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난세가 만든 불행-채문희蔡文姬

촛불횃불 2022. 6. 1. 11:00

한낮엔 울면서 걸음 옮겼고,

밤이면 슬픔으로 눈물 흘렸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고,

살려고 해도 한 점 희망 없었네. 

하늘이여, 무슨 잘못 했기에,

이런 재앙 만나게 했나.

변경 거친 땅은 중원과 같지 않고,

인성은 거칠어 예의를 따지지 않네.

 

旦則號泣行, 夜則悲吟坐.

欲死不能得, 欲生無一可.

彼蒼者何辜, 乃遭此厄禍.

邊荒與華異, 人俗少義理.

 

 채문희의 <비분시悲憤詩> 부분이다. 이런 고통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피맺힌 한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역사가 만든 '소용돌이'는 재능 넘치는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용돌이. 국어사전은 이 낱말을 '바닥이 팬 자리에서 물이 빙빙 돌면서 흐르는 현상, 또는 그런 곳.'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힘이 뒤엉켜 요란스러운 상태'를 비유한다고 덧붙였다. 동한 말엽에 태어나 삼국시대 초엽을 살았던 채문희는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한평생을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격동의 시기는 시대의 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여성에게는 큰 고통을 안기게 마련이다. 채문희도 그랬다.  

 

채문희

  채문희. 본명은 채염, 자는 문희文姬. 진류군陳留郡 어현圉縣(지금의 허난성 치현杞縣) 출신으로 동한 말엽의 여류시인. 이 시대 저명한 문학가 채옹蔡邕의 딸로서 박학다재하여 문학, 음악, 서예에 두루 뛰어났다. 작품으로 <비분시>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 있다. 처음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으나 흉노의 좌현왕에게 포로로 잡혀 그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 둘을 낳았다. 조조曹操가 북쪽을 통일한 뒤 큰돈을 주고 그녀를 중원으로 데려와서 동사董祀에게 시집보냈다.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위의 글 가운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그녀의 한평생을 관통하는 시린 '한恨'을 만나게 된다. 이 글을 쓴 이는 그녀의 남자 세 사람을 '위중도-흉노의 좌현왕-동사'로 옮아가며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언어로 서술하지만, 이를 읽는 독자는 그녀의 안타깝고 슬픈 감정과 맞닿는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은 시대의 예와 이제는 물론 공간의 여기와 저기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동한 말 '삼국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형세도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위중도의 집안은 명문대가였다. 서한 무제의 두 번째 황후 위자부, 그리고 그녀의 동생으로서 대사마대장군이라는 큰 관직에 이르렀던 위청이 위중도의 가계 위쪽에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위세가 채문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결혼한 지 한 해도 되지 않아 그녀의 남편 위중도는 목에서 피를 쏟으며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아들 딸 하나 없이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그야말로 외돌토리였다. 

 재앙은 홑으로 오지 않고 겹으로 왔다. 업친 데 덮쳤고 눈 위에 서리까지 내렸다. 기원후 195년, 동탁董卓, 이각李傕 등이 난을 일으킨 와중에 속국을 자처하던 남흉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등을 돌리며 마구 약탈을 시작했다. 채문희는 이 때 흉노의 좌현왕에게 잡혀 북쪽으로 끌려갔다. 북쪽으로 끌려간 채문희는 열두 해 동안 '인성 거칠고 예의도 따지지 않는 거친 변경 땅'에서 살며 흉노의 좌현왕에게 두 아들을 안겼다. 

 건안建安 11년(기원후 207년), 때는 동한 말엽, 황제는 헌제獻帝였지만 권력의 추는 이미 조조曹操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꾀 많은 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된 조조는 원래 문학과 서예를 지극히 사랑한 선비였다. 이런 그가 당시 참 선비를 대표하는 지식인 채옹을 몰랐을 리 없었다. 문학과 서예를 고리로 조조와 채옹은 교류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조는 채옹의 하나뿐인 딸 채문희의 재능을 알고 있었다. 일찍이 채옹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조조는 금은보화 큰돈을 들여 남흉노 좌현왕의 첩실이 된 채문희를 중원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동사에게 시집보냈다. 

 

조조

 당시 동사는 조조 아래에서 둔전도위屯田都尉라는 벼슬을 했다. 국경 지대의 둔전을 관장하던 동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죽을 죄를 저지르고 사형 언도'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죄를 물어 처형하라는 문서를 쥔 전령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채문희는 당장 조조의 저택으로 내달았다. 이제는 마지막이 되어야 할 남편의 목숨을 살리는 데 앞뒤를 얽어맬 어떤 장벽도 그녀의 눈엔 보일 리 없었다. 당시 조조의 저택에는 고관 대작을 비롯한 여러 빈객들이 가득했다. 문간을 지키던 병사가 채옹의 딸 채문희가 뵙겠다는 소식을 올리자, 조조는 집안 가득한 빈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채옹의 딸이 나를 찾아왔소. 내가 그대들에게 그녀의 모습을 이제 보여드리겠소."

 아, 그런데 조조 앞에 나타난 그녀는 봉두난발에 맨발이었다. 이런 그녀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살려주옵소서. 제겐 이제 하나뿐인 남편이옵니다."

 목소리는 낭랑했지만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했다. 빈객들은 봉두난발에 맨발로 겉모습은 형편없었으나 그녀의 진심어린 표정에 감동했다. 

 조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죄를 묻는 문서가 이미 떠났으니, 어쩐다?"

 "어르신 마구에 준마가 몇 천 필이옵니다. 그리고 용맹스런 병사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제 남편의 목숨을 건져주소서."

 마침내 조조는 동사를 사면했다. 채문희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날, 조조는 그녀에게 머릿수건은 물론 버선과 신발까지 내렸다.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연주하는 채문희

 이날, 조조는 채문희의 넘치는 재능과 지혜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여러 빈객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대 집엔 서적이 많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생각해낼 수 있는가?"

 "당초에 부친께서 제게 남긴 서적은 4천여 권에 이르렀지만, 전란 중에 잃어버리고 불과 몇 권만 남았을 뿐이옵니다. 제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건 겨우 4백여 편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글씨 잘 쓰는 이를 한 열 명 불러 그 글을 쓰게 할 터인즉, 어떤가?"

 "아니옵니다. 남녀는 가까이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종이와 붓을 내려주시면 제 손으로 써서 올리겠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 서예가 아버지에 서예가 딸이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던 서적의 내용을 그대로 써서 조조에게 바쳤다. 틀린 점은 한 곳도 없었으니, 그녀의 기억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날, 집으로 돌아온 채문희는 슬픔과 분노를 삼키며 <비분시> 두 수를 지었다. 이 뒤, 채문희와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또 그녀가 어느 때 세상을 떠났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했기에, 오늘 우리는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