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신 약若이 푸른 모래톱에 놀러 나왔다가 우강禺强도 만났다. (이날, 바다를 관장하는 해신의 순찰에) 조개와 물고기 들이 나와 서열에 따라 늘어서서 알현했다. 기夔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때, 기의 모습을 본 자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왜 웃소?”
기의 물음에 자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껑충껑충 뛰는 모습이 우습소이다. 그러다가 넘어질세라 걱정이오.”
그러자 기는 이렇게 되받았다.
“제 걱정 접어두고 이 몸 걱정해 줘서 고맙소만, 참, 걱정도 팔자로소이다. 네 발로 길을 가면서도 제 몸 하나 건사 못 해 절뚝거리면서 내 걱정을 하며 키득거리니 말이오.”
먼저, 이 글에 등장하는 '약若'은 다르게 '해약海若'이라고도 하며 중국 옛 신화 속의 '해신海神'을 말한다. 또 이 글이 두 번째 등장인물 '우강禺强'도 중국 옛 신화에 나오는 '해신'이다. 이제 세 번째 인물 '기夔', 이도 신화 속 동물로서 형상은 용과 흡사하지만 다리가 하나뿐인 동물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원나라 말엽에 태어나 명나라 초기까지 살았던 정치가요 시인이었던 유기劉基가 펴낸 <욱리자郁離子>에서 데려온 이야기이다. 그리고 ‘목불견첩目不見睫’은 이 글을 쓴 작가가 찾아 붙인 제목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제 눈에 제 눈썹 보이지 않는다.’이다. ‘제 눈에 제 허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 모습은 살필 생각 없이 남의 잘못 들추는 데 신명난 인물은 옛적에도 오늘 못지않게 많았던 모양이다. ‘당신이 바로 그렇소.’, 이렇게 받았다간 코 다칠 수 있으니, 자라를 무대에 올려 망신시키며 넌지시 이런 인간을 꼬집는 방법은 이솝으로 알려진 아이소포스, 이 양반만의 장기는 아니었던 듯하다. 이쪽 동양 고전에도 이런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역사 아무리 흘러도 예나 이제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때문일까? 제 잘못 보지 못한 채 상대방의 정의를 불의로 바꾸는 데 이력이 난 어느 당의 입을 보노라면, 아, ‘본성’을 ‘천성’이라고 달리 부르는 까닭을 알 듯하다. 이 분에게 거울 하나를 드린다. 비록 좌우 위치는 바뀔지라도 제 눈이 보지 못하는 눈썹을 볼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위 인용 원문을 여기 보인다. 한문에 관심 있는 이는 살펴보기 바란다.
東海之若遊於靑渚, 禺强會焉. 介鱗之屬以班見. 見夔出, 鱉延頸而笑, 夔曰 : ’爾何笑?' 鱉曰 : ‘吾笑爾之蹻躍, 而憂爾之踣也.' 夔曰 : ‘我之蹻躍不猶爾之跛行乎? 且我之用一, 而爾用四, 四猶不爾持也, 而笑我乎? 故跂之則傷其足, 曳之則毁其腹, 終日匍匐, 所行幾許. 爾胡不自憂而憂我也?'
'말의 말 > 6. 여섯째 마당 - 性'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성本性 (0) | 2021.10.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