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치呂雉와 척부인戚夫人의 화해 없는 갈등
1. 어귀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얼개로 3천여 년의 역사를 아울렀다. 역사의 지평을 한껏 밀어 올리며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의 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본기’는 자신의 눈에 비친 제왕들의 이야기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이 ‘본기’ 열두 편 가운데 보란 듯이 의젓하게 한 편장을 차지한 「여태후본기」를 두고 뒤의 여러 학자들이「항우본기」와 더불어 갑론을박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여태후본기」는『이십사사二十四史』로서『사기』의 바로 뒤를 이은『전한서前漢書』도「고후기高后紀」로써 황제의 역사에 편입시켜 사마천과 같은 시각으로 취급했다. 이는「항우본기」를『한서』에서는「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으로 한데 엮은 것과는 대조되는 지점이다.
유방이 진나라 말엽의 난세에 우뚝 선 영웅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온전히 진나라 말엽의 난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고향 마을 패현沛縣의 현령이 베푼 잔치에 외상으로 진상품을 처리하고 상석을 차지할 정도로 예의를 멀리한 그의 배짱이 없었더라면 정실로서 나중에 황후가 된 여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에 이름조차 찾을 수 없이 다만 여공呂公으로만 알려진 그녀의 아버지의 관상술도 유방과 여치를 맺는 데 한몫했다.
2. 여치, 유방을 만나다
그날, 패현의 현령이 베푼 잔치에 참석한 유방은 진상품이 1천 냥에 이르지 않은 하례객은 당 아래 앉아야 한다는 지방 관리 소하蕭何의 공지를 듣자 당장 그 자리에서 명함에 ‘하례금 1만 냥’이라고 써 넣고는 당상으로 인도받았다. 사실 그는 주머니에 한 냥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이때, 당상으로 올라오는 그를 놓치지 않고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치의 아버지 여공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여공이 눈짓을 하며 유방을 자리에 도로 앉혔다.「고조본기」를 펼친다.
여공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젊어서부터 관상 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그대와 같은 관상은 없었습니다. 그대는 자중자 애하기 바랍니다. 제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대 집안의 청소나 하는 첩으로 삼아주십시오.”
呂公曰 : “臣少好相人, 相人多矣, 無如季相, 原季自愛. 臣有息女, 原爲季箕帚妾.”
여공의 아내 여온呂媼이 화를 내며 난리였지만 한 번 한 약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고조본기」는 이 부분을 이어 여후 자신은 물론 제 몸으로 낳은 아들 유영劉盈과 딸 유락劉樂을 관상쟁이에게 보이는 장면을 보여 준다. 관상쟁이의 말대로 여치는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 아들 유영은 통일 제국 서한의 두 번째 황제 효혜제孝惠帝가 되었으며, 딸 유락은 노원공주가 되었다. 관상쟁이가 진짜 이렇게 관상을 잘 보았을까, 아니면 황실의 면면에 신성과 위엄을 돋을새김하기 위해 나중에 꾸민 이야기일까. 어떻든 ‘꿈’이나 ‘관상’, 그리고 ‘점복’ 등은 고대 사회에서 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크게는 한 나라의 명운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여치는 유방보다 열다섯 살 아래였다. 근거가 되는 사료를 찾을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여치가 유방을 만났을 때의 나이를 스무 살이라고 했을 때, 유방은 이미 서른다섯, 게다가 유방에게는 이미 남몰래 숨겨둔 여자까지 있었다. 여치의 아버지 여공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그는 유방이 서른다섯 살,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라고 짐작했을까, 아니라면 ‘멋진 관상’에 홀려 ‘청소나 하는 첩’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까.「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첫 머리 한 단락을 그대로 가져온다.
제나라 도혜왕 유비劉肥는 고조의 맏아들로서 그의 어머니는 고조의 옛 정부情婦 조씨曹氏였다. 고조 6년, 유비를 제나라 왕으로 삼고 식읍 70개 성을 내리고 백성들 가운데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이는 모두 제나라 왕에게 주었다.
齊悼惠王劉肥者, 高祖長庶男也. 其母外婦也, 曰曹氏. 高祖六年, 立肥爲齊王, 食七十城, 諸民能齊言者皆予齊王.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유비가 봉지로 받은 제나라 땅에서 쓰는 말이 서한의 도성 장안長安 지방의 말과는 서로 통하지 않을 만큼 방언 이상의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는 언어학자의 몫, 비켜갈 수밖에 없다.
3. 여치의 샘
여치는 유방의 정처이긴 했지만 남편인 유방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유비를 낳은 어머니 조씨의 행적을 찾았지만 사마천의『사기』1백 3십 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단지「제도혜왕세가」앞머리에서 태후 여치의 조씨에 대한 타는 시샘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제나라 도혜왕은 효혜제의 형이다. 효혜제 2년, 제나라 도혜왕이 조정의 조회에 들어왔다. 혜제는 도혜왕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집안사람처럼 서로 같은 예절로 대했다. 여태후가 화를 내며 도혜왕을 죽이려고 했다. 도혜왕은 몸을 피하지 못할세라 두려웠는데, 그의 내사內史 훈勛이 내놓은 계책에 따라 성양군城陽郡을 바쳐 노원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도록 했다. 여태후는 기뻐했고, 도혜왕은 인사를 올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齊王, 孝惠帝兄也. 孝惠帝二年, 齊王入朝. 惠帝與齊王燕飮, 亢禮呂家人. 呂太后怒, 且誅齊王. 齊王懼不得脫, 乃用其內史勛計, 獻城陽郡, 以爲魯元公主湯沐邑. 呂太后喜, 乃得辭就國.
이때, 만약 도혜왕의 생모 조씨가 어딘가 살아 있었더라면 여치의 시샘은 폭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씨는 세상에 없었고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도혜왕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치에게는 눈엣가시로 시퍼렇게 살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바로 척부인이었다. 그녀는 유방의 한없는 굄을 받고 있었다. 피가 튀고 창이 번득이는 전쟁터에서도 유방의 곁에는 언제나 척부인이 함께할 정도였다. 척부인은 고조 유방의 총애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뿐인 아들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만들려고 온 힘을 쏟았다. 당시 태자는 정부인의 하나뿐인 아들 유영으로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여후는 자기보다 17년이나 젊은 척부인이 유방의 굄을 독차지하는 꼴을 보며 날마다 분노와 질투로 치를 떨었다. 이제는 흰 머리카락에 주름까지 생기는 자기 모습을 보며 한숨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고통도 모자라 고조 유방까지 나서서 제 몸으로 낳은 태자 유영을 내치고 척부인 몸에서 낳은 유여의를 태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모의를 물리치는 데 힘을 쏟아야 했다.「외척세가外戚世家」에서 한 부분을 가져온다.
한나라가 흥성하면서 여아후呂娥姁(여후를 가리킴)가 고조의 정후正后가 되었으며, 아들은 태자가 되었다. 그녀는 늘그막에 이르러 안색이 스러지고 총애도 느슨해졌지만 척부인은 총애를 받으며 그 아들 여의가 거의 태자를 대신하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 고조가 세상을 뜨자 여후는 척씨를 죽이고 조왕趙王 여의까지 주살했다.
漢興, 呂娥姁爲高祖正后, 男爲太子. 及晩節色衰愛弛, 而戚夫人有寵, 其子如意幾代太子者數矣. 及高祖崩, 呂后夷戚氏, 誅趙王.
「여태후본기」는 여치가 척부인을 끝내는 장면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한 번 보자.
태후는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잘라버리고 그녀의 눈알까지 도려냈으며 불을 쐬어 귀를 먹게 하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서 돼지우리에 살게 했다. 그리고 ‘사람돼지’라 일렀다.
太后遂斷戚夫人手足, 去眼, 煇耳, 飮瘖藥, 使居厠中, 命曰“人彘”
척부인이 이제 막 스물을 넘었을 때 얼마 전에 쉰 고개를 넘은 유방을 만나며 받기 시작한 총애는 대단했다. 척부인이 낳은 여의를 태자로 바꾸어 세우려는 데까지 이를 정도였다. 여후는 이 위기를 헤치고 제 몸으로 낳은 유영을 태자로 지키는 데 끝내 성공했다. 깊은 지혜와 계략으로 고조 유방의 오늘을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한 장량張良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이른바 ‘상산사호常山四皓’가 태자를 보좌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장량이었다. 자기가 그토록 모시려고 했던 이 분들을 곁으로 부르지 못했던 고조 유방이 척부인에게 건넨 말 한 마디를 사마천은「유후세기留侯世家」에 이렇게 기록했다.
“짐이 태자를 바꾸려고 했지만,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여 이미 날개가 생겼으니 바꾸기 어렵겠소. 여후가 참으로 그대의 주인이오.”
“我欲易之, 彼四人補之, 羽翼已成, 難動矣. 呂后眞而主矣.”
척부인은 흐느끼며 울었다. 몇 해 뒤, 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유영이 효혜제로 자리에 올랐다. 권력의 추는 태후가 된 여치에게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녀의 가슴에 켜켜이 쌓였던 분노와 원한은 척부인을 ‘사람돼지’로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가 낳은 아들 유여의를 끝장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4. 최후의 승자 박태후薄太后
혜제는 마음이 여린 황제였다. 생모 여태후가 ‘사람돼지’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날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이 정도를 넘어섰고 음란한 음악에 몸과 마음을 던지며 깊은 병에 잠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조나라 제후왕 자리에 있던 유여의까지 불러들여 독살하자 혜제는 몸을 일으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혜제는 자리에 오른 지 일곱 해째 되는 해, 기원전 188년, 스물세 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여태후가 모든 권한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꼭두각시 황제를 앞에 두고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했다. 유씨가 권력의 변방으로 밀리고 여태후의 친정 쪽 여씨가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유방의 또 다른 한 여인이었던 박희薄姬쯤은 말 한 마디로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박희는 온전히 제 몸을 간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으로 낳은 아들 유항劉恒도 여태후의 올무에 걸리지 않았다.「외척세가」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한왕 유방이 박희薄姬를 불쌍히 여기며 이날 그녀를 불러 동침했다. 이때, 박희가 이렇게 아뢰었다.
“어젯밤 첩은 푸른 용이 제 배 위에 머무는 꿈을 꾸었습니다.”
유방이 말했다.
“이는 귀하게 될 징조로다, 내 그대가 이를 이룰 수 있게 해 줌세.”
이날 동침으로 사내아이를 낳으니, 바로 대왕代王이다. 이 뒤, 박희는 한왕 유방을 보는 날이 아주 적었다.
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난 뒤, 고조를 시중들며 총애를 받던 척부인을 비롯한 비빈들이 여태후의 노여움으로 모두 유폐되어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희는 고조 유방을 보는 날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漢王憐薄姬, 是日召而幸之. 薄姬曰 : “昨暮夜妾夢蒼龍據吾腹.” 高帝曰 : “此貴徵也. 吾爲女遂成之.” 一幸生男, 是爲代王. 其後薄姬希見高祖.
高祖崩, 諸御幸姬戚夫人之屬, 呂太后怒, 皆幽之, 不得出宮. 而薄姬以希見故, 得出.
박희는 원래, 진나라 말기 제후들이 모반할 때, 위魏 나라 왕으로 세워진 위표魏豹의 첩실이었다. 위표는 새로운 전국시대라 일컫는 진나라 말엽의 난세에 유방과 항우를 번갈아 섬기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유방의 장수 주가周苛의 손에 목이 내려졌다. 위표의 희첩들이 갇힌 직실織室에 들렀던 한왕 유방이 박희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후궁으로 들이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도록 동침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날 한 번 동침으로 사내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 뒤, 유방의 굄이 그리 지극하지 않았다는 점이 태후 여치의 분노와 샘을 일으키지 않았던 듯하다. 또 행간을 살피건대, 박희가 척부인처럼 유방의 굄을 차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없고, 제 몸으로 낳은 하나뿐인 아들 유항을 태자로 세우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은 듯하다. 박희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드러나지 않는 갈등으로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웠던 궁중에서 스스로 몸을 낮추며 살길을 택했던 것이다.
기원전 180년, 여씨 천하를 이끌며 앞장섰던 태후 여치가 예순한 살로 세상을 떠나자 몇 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반대 세력이 힘을 모았다. 태위 주발周勃과 승상 진평陳平이 대왕代王의 자리에 있던 유항을 도성으로 맞아들였다. 자리에 오른 유항, 곧 문제文帝는 바로 박희가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아닌가. 박희는 바로 박황후薄皇后가 되었다.
그날, 위표의 첩실로 들어가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모셔온 관상쟁이는, 박희를 보는 순간 ‘천자를 낳을 관상이오.’라고 일렀다. 또 그날, 그녀는 유방을 침실에서 맞으며, ‘어젯밤 첩은 푸른 용이 제 배 위에 머무는 꿈을 꾸었습니다.’라고 속삭였다. 관상쟁이의 말도 꿈도 모두 ‘있음의 세계’가 되었다. ‘문경의 치세’라는 태평성세를 연 첫 황제 문제, 그의 아들 경제, 그리고 경제의 아들이면서 문제의 손자 무제武帝에 이르는 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거기에 ‘박희’가 있다. 박씨에서 박희로, 박희에서 박태후로, 다시 박태후에서 태황태후에 이른 그녀야말로 최후의 승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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