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초楚 나라 장왕莊王을 가리켜 ‘어질고 착하구나, 초왕이여!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 마디 말을 소중히 여겼구나.’, 이렇게 찬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왕은 자그마한 제후국 진陳 나라 군주 영공을 시해한 하징서夏徵舒를 죽이고 이 나라를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만들었다. 그 뒤, 그는 신숙시申叔時의 ‘하징서가 그의 임금을 시해했다고 해서 여러 제후들의 군대를 모아 정의라는 이름으로 징벌하고 또 얼마 뒤에 그 땅까지 차지한다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겠느냐?’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진나라를 후손에 돌려주었다. 공자가 한 말은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초나라 장왕은 신하의 간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초나라 장왕이 처음부터 이렇게 귀를 너그럽게 열지는 않았다. 기원전 614년, 갓스물 한창 나이에 자리에 오른 그는 세 해 동안 밤낮으로 향락을 일삼으며 감히 자기의 행동에 간언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고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정도였다. 군사를 책임진 좌사마左司馬 오거伍擧가 입궐하여 간언을 올릴 때에도 장왕은 왼팔로는 정나라 희첩을 껴안고, 오른팔로는 월나라 계집을 껴안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신하의 간언에 문득 깨달은 장왕의 이후 모습은 춘추시대 오패 가운데 하나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재치와 유창한 말솜씨로 장왕을 깨우친 인물 가운데 우맹優孟을 지나칠 수 없다. 우맹은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의 궁정에서 일하던 음악가였다. 말솜씨가 좋아 언제나 웃으며 이야기하는 중에도 풍자로써 간언을 올리는 데 남달랐다. 더구나 이 시대의 인물로서는 보기 드물게 키가 여덟 자나 되었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한 자는 지금의 23.1cm와 같으니 계산하면 그의 키는 1m 85cm에 상당한다. 장왕 앞에 선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낮추었을지라도, 자못 우람하다. 게다가 말솜씨에 음악가로서의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더해져서 장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제격이었을 것 같다.
장왕에게는 특별히 사랑하며 아끼는 동물이 한 마리 있었다. 바로 한 필의 말이었다. 장왕은 이 말을 위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집을 짓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멋진 침대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곱고 아름다운 비단옷을 해 입히고 꿀에 저민 대추와 얇게 저며 양념하여 말린 쇠고기를 먹였다. 말에게 베푼 지나친 호사는 장왕이 사랑하는 말을 비만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장왕의 애가 타는 듯이 절실한 마음이야 헤아릴 수 있지만 말은 말이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왕은 대부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신하들에게는 상복을 입게 하고 죽은 말에게는 속 널과 덧널을 모두 마련하라고 일렀다.
많은 신하들이 앞을 다투어 장왕의 그름을 간언했다. 그러나 왕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사랑했던 말을 두고 간언하는 자는 목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 우맹이 등장한다. 그는 대궐 문으로 들어가 하늘을 우러러 소리 높여 통곡하기 시작했다. 키 크고 목소리 우렁찬 그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장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울음을 그친 우맹과 놀란 장왕이 주고받는 대화가 일품이다.「골계열전滑稽列傳」에서 데려온다.
왕이 깜짝 놀라며 그 까닭을 묻자 우맹은 이렇게 대답했다.
“말은 왕께서 아끼시던 것입니다. 초나라가 이렇게 기백이 넘치는 큰 나라인데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대부의 예로써 장사를 지낸다니 박정하십니다. 임금의 예로써 장사지내기를 바랍니다.”
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우맹이 대답했다.
“제가 청하오니 옥을 다듬어 속 널을 짜고 무늬 있는 가래나무로 덧널을 만들고, 느릅나무와 단풍나무로 (관을 보호하는) 횡대를 만드십시오.. 병사들을 내어 구덩이를 파게 하고, 노약자들에게 흙을 져 나르게 하고, 제나라와 조나라의 사신을 앞쪽에 열을 지어 서게 하고, 한나라와 위나라 사신이 그 뒤에서 호위하게 하십시오. 사당을 지어 태뢰太牢로 제사를 받들고, 만 호의 읍으로 모시게 하십시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모두 대왕께서 사람을 천히 여기고 말을 귀히 여기는 줄 알 것입니다.”
王驚而問其故, 優孟曰 : “馬者王之所愛也, 以楚國堂堂之大, 何求不得, 而以大夫禮葬之, 薄, 請以人君禮葬之.” 王曰 : “何如?” 對曰 : “臣請以彫玉爲棺, 文梓爲椁, 楩楓豫章爲題湊, 發甲卒爲穿壙, 老弱負土, 齊趙陪位於前, 韓魏翼衛其後, 廟食太牢, 奉以萬戶之邑. 諸侯聞之, 皆知大王賤人而貴馬也.”
장왕은 자신의 그름을 고치려던 그 많은 신하의 간언에 귀를 열지 않았지만 우맹의 간언에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사마천은 그 많은 신하들이 어떻게 간언을 올렸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다만 궁중의 예인 우맹의 경우만 기록했을 뿐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왕의 귀를 열지 못했던 그 많은 신하들의 간언은 ‘직선의 도로’였을 것이다. ‘직선의 도로’는 빠르고 날카롭지만 그만큼 빠르고 날카롭게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이와는 달리 우맹이 선택한 ‘곡선의 도로’는 느리고 부드럽지만 상처 입히지 않고 깊이 감동시킬 가능성이 높다.
잘못을 뉘우치며 방법을 묻는 장왕에게 우맹은 똑같은 화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부뚜막을 덧널로 삼고 구리로 만든 솥을 속 널로 삼아 활활 타오르는 불빛으로 옷을 입혀 사람의 창자 속에 장사지내자고 방법을 올렸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맹이 자기 아내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알 길 없다. 그러나 우맹이 장왕을 깨우친 두 번째 일화에는 그에게 도움을 준 아내의 지혜가 보석처럼 빛난다.
초나라 장왕의 재상 손숙오孫叔敖는 임금을 잘 보좌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풍속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마천은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를 다룬「순리열전循吏列傳」에 입전된 다섯 가운데 손숙오를 가장 앞에 두었다. 손숙오는 세 차례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자기 재능으로 그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차례나 재상 자리를 떠났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자기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떳떳하고 정대했던 그도 아들의 앞날은 도시 미덥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아비가 죽으면 너는 분명 가난해질 터인즉 우맹을 찾아 뵙고, 제가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말씀 올려라.’,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과연 손숙오의 아들은 나뭇짐을 등에 지고 다닐 정도로 곤궁해지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우맹을 찾았다. 우맹은 이날부터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그의 말투와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한 해 넘도록 연습하자 이제는 주위에서도 손숙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장왕이 궁중에서 주연을 베푼 어느 날, 우맹이 앞으로 나아가 장수를 축원하자 깜짝 놀란 장왕이 손숙오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으며 재상에 앉히려고 했다. 그러자 우맹은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상의한 뒤 다시 임금을 뵙겠다고 말한 뒤 물러났다. 사흘 뒤 우맹이 다시 장왕을 찾아왔다.「골계열전」을 다시 펼친다.
왕이 물었다.
“그대 아내는 뭐라고 말했소?”
우맹은 이렇게 대답했다.
“ 제 아내는 ‘제발 하지 마십시오. 초나라 재상은 할 만한 자리가 못 됩니다. 손숙오 같은 어른은 초나라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여 청렴하게 나라를 다스려 초나라 왕을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이제 죽고 나자 그 아들은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고 살림살이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워서 나뭇짐 져서 스스로 먹을 것 마련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될 바에야 스스로 목숨 끊는 편이 낫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王曰 : “婦言謂何?” 孟曰 : “婦言愼無爲, 楚相不足爲也. 如孫叔敖之爲楚相, 盡忠爲廉以治楚, 楚王得以霸. 今死, 其子無立錐之地, 貧困負薪以自炊食. 必如孫叔敖, 不如自殺.”
이어서 우맹은 제법 긴 노래를 단숨에 불렀다. 노랫말은 죽을 때까지 청렴했던 초나라 재상 손숙오를 기리며 그 처자식의 곤궁한 현재를 안타까워한다. 장왕은 깊이 뉘우치며 손숙오의 아들에게 봉지를 내린다.
우맹의 아내가 내놓은 지혜가 장왕을 깊이 깨우쳤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 여인을 끝내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맹의 아내, 이 여인은 사마천이 펼친 역사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
사무엘 베케트는 그의 작품『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도’를 단 한 차례도 무대에 불러내지 않았다. 단지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래도 ‘고도’는 이 작품의 주제를 구현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우맹의 아내가 바로 이러하지 않은가?
유치진의『토막土幕』도 그렇다. 움으로 지은 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에서 ‘명수’는 무대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하여 되풀이하며 그의 존재를 드러낼 뿐 직접 무대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명수’는 이 작품의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는 중요한 ‘인물’이다.
춘추시대 초나라 궁정 음악가 우맹의 입을 통해 등장한 ‘우맹의 아내’는 군주 장왕의 허물을 고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맹 부부는 한평생을 함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갔을 것이다. 이들 부부는 장왕의 허물을 고치는 방법을 두고 사흘 밤낮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을 것이다.
막 내린 무대 앞쪽에 손잡고 등장하여 관중의 박수를 받는 이들 부부의 환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다. 우맹의 아내, 이 여인의 환하게 열린 얼굴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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