나쁜 일을 하더라고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한다. 오직 중을 따르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몸도 온전히 지킬 수 있고, 평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며,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為善无近名為惡无近刑緣督以為經可以保身可以全生可以養親可以盡年

 

을 따르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은 선악에 얽매이지 않는 중간 입장을 뜻합니다. 중허中虛’, 곧 사람이나 사물의 이치가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을 따르는 것은 바로 자연의 이치,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소잡이 포정은 자연의 이치, 자연법칙을 따른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