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의 황후 목씨穆氏의 이름은 야리邪利이다. 본시 (북제 후주의 첫 번째 황후) 곡률후斛律后의 여종이었다.
後主皇后穆氏, 名邪利, 本斛律后從婢也.
『북제서北齊書』 「열전제일列傳第一」
남북조 시대 북제의 역사를 보면, 그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잇달아 자리에 오른 여섯 황제가 스물여덟 해나 통치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여섯 황제가 거의 하나같이 잔혹한데다 황음무도했으며 변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형인 고징高澄의 정실부인을 간음까지 한 데다 술을 마시면 입었던 옷을 몽땅 벗어버리고 알몸 달리기를 했던 문선제 고양은 북제의 첫 번째 황제였으며, 열여섯 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제법 민생에 관심을 두고 국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았던 두 번째 황제 고은高殷은 이태도 채우지 못하고 열일곱 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버렸으며, 조카를 죽이고 세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른 효소제 고연高演은 인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조카를 죽였다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네 번째 황제 무성제 고담은 형인 고양의 정실부인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협박하며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으며, 고담의 뒤를 이어 다섯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위는 나라가 망한 뒤 창기가 된 호황후의 첫아들로서 황음의 정도가 폭군으로 이름난 걸주에 견줄 만했다.
이런 고위의 세 번째 황후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목야리穆邪利도 북제의 여러 황제들 못지않게 ‘바른 길’에서 저만치 벗어난 한평생을 살았다. 목야리의 생모 경소輕霄는 원래 목자륜穆子倫 집안에서 하녀로 살다가 그 뒤 시중의 자리에 있던 송도흠宋道欽 집안의 하녀가 된 인물이다. 이 하녀가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태어난 아이의 아비가 송도흠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했고 목자륜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목야리였다. 어렸을 때 이 아이에게는 목황화穆黃花라는 아명이 붙여졌다.
뒷날, 송도흠이 사형을 당하며 세상을 버리자 황화는 궁중으로 끌려갔다. 궁중에 온 그녀는 당시 고위의 첫 번째 황후였던 곡률斛律의 몸종이 되었다. 그러면 독자들은 몸종이 된 목야리의 앞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얼개를 가진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인 고위의 굄을 받게 된다. 그리고 황제에게 아들을 안긴다. 고항高恒이었다. 황후의 몸종이라는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 황제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바닥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오를 수 있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어느 날 황제의 어머니, 곧 태상황후가 될 터이니까. 그러나 이는 또 한편 커다란 위기일 수도 있다. 태자 책봉을 둘러싼 권력의 암투에서 패배하는 순간 어머니와 아들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황제의 유모 육영훤陸令萱이 목야리 편에 섰다. 육영훤은 북위北魏의 고급장교 낙초駱超의 아내였다. 그러나 모반을 꾀하던 낙초가 성공하지 못하고 처형되자 그녀는 궁중으로 잡혀 가서 그만 몸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뒷날, 장광왕 고담의 궁중으로 뽑혀 가서 태자 고위의 유모가 되어 군군郡君으로 봉해졌다. 뒤에 고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유모였던 육영훤은 정3품 여시중女侍中의 벼슬을 받았다. 그녀는 고위와 함께 조정을 한 손아귀에 쥐고 바른말하는 충신들을 멀리 내치며 권세를 휘둘렀다. 육영훤이 목야리 편에 섰다는 말은 목야리로서는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위가 아직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을 때였다. 육영훤은 계교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목야리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목야리가 낳은 아들 고항도 황태자로 봉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자기들이 바랐던 대로 행복하게 펼쳐지지 않았다. 고항은 북제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야 했으며, 조정을 쥐락펴락했던 여시중 육영훤도 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서쪽으로 길게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이들의 숙적 북주와의 싸움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황후의 자리에 올랐던 목야리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게다가 고위가 목야리의 몸종 풍소련馮小憐에게 빠지며 목야리를 황후의 자리에서 내치고 그 자리에 풍소련을 앉히려고 했다. 때마침 북주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으로 진양晋陽이 북제에 함락되었다. 진양은 북제의 도읍 업성 다음가는 큰 도시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AD 577년 정월, 고위는 고항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고항은 자기 어머니 목야리를 태상황후로 높였다. 그러나 고항이 자리에 오른 지 스물다섯 날 뒤에 도성 업성鄴城이 북주의 손에 들어가면서 북제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중국 황제들은 대부분 쏟아야 할 사랑을 한 여인에만 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도 북제의 황제들은 유별났다. 고위도 첫 번째 황후 곡률 곁을 지키는 몸종 목야리에게 눈길을 돌렸고, 이어서 목야리 곁을 지키던 몸종 풍소련에게 눈길을 돌렸다. 북제 황제의 황음무도와 변태적 행위의 남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피내림이었을까? 아니면 부족한 자질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황제의 아들이면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옛적 봉건 왕조의 구조적 모순이 낳은 결과일까?
무성제 고담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를 위해 진주로 장식한 치마를 만들어 올렸다. 이 진주 치마를 만드는 데 든 돈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컸지만 잠깐의 실수로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고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또 황후가 된 목야리를 위해 이 진주 치마를 제작했다. 때마침 북주의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어머니 질노태후叱奴太后가 세상을 떠났다. 고위는 설고薛孤, 강매康買 등을 조문 사절로 뽑았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호인에게 채색 비단 3만 필을 가지고 이들 조문 사절과 함께 북주의 도성으로 향하게 했다. 목야리의 몸을 실을 칠보七寶 수레를 치장할 진주와 바꿔오게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북주 사람들은 이들과 아예 교역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끝내 진주를 구해 왔다. 당시 북제의 도성 업성에서는 골목을 뛰놀던 아이들의 입에서 이런 동요가 흘러나왔다.
황화가 떨어질 날 멀지 않았네,
잔 가득 술이 넘친다네.
黃花勢欲落,/淸觴滿杯酌.
‘황화’는 목야리의 아명이다. 황화의 운명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고위가 목야리를 황후로 세운 뒤, 잔 넘치도록 술만 마시며 절제하지도 못하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당시 육영훤의 아들 낙제파駱提婆에게 목씨穆氏 성을 황제의 이름으로 내리고, 육영훤에게 태희太姬라는 봉작을 내린 건 모두 목야리의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이렇게 목야리는 육영훤을 어미로 삼은 뒤, 자기를 낳은 경소를 이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훗날, 경소가 얼굴에 당했던 자자刺字를 깨끗하게 없앤 뒤, 딸 목야리를 만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는 물론 육영훤이 사람을 보내 경소를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게 통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목야리가 아예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던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은 지금의 부귀와 영화만을 내보이고 싶을 뿐, 재물도 없었고 신분도 낮았던 지난날의 모습은 가리려고 한다. 아니 아예 없애려고 한다. 이는 예나 이제나 다를 바 없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고위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항은 겨우 스물다섯 날 만에 끝장을 맞아야 했다. 업성을 점령한 북주는 황실 남자들은 모두 목을 내렸지만 황실의 여자들은 민간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끝냈다. 민간으로 쫓겨난 목야리는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리저리 헤매던 그녀는 소금장수의 첩으로 들어가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지만 그것도 마음과는 달랐다. 소금장수 본처의 강샘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매질을 견지지 못한 그녀는 이 집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밥을 빌어먹으며 장안으로 온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기루를 세웠다. 이 기루는 당시 양자강 남쪽과 북쪽을 통틀어 가장 이름난 기녀들을 거느린 승지가 되었다.
황후로서 누렸던 부귀와 영화는 과거의 일이었다. 왕조의 멸망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이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안겼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의 급전직하였다. 그러나 한 왕조의 황후라는 과거의 신분이 훈장처럼 화려한 빛을 발했던 걸까? 그녀가 장안에 세운 기루에는 수많은 남성들이 찾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들 남성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또 다시 진주로 만든 치마를 제작했을지도 모른다.
겨우 스물여덟 해 지속되었던 고씨 왕조 북제의 황후 가운데 둘이나 기녀로 전락했다. 삶이란 어느 경우에도 함부로 허물 수 없는 ‘있음’ 그 자체이기에 끝까지 기품을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건 한낱 사치일까? 이들에게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꼿꼿하게 서서 죽으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삶’에 대한 지나친 요구일까? 하기야 함께 이 길을 걸었던 호황후는 ‘황후 노릇보다 기생 노릇이 더 즐겁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으니, 이들은 애초에 구중궁궐보다는 저잣거리 저편에 화려하게 등불 밝힌 ‘기루’를 선택했어야 했다.
역사는 이들에게 ‘선택’의 가지를 내밀기보다 ‘운명’을 안긴 듯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도 힘들지만, 아픈 ‘운명’을 선뜻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이런 역사 인물을 만날 때면, 내 마음은 기댈 데 없이 슬프고 쓸쓸하다. 당나라 때 시인 이백도 그랬을까? 그가 읊은 『행로난行路難』 가운데 한 구절이다.
세상 나아갈 길 어려워라, 세상 나아갈 길 어려워!
갈림길 이리 많으니, 내 어디로 가야할꼬?
行路難! 行路難!
多岐路, 今安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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