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72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의 첫 번째 남총男寵-설회의薛懷義

당나라 세 번째 황제 고종 이치李治가 세상을 떠났다. 기원후 683년 섣달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앞서 한 장의 조서를 남겼다. -태자 이현李顯을 황제의 자리에 즉시 앉혀라. 하지만 나라의 큰일 처리에 성근 부분이 있을 때는 천후天后의 가르침에 따라 결단토록 할지니라. 여기서 이르는 천후란 바로 무측천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고종 이치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조서는 대당의 땅덩어리를 두 손 받들어 다른 이의 손에 넘길 뻔한 일로 발전했다. 사흘 뒤, 이현은 당나라 네 번째 황제 중종으로서 자리에 올랐고, 무측천은 황태후로 높여졌다. 바로 이해, 무측천은 나이 예순으로 당시로서는 자못 늙은이였다. 그런데 온 천하를 흔들 만큼 큰 권세를 손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가..

멸문지화를 막은 여인-조괄趙括의 어머니

기원전 262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260년까지 무려 세 해 동안 장평長平(지금의 산시성山西省 가오핑시高平市) 땅에서 벌어진 ‘장평대전長平大戰’은 전국시대 막바지 누가 마지막 패자가 되느냐를 놓고 겨룬 큰 전쟁이었다. 맞상대는 조趙 나라와 진秦 나라. 당시 조나라 군주 효성왕孝成王은 ‘호복기사’로 이름을 떨친 무령왕의 손자였으며, 진나라 군주 소왕昭王(소양왕昭襄王이라고도 함)은 상앙商鞅이 추진했던 개혁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밀고 나간 혜왕惠王의 손자였다. 이들이 천하를 둔 건곤일척의 패를 던졌다. 상앙을 곁에 두었던 진나라 효공 이후 이 나라의 모든 얼개는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이 되기 위한 전시 체제였다. 전쟁터에서 베어 온 적군의 머리 숫자가 곧 논공행상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체제를 몇 십 년 동안 이..

시동생을 향한 형수의 염량세태炎涼世態 - 소진蘇秦

1. 첫 번째 단역 제후들 사이를 오가며 이 나라 저 나라의 힘을 종횡으로 합쳐서 힘센 나라에 맞서기를 주장했던 이들을 흔히 일러 종횡가라고 한다. 이들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귀곡鬼谷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귀곡자鬼谷子이다. 사마천의 ‘열전’ 일흔 편 가운데 당당하게 각각 한 편씩을 차지한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는 모두 귀곡자의 문생이었다. 귀곡의 위치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의견이 여럿이지만 사마천은 ‘낙양洛陽 동쪽의 제나라 땅’이라고 일렀다. 귀곡 선생 곁을 떠난 소진이 제후국의 군주를 찾아 유세를 펼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당한 부끄러움과 욕됨을「소진열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소진은) 집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유세했지만 큰 어려움만 겪고 돌아왔다. 이때 형제,..

전쟁 중에도 지켜진 예의-유방과 항우

영웅호걸이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툰 역사적 사건을 세 가지만 들라면, 중국인은 서슴없이 이렇게 손꼽는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쟁, 조조 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의 대접전,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의 이른바 국공내전. 역사는 미래를 내다볼 수는 있지만 기록은 지나간 시대와 역사가가 당면한 당대가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사마천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군주 영정贏政이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천하를 통일하며 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른바 진시황제秦始皇帝.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서른아홉 장년의 나이에 통일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된 그는 기원전 21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역사에 남겼다. 그러나 이런 업적이 통일 제국의 백성들..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한 여인-마부의 아내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 년 전, 남편의 잘못을 당당하게 지적하며 이혼을 요구한 여성이 있다.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성마저 알 수 없다. 마차를 몰았던 그녀의 남편 이름도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이들 부부의 이야기가「관안열전管晏列傳」에 기록으로 남아 전할 뿐이다. 이 열전은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첫 번째 패자의 자리로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관중管仲과 역시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등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중흥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안영晏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열전의 두 중심인물 가운데 한쪽인 안영의 마부 이야기는 큰 물건에 끼워 파는 껌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은 수레 몰이꾼 부부의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다. 이 부분을 몽땅 가져온다..

은혜도 원수도 덕으로 갚은 사나이-한신韓信

1. 회음淮陰 소년 한신韓信을 괴롭힌 건달 사마천의 ‘열전’에는 같은 이름의 ‘한신韓信’이 둘이다. 고조 유방에게 등을 돌리고 흉노의 선우 묵돌과 손을 잡은 한신이 그 하나로서「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에서 그를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뒷사람들에 의해 ‘병선兵仙’이니 ‘신수神帥’니 등으로 높여 불린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이다. 사마천은 작위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회음후열전」에서 그를 다룬다. 오늘, 이곳에서 이르는 한신은 ‘회음후 한신’이다. ‘회음후 한신은 회음 사람이다.’(淮陰侯韓信者, 淮陰人也.), 사마천은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한신을 시작한다.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는 뒤를 이은 여러 개의 긴 문장 중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진나라 말엽 농민 전쟁을 시작으로 초한전쟁을 거치며 유..

하찮은 궁녀에서 황제가 된 여인-무측천

1. 아름다운 소녀의 첫 입궁 때는 정관貞觀 11년(637년) 동짓달, 당태종 이세민은 열네 살 난 무측천의 용모는 물론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반듯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은 그녀를 재인才人에 봉하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내렸다. 당나라 때 궁녀는 정1품 귀비貴妃에서부터 정8품 채녀采女까지 그 등급이 촘촘한데, 재인은 정5품, 중간에서 좀 아랫쪽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궁녀 중에서도 아랫쪽에 위치한 하찮은 궁녀였다. 이 하찮은 궁녀가 종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무측천은 입궁하기 전날, 홀로 된 그 어미 양씨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진 천자를 모시는 일이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어린아이처럼 훌쩍훌쩍 우십니까?" 당태종 이세민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무측천의 궁..

스스로 목숨 끊은 장군-이광李廣

1. 사마천이 만난 장군 이광 먼저 사마천이「태사공자서」에서 밝힌「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쓴 이유를 한 번 보자. 적을 대적함에 용감하였고, 병사들에게는 인자하고 정이 많았으며, 명령이 번거롭지 않았기에 부하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勇於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鄕之. 여기에 더하여 ‘열전’ 일흔 편의 배치를 눈여겨 살피면 위청衛靑의 여러 부장 가운데 오로지 이광李廣만이 한 편을 넉넉히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큰 전공을 세우며 널리 이름을 날렸던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조차「위장군열전衛將軍列傳」뒤쪽에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며 단 몇 줄로 기술된 점과 비교하면 사마천이 장군 이광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 말미에 붙인 ‘태사공왈’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본..

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군주의 난륜-위선공衛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우리를 이끈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귀 닫은 군주의 최후-송宋 양공襄公

몇 백 년 이어오던 주周 왕실이 무너진 것도 또한 왕조가 바뀔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당장은 서북쪽 변방에 살던 이민족 견융족犬戎族의 공격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태자의 자리에서 내쳐졌던 의구宜臼가 제후들의 추대로 평왕平王으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동주東周의 시작이다. 때는 기원전 770년, 바로 춘추전국시대는 이로써 비롯된다. 그 앞쪽,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좌전左傳』에 따르면 14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경계를 맞댄 이웃끼리 벌어졌을 다툼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지 130년을 이제 막 지난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맞붙었다. 당시 송나라의 군주는 양공襄公, 초나라의 군주는 성왕成王이었다. 여기서 주周..

한무제 유철이 각별히 대우한 여인-젖어머니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의 생모는 왕지王娡이다. 이 여인은 애초 금왕손金王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녀의 어미를 따라 황태자 유계劉啓의 궁중에 들어와서 미인美人에 봉해진다. 유계는 서한의 여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 곧 경제景帝이다. 왕미인이 경제에게 안긴 아들이 바로 유철이다. 유철은 왕미인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지만 경제에게는 열 번째 아들이다. 왕미인의 몸으로 낳은 유철에게는 유모가 따로 있었다. 유모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자못 특수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만들어진 따스한 젖을 받아먹으며 자란 아이가 귀족의 자제일 경우 이 여인의 신분도 따라서 현귀해질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왕공 귀족의 자제는 그 아비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어린 시절 ..

한무제 유철이 죽인 여인-구익부인鉤弋夫人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은 열여섯에 등극하여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쉰다섯 해 동안 절대 왕권을 휘둘렀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역사에 남긴 업적도 적지 않지만 어두운 흔적도 또한 적지 않다.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대한 제국의 바탕을 마련하며 지구 서쪽 로마 제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이룩한 데는 무제 유철의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오랫동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던 북방의 흉노를 복속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큰 업적이다. 반면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 궁중을 혼돈으로 밀어 넣은 ‘무고巫蠱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자 유거劉据와 그의 어머니 위자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이르게 만들었다.『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는 무제 유철이 자신의 이런 허물을 뉘우치며 쓴 반성문이다...

한무제 유철의 추봉된 황후-이부인李夫人

위자부의 아름다운 용모도 나이를 먹어가자 스러지기 시작했다. 무제 유철의 시선은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조나라 출신의 왕부인王夫人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부인은 아들 하나를 무제 유철에게 안기고 그만 일찍 세상을 버렸다. 이때 이부인李夫人이 때맞춰 등장한다. 이부인의 오라비 이연년李延年이 무제 유철 앞에서 부른 노래 한 곡이 이부인을 황제 곁으로 오게 만들었으니 역사는 우연이 만드는 필연처럼 극적이다.「영행열전佞幸列傳」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아첨쟁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이 이연년이다. 이 부분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연년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그는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 모두 노래와 춤을 추던 배우였다. 이연년은 법을 어겨 궁형을 받은 뒤 황제의 사냥개를 담당하는..

한무제 유철의 두 번째 여인-위자부衛子夫

집안은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마저 구차하고 변변치 못했던 위자부의 팔자가 백팔십도로 바뀐 건 오로지 황제의 느닷없는 굄 때문이었다. 기원전 139년,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던 해 춘삼월, 열여덟 살 난 황제 유철은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멀리하려는 마음으로 황궁 동남쪽 패상霸上으로 나아가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던 무제 유철이 손윗누이 평양공주의 집에 잠시 들른 게 위자부와의 첫 만남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당시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한낱 가희였을 뿐이었다. 평양공주 집에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위자부도 이들 여러 미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평양공주는 이들을 무제 유철에게 보였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전혀 달가운 표정을 보..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여인-진아교陳阿嬌

사마천의 「외척세가」세 번째 인물 첫 번째 단락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여태후는 자신이 득세할 때, 궁녀들을 각각 다섯 명씩 나누어 여러 제후 왕들에게 내려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조나라 땅 두 씨 집안의 딸 하나가 여태후를 시중드는 직분을 받으며 입궁했었는데, 자기 뜻과는 달리 대代 땅으로 가게 되었다. 대 땅에 이른 이 여인 두 씨는 이곳 제후왕 유항의 굄을 받으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대왕 유항에게 안긴다. 유항은 여태후 천하가 끝난 뒤, 여러 대신들의 추대를 받으며 서한의 다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문제이다. 여태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 두 씨는 두황후가 된다. 문제가 붕어하자 그녀의 몸으로 낳은 맏아들 유계가 자리를 이어 오르니 이가 곧 경제이다. 대 땅에서 유항의 굄을 받으며 ..

난륜亂倫이 만든 비극-위衛 선공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올린..

최후의 승자-박희薄姬

여치呂雉와 척부인戚夫人의 화해 없는 갈등 1. 어귀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얼개로 3천여 년의 역사를 아울렀다. 역사의 지평을 한껏 밀어 올리며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의 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본기’는 자신의 눈에 비친 제왕들의 이야기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이 ‘본기’ 열두 편 가운데 보란 듯이 의젓하게 한 편장을 차지한 「여태후본기」를 두고 뒤의 여러 학자들이「항우본기」와 더불어 갑론을박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여태후본기」는『이십사사二十四史』로서『사기』의 바로 뒤를 이은『전한서前漢書』도「고후기高后紀」로써 황제의 역사에 편입시켜 사마천과 같은 시각으로 취급했다. 이는「항우본기」를『한서』에서는「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으로 한데 엮은 것..

백등산白登山에 갇힌/가둔 군주-유방劉邦 & 묵돌冒顿

백등산白登山은 지금의 마포산馬鋪山, 산시성山西省 북쪽 네이멍구 자치주와 접경을 이루는 다퉁시大同市 동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00년,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이곳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찬찬히 짚어 보자. 더하여 잠시 찾아온 평화도 한번 셈해 보자. ▶ 머리 먼저「고조본기」부터 펼친다. 고조 7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한왕 신은 곧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모반했다. (그의 부장) 백토만구신白土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원래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漢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토벌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 信因與謀叛太原. 白土曼..

청루靑樓의 여인이 된 황후②-목야리穆邪利

후주의 황후 목씨穆氏의 이름은 야리邪利이다. 본시 (북제 후주의 첫 번째 황후) 곡률후斛律后의 여종이었다. 後主皇后穆氏, 名邪利, 本斛律后從婢也. 『북제서北齊書』 「열전제일列傳第一」 남북조 시대 북제의 역사를 보면, 그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잇달아 자리에 오른 여섯 황제가 스물여덟 해나 통치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여섯 황제가 거의 하나같이 잔혹한데다 황음무도했으며 변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형인 고징高澄의 정실부인을 간음까지 한 데다 술을 마시면 입었던 옷을 몽땅 벗어버리고 알몸 달리기를 했던 문선제 고양은 북제의 첫 번째 황제였으며, 열여섯 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제법 민생에 관심을 두고 국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았던 두 번째 황제 고은高殷은 이태도 채우지 못하고 열일곱 살 한창 나..

보석처럼 빛난 여인-우맹優孟의 아내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초楚 나라 장왕莊王을 가리켜 ‘어질고 착하구나, 초왕이여!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 마디 말을 소중히 여겼구나.’, 이렇게 찬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왕은 자그마한 제후국 진陳 나라 군주 영공을 시해한 하징서夏徵舒를 죽이고 이 나라를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만들었다. 그 뒤, 그는 신숙시申叔時의 ‘하징서가 그의 임금을 시해했다고 해서 여러 제후들의 군대를 모아 정의라는 이름으로 징벌하고 또 얼마 뒤에 그 땅까지 차지한다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겠느냐?’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진나라를 후손에 돌려주었다. 공자가 한 말은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초나라 장왕은 신하의 간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초나라 장왕이 처음부터 이렇게 귀를 너그럽게 열지..

분수를 안 사나이-도양열屠羊說과 범려范蠡

초나라 소왕이 나라를 잃어버리자 도양열은 소왕을 따라 나라 밖으로 몸을 피했다. 소왕이 초나라로 돌아와 자기를 따른 이들에게 상을 내리려고 했다. 도양열에게도 상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도양열은 이렇게 아뢨다. “당시 대왕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때, 저는 짐승 잡는 직업을 잃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를 찾으시고 저 또한 제 직업을 되찾았는데 무슨 상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楚昭王失國, 屠羊說走而從于昭王. 昭王反國, 將賞從者, 及屠羊說. 屠羊說曰 : “大王失國, 說失屠羊 ; 大王反國, 說亦反屠羊. 臣之爵祿已復矣, 又何賞之有!” 『장자莊子』「양왕편讓王篇」 범려가 간언하여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며, 다툼은 일 가운데 제일 못난 것입니다. 남몰래 ..

포악한 군주에게 희생된 장인-간장干將과 막야莫邪

간장과 막야가 진晉 나라 군주에게 올릴 검을 세 해 만에 만들었다. 자웅 한 쌍의 이 검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진귀한 기물이었다. 이 한 쌍의 검 가운데 자검雌劍은 군주에게 올리고 웅검雄劍은 남겨 두었다. 간장은 아내 막야에게 이렇게 일렀다. “내가 남은 검 하나를 남쪽 산의 북쪽이며 북쪽 산의 남쪽 돌 위에 소나무가 있는 곳에 감추어 두었소. 임금께서 이제 나를 죽일 것인즉, 그대가 사내를 낳으면 내 말을 들려주시구려.” 干將莫耶爲晉君作劍, 三年而成, 劍有雌雄, 天下名器也. 乃以雌劍獻君, 留其雄者. 謂其妻曰 : “吾藏劍南山之陰, 北山之陽, 松生石上, 劍在其中矣. 君若覺, 殺我. 爾生男以告之.” -유향劉向의『열사전列士傳』 간장과 막야 없애버리면, 이 세상 어둠 누가 물리치나. 요괴 다 베고 나니 온갖 귀..

난세가 만든 불행-채문희蔡文姬

한낮엔 울면서 걸음 옮겼고, 밤이면 슬픔으로 눈물 흘렸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고, 살려고 해도 한 점 희망 없었네. 하늘이여, 무슨 잘못 했기에, 이런 재앙 만나게 했나. 변경 거친 땅은 중원과 같지 않고, 인성은 거칠어 예의를 따지지 않네. 旦則號泣行, 夜則悲吟坐. 欲死不能得, 欲生無一可. 彼蒼者何辜, 乃遭此厄禍. 邊荒與華異, 人俗少義理. 채문희의 부분이다. 이런 고통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피맺힌 한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역사가 만든 '소용돌이'는 재능 넘치는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용돌이. 국어사전은 이 낱말을 '바닥이 팬 자리에서 물이 빙빙 돌면서 흐르는 현상, 또는 그런 곳.'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힘이 뒤엉켜 요란스러운 상태'를 비유한다고 덧붙였다. 동한 말엽에 태어나 삼국..

재상이 된 개백정-번쾌樊噲

1. 패현 땅의 개백정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는 개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고조와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舞陽侯樊噲者, 沛人也. 以屠狗爲事, 與高祖俱隱.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의 첫 번째 단락 두 문장을 몽땅 가져왔다. 이 편은 고조 유방의 충성스러운 장수 번쾌, 역상酈商, 하후영夏侯嬰, 그리고 관영灌嬰, 이 네 사람의 합전으로서 초한전쟁을 거쳐 한나라를 여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의 전기이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철저히 ‘지체가 한껏 낮은 사람들’이었지만 난세가 만들어 낸 시대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스스로 이뤄낸 영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번쾌의 고향 패현은 곧 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이들 두 사람은 진나라 말엽에 재앙을 피하기..

세 치 혀의 해학-동방삭東方朔

한나라 무제 유철은 황제에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질고 착한 인재를 불러 쓰겠다고 널리 알렸다. 이때, 제나라 사람 동방삭東方朔이 장안으로 올라와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는 글을 올렸다. 그것도 황제에게 상주할 때 쓰는 죽간 3천 장에 이르는 긴 글이었기에 한무제 유철이 이를 읽는 데만 두 달이 꼬박 걸렸다고 하니, 동방삭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익살스럽고 언사가 민첩한데다 재치까지 넘쳐서 무제 유철도 늘 그와 자리를 함께하며 담소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방삭을 익살과 재치 넘치는 광대로 취급하며 높여 쓰지 않았다. 사마천은 ‘열전’ 70편 가운데「골계열전滑稽列傳」의 여러 인물 가운데 동방삭을 넣어 그의 언행을 기록했다..

양수청풍兩袖淸風-왕이열王爾烈

맑은 개울 사슴이 건넜어도 이끼는 차분하네. 幽溪鹿過還苔靜. 어려서부터 어른들 곁에 기웃거리길 좋아하던 왕이열王爾烈이었다. 지방의 풍토와 특색을 이야깃거리로 삼았지만 마침내 나라의 큰일에 이르러 설왕설래할 때면 어린 왕이열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온 마음을 다 기울였다. 어른들도 그의 비범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시구 한 구절을 던지며 짝이 되는 구절을 읊도록 채근하는 일이 잦았다. 앞에 든 시구는 탁월한 안목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던 승려 한 분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마침 명사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벌이던 이 집에 들러 왕이열을 특별히 지명하며 내놓은 시구이다. 여러 사람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왕이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시구에 짝이 될 대련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깊은 산에 구름이 덮였어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진만년陳萬年과 진함陳咸

진만년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그 아들 진함을 침상 곁으로 불러 훈계했다. 삼경에 이르자 아들 진함이 잠이 들어 머리를 병풍에 부딪쳤다. 진만년은 크게 화를 내며 막대기로 치려고 했다. “아비가 지금 너를 훈계하고 있거늘, 너는 오히려 잠을 자며 아비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고?” 진함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다 듣고 있습니다. 요지는 그저 아첨하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진만년은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陳萬年乃朝中重臣也, 嘗病, 召其子咸戒于床下. 語至三更, 咸睡, 頭觸屛風. 萬年大怒, 欲杖之, 曰 : “乃公戒汝, 汝反睡, 不聽吾言, 何也?” 咸叩頭謝曰 : “具曉所言, 大要敎咸諂也.” 萬年乃不敢復言. 『한서漢書』 「진만년전陳萬年傳」 관아 곡식..

시대가 몰라본 천재 음악가-만보상萬寶常

만보상이 어느 곳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 만대통萬大通은 양梁의 장군 왕림 王琳을 따라 북제北齊로 귀순했다. 뒷날 강남의 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이 때문에 만보상은 주악을 관장하는 악호樂戶로 유배되었다. 그가 음률에 정통한데다 갖가지 악기를 능속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옥경玉磬을 만들어 북제의 황제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萬寶常, 不知何許人也. 父大通, 從梁將王琳歸于齊. 後復謀還江南, 事泄, 伏誅. 由是寶常被配爲樂戶, 因而妙達鍾律, 遍工八音. 造玉磬以獻于齊. 『수서隋書』「만보상열전萬寶常列傳」 사수泗水 돌 잘라 경쇠를 만드니, 옛 음악 소박하다 듣는 이 적었다네. 악공이 천시 받아 백아伯牙 사광師曠 드물어지니, 사악한 소리 가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 싫어했..

피를 토하고 죽은 참장군 - 주아부周亞夫

1. 관상 한나라 초기, 허부許負는 나라 안에 이름을 날리던 관상쟁이였다. 관상에 관한 저서까지 남길 정도였던 그녀는 사마천이「유협열전游俠列傳」에 데려온 협객 곽해郭解의 외할머니였다. 주아부周亞夫가 그녀를 불러 자기 관상을 맡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그녀에게 자기 얼굴을 보이며 앞날을 알고 싶은 이는 이미 주아부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 해 뒤 후에 봉해지고, 다시 여덟 해가 지나 장군과 승상이 되어 큰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허부의 말에 주아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 주발周勃에게 주아부는 맏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당연히 맏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며 맏아들이 죽더라도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부가 내어놓은 그 다..

사마천의 외딸-사마영司馬英

『사기』는 우리를 한껏 압도하는 엄청나고 굉장한 무대이다. 등장인물의 숫자만 해도 4천여 명, 이들이 종횡무진 활동하는 범위도 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중원을 넘어 동서남북 주변 국가까지 포섭한다. 지난 네 해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00도서관’에서 학인들과 함께 사마천의 『사기』를 강독하면서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받으며 당시의 역사 인물을 되살리느라 자못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모임을 이끌면서 특별히 여인들의 삶에 눈길을 주었고, 그 결과 오늘 ‘00필 선생이 『사기』에서 만난 여인’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곁에 있었던 여인들이 궁금했지만 『사기』에서는 정작 찾을 수 없었다. ‘열전’ 마지막 편「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도 그의 가계와 아버지의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