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재상이 된 개백정-번쾌樊噲

촛불횃불 2022. 5. 27. 18:59

1. 패현 땅의 개백정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는 개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고조와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舞陽侯樊噲者, 沛人也. 以屠狗爲事, 與高祖俱隱.

 

 「···관열전樊酈滕灌列傳의 첫 번째 단락 두 문장을 몽땅 가져왔다. 이 편은 고조 유방의 충성스러운 장수 번쾌, 역상酈商, 하후영夏侯嬰, 그리고 관영灌嬰, 이 네 사람의 합전으로서 초한전쟁을 거쳐 한나라를 여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의 전기이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철저히 지체가 한껏 낮은 사람들이었지만 난세가 만들어 낸 시대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스스로 이뤄낸 영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번쾌

 번쾌의 고향 패현은 곧 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이들 두 사람은 진나라 말엽에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일대에 숨어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이전에 이들이 어떤 연유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행적을 사마천은 기록하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킨 유방이 패현을 쳐서 무너뜨리고 패공沛公이 되자 번쾌를 시종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위의 인용 단락에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고조본기에는 유방이 사수정泗水亭 정장 시절 술과 여색을 좋아하여 항상 왕온王媼와 무부武負의 술집에서 외상으로 술을 마셨다.’는 구절이 있다. 이어지는 몇 문장을 가져온다.

 

 (고조는) 술에 취하면 드러누웠는데, 무부와 왕오는 유방의 몸 위에 언제나 용이 서리는 모습을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 고조가 술을 사 마시고 머물면 술이 몇 배나 더 팔렸다. 이렇게 기이함을 보자 세밑이 되면 이 두 집에서는 외상 장부를 찢어 외상값을 없앴다.

 醉臥, 武負, 王媼見其上常有龍, 怪之. 高祖每酤留飮, 酒讎數倍. 及見怪, 歲竟, 此兩家常折券棄責.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다가 외상으로 해결하는 빈털터리요 건달이었던 유방이 같은 동네에 사는 개백정 번쾌에게 외상 신세지지 않았을 리 없다. 번쾌는 매번 외상을 긋는 유방에게 눈을 흘겼을 것이다. 유방의 몸에 용이 서린 일이야 유방의 어머니 유 씨 아주머니에게도 일어난 일로 황제가 된 뒤의 용비어천가로 치부해도 될 일이다. 하지만 번쾌가 개 잡던 칼을 내던지고 유방을 따라 전쟁터로 나선 데에는 번쾌를 사로잡은 유방의 남다른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매력은 초한전쟁에서 항우와 대립되는 덕성, 곧 너그러움이 아니었을까.

 

2. 함께 자리한 두 영웅

 

 번쾌가 전쟁터에서 세운 공적은 몇 개의 문장으로는 모자랄 정도이다. 기록에는적군 00명의 목을 베고, 000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이런 구절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또 적의 병졸 29백 명을 한꺼번에 항복시켰다는 문장도 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목도 내리지 않았지만 초한전쟁 중에 이룬 큰 공적 하나를 지나칠 수 없다. 바로 항우가 홍문鴻門으로 유방을 불러 베푼 연회에서 위기에 빠진 유방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준 번쾌의 용기가 그것이다.

 진나라 말엽 농민군의 선봉에 섰던 진승이 죽은 뒤, 유방과 항우가 각각 이끄는 군대가 진나라에 맞선 주력 부대였다. 기원전 206년,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도성 함양에 진입했다. 뒤따라 항우가 이끄는 대군이 함양 가까이 당도했다. 초나라 회왕은 이 둘에게 먼저 함양에 들어가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이미 약조한 터였다. 당시 유방의 군대는 항우의 군대에 비하여 훨씬 약세였다. 당시 항우의 병사는 40만, 유방의 병사는 10만, 항우는 홍문에 있었고 유방은 패상覇上에 있었다. 진나라의 도성 함양에 가득 쌓인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미녀를 생각하며 항우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左司馬조무상曹武傷이 사람을 보내 항우에게 이렇게 밀고했다.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어 자영子嬰을 재상으로 삼고 장차 진나라 궁전에 있는 진귀한 보물을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유방을 당장 죽여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항우의 모사 범증范增도 유방을 서둘러 쳐서 목을 내려야 한다고 재촉했다. 이날 밤, 유방의 군막으로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이 남몰래 찾아와 장량張良을 찾았다. 장량은 한韓 나라 명문 출신으로 당시 유방의 책사였다. 항우의 좌윤左尹이었던 항백은 일찍이 살인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살려준 장량을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한밤 적의 한복판을 찾았던 것이다.

 “유방을 따라 함께 죽지 마오.”

항백이 장량에게 내놓은 말이었다. 항백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알게 된 장량은 유방에게 그대로 알리고 계책을 내놓았다. 감히 항우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올리고 직접 가서 사죄하라는 장량의 계책을 유방은 받아들였다. 이날 밤, 다시 자기 군영으로 돌아온 항백이 항우에게 보고한 말을 한 번 그대로 옮긴다.「항우본기」이다.

 

“패공 유방이 먼저 관중을 깨뜨리지 않았다면 공께서 어떻게 감히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그에게 큰 공이 있는데 그를 친다면 의롭지 않습니다. 이 일로 그를 잘 대우하는 게 좋습니다.”

“沛公不先破關中, 公豈敢入乎? 今人有大功而擊之, 不義也, 不如因善遇之.”

 

항우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이튿날 아침, 유방은 1백 명 남짓한 기병만 데리고 홍문에 이르러 항우에게 사죄했다.

 

3. 두 사람의 칼춤

 

  범증  
    항우
   항백
  장량
  유방  

                  -홍문연 좌석 배치도-

 항우는 그날 유방을 머물게 했다. 그리고 주연을 베풀어 군막 안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역사에서 이야기하는 ‘홍문연’의 좌석배치도를 사마천의 기록을 따르며 여기에 그려본다. 술이 불콰해지자 범증이 항우에게 여러 차례 눈짓을 보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옥고리까지 세 번이나 들어보였다. 유방을 죽이라는 암시였다. 항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범증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 항장項莊을 부르더니 이렇게 일렀다.

 “칼춤을 청하게. 그리고 기회를 틈타 패공을 쳐 죽이게.”

 

홍문연

 항장은 항우의 사촌동생이었다. 장막 안으로 들어온 항장은 자리한 이들에게 장수를 기원한 뒤 흥을 돋운다는 핑계를 대고 칼춤을 청했다. 항우의 승낙을 얻은 항장이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때, 항우 곁에 앉았던 항백도 벌떡 일어나 칼을 뽑더니 함께 춤을 추며 제 몸으로 유방을 막아주었다. 항장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춤을 추었지만 유방을 몸으로 막는 항백 때문에 공격할 수 없었다. 자리에 있던 유방의 책사 장량은 등골이 오싹했다. 슬그머니 일어난 장량이 장막 밖으로 나왔다. 번쾌가 장막 밖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칼춤을 추는 항장의 뜻이 오로지 유방에게 있다는 장량의 상황 설명을 들은 번쾌가 앞으로 나섰다.

 

4.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

 

 번쾌는 주군인 유방을 위해 죽고살기를 함께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터였다.「고조본기」는 ‘홍문연’에서 칼춤 속에 고조된 위기의 모습을 간략히 한 문장으로 기술하는 데 그쳤다.

 

패공은 번쾌와 장량의 도움으로 벗어나 돌아올 수 있었다.

沛公以樊噲, 張良故, 得解歸.

 

그 러나「항우본기」와「번·역·등·관열전」은 이 부분을 세밀화를 그리듯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묘사했다. 둘 가운데「항우본기」가 생동감을 주는 데 조금 더 앞섰다. 좀 길긴 하지만 이 부분은 다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번쾌는 즉시 칼을 차고 방패를 든 채 장막 문으로 다가갔다. 창을 엇갈리게 들고 섰던 호위병이 막으며 들여보내지 않으려 하자 번쾌는 방패를 비껴 쳐 이들이 땅에 쓰러지자 마침내 들어가서 휘장을 들추고 서쪽을 향해 서서 눈을 부릅뜨고 항왕을 노려보는데 머리카락은 곤두섰고 눈꼬리는 찢어진 채였다. 항왕이 칼에 손을 얹으며 무릎을 세우고 말했다.

 “저 양반은 무엇 하는 자인가?”

 장량이 대답했다.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

 항왕이 말했다.

 “장사로다. 그자에게 술을 내리리라.”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 말이나 내렸다. 번쾌는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 선 채로 다 마셔버렸다. 이를 본 항왕이 이렇게 일렀다.

 “그자에게 돼지다리를 내려라”

 곧 돼지다리 생것 한 쪽을 내렸다. 번쾌는 바닥에 방패를 엎어놓고 그 위에 돼지다리를 올려놓더니 칼을 뽑아 썰어서 먹었다. 항왕이 말했다.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
 번쾌가 대답했다.

 “저는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어찌 술을 마다하겠습니까!”

 噲卽帶劍擁盾入軍門. 交戟之衛士欲止不內, 樊噲側其盾以撞, 衛士僕地, 噲遂入, 披帷西鄕立, 瞋目視項王, 頭髮上指, 目眥盡裂. 項王按劍而跽曰 : “客何爲者?” 張良曰 : “沛公之驂乘樊噲者也.” 項王曰 : “壯士, 賜之卮酒.” 噲拜辭, 起, 立而飮之. 項王曰 : “賜之彘肩.” 卽與一生彘肩. 樊噲覆其盾於地, 加彘肩上, 拔劍切而啗之. 項王曰 : “壯士, 能復飮乎?” 樊噲曰 : “臣死且不避, 卮酒安足辭!”

 

위병을 밀치고 장막 안으로 들어가는 번쾌

 힘이 넘친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씩씩하고 굳센 기운이 샘솟듯 콸콸 치솟기 마련이다. 엎어놓은 방패 위에 돼지다리를 올려놓고 서걱서걱 썰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 소리가 들린다. 옆으로 위로 치켜진 수염에 생고기 핏자국도 불긋불긋하다. 기 싸움에서 항우에 결코 지지 않는다.

 이어서 번쾌는 진나라를 무너뜨리며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회왕과의 약조를 상기시키며 애써 고생하며 공적을 세운 자기 주군 유방에게 상은 내리지 못할망정 하찮은 사람의 말만 믿고 죽이려 하니 안 될 일이라고 힘찬 목소리로 막힘없이 당당하게 말한다.

 잠시 뒤, 유방이 뒷간으로 가는 체하며 일어나 눈짓으로 번쾌를 불러냈다. 번쾌는 밖으로 나와서도 항우에게 정식 인사를 차리지 못했다며 멈칫멈칫 망설이는 유방에게 빨리 우리 군영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이는 번쾌였다. 이때, 그가 유방에게 내놓은 말은 저잣거리 개백정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유방을 따라 산전수전 겪으며 이미 온갖 지식을 몸으로 걸러낸 수준 높은 사나이였다. 다시「항우본기」이다.

 

“큰 일 할 때는 자질구레한 것 돌보지 않으며, 큰 예의 행할 때는 하찮은 허물 따지지 않습니다. 지금 저들은 칼과 도마요 우리는 생선인데, 무슨 인사란 말입니까?”

“大行不顧細謹, 大禮不辭小讓. 如今人方爲刀俎, 我爲魚肉, 何辭爲?”

 

 구절을 짝지어 드러내는 말법이 정말 보통 수준이 아니다. 칼을 든 자의 도마 위에 놓인 생선처럼 더할 수 없는 위기를 벗어났기에 유방은 한나라의 개국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 순간에 곁에서 용기를 북돋우며 결단을 촉구한 이가 바로 번쾌였다.

 

5. 닫기

 

 이런 위기의 순간, 유방이 가장 가까이 두었던 번쾌, 그는 당시 유방의 참승이었다. 옛적, 수레에 오를 때, 가장 높은 이가 왼편에 앉고, 수레를 모는 이는 중앙에 앉는다. 그리고 오른편에 앉는 이가 바로 참승이다. 참승은 보통 무사가 담당하는데 이들은 높은 이를 경호할 책임까지 진다. 유방의 참승 번쾌는 유방의 손아래동서이기도 했다. 유방의 정부인 여치의 하나뿐인 여동생 여수呂嬃가 바로 번쾌의 짝이 되었던 것이다. 유방의 번쾌에 대한 신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번쾌가 유방에게 바친 충성에는 용기뿐만 아니라 지혜까지 넘친다. 난세에 개백정 번쾌의 신분 상승은 이러했기에 더욱 유쾌하다.

 

오른쪽이 참승의 자리이다

 사마천은 번쾌의 손자 번타광樊他廣과 교분을 맺으며 그의 할아버지와 고조 유방이 함께 겪었던 상황을 직접 들었다는 사실을 ‘열전’에 기록하며 ‘개를 잡을 때, 어찌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한나라 고조를 만나 한나라 조정에 이름을 날리고 자손들에게까지 은덕을 내리게 될 줄 알았겠는가?’라고 했다. 파리도 난세에는 천리마의 꼬리 잡고 신분 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남다른 용기와 지혜가 필수조건이다. 번쾌는 이 필수조건을 갖춘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