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과 막야가 진晉 나라 군주에게 올릴 검을 세 해 만에 만들었다. 자웅 한 쌍의 이 검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진귀한 기물이었다. 이 한 쌍의 검 가운데 자검雌劍은 군주에게 올리고 웅검雄劍은 남겨 두었다. 간장은 아내 막야에게 이렇게 일렀다.
“내가 남은 검 하나를 남쪽 산의 북쪽이며 북쪽 산의 남쪽 돌 위에 소나무가 있는 곳에 감추어 두었소. 임금께서 이제 나를 죽일 것인즉, 그대가 사내를 낳으면 내 말을 들려주시구려.”
干將莫耶爲晉君作劍, 三年而成, 劍有雌雄, 天下名器也. 乃以雌劍獻君, 留其雄者. 謂其妻曰 : “吾藏劍南山之陰, 北山之陽, 松生石上, 劍在其中矣. 君若覺, 殺我. 爾生男以告之.”
-유향劉向의『열사전列士傳』
간장과 막야 없애버리면,
이 세상 어둠 누가 물리치나.
요괴 다 베고 나니 온갖 귀신 몸 감추어도,
천하를 맑게 하는 일이 천직이라네.
除却干將與莫邪,
世界伊誰開暗黑.
斬盡妖魔百鬼藏,
澄淸天下本天職.
청나라 말기의 여성 혁명가 추근秋瑾이 읊은『검가劍歌』중 한 부분이다. 추근은 이 시에서 2천 몇 백 년 전 춘추시대의 인물 간장과 막야를 다시 무대로 불러냈다. 간장과 막야가 처음으로 등장한 무대는 서한 말 유향劉向의『열사전列士傳』과 『효자전孝子傳』이다. 이 두 글에서는 간장과 막야가 남편과 아내로서 부부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함께 만든 두 자루 명검의 이름도 각각 간장과 막야이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순자荀子는『순자荀子』「성악性惡」에서 ‘제나라 환공의 총蔥, 강태공의 궐闕, 주나라 문왕의 녹祿, 초나라 장왕의 흘曶, 그리고 오왕 합려의 간장, 막야, 거궐巨闕, 벽려辟閭’를 모두 옛적의 이름난 검이라고 이른 뒤, ‘이런 훌륭한 검도 갈고 닦지 않으면 날이 날카로울 수 없고, 보배롭고 귀한 검일지라도 사람이 손에 쥐지 않으면 아무것도 벨 수 없다.’는 자못 교훈적인 말을 덧붙였다. 순자는 간장과 막야를 훌륭한 검이라고 했을 뿐 이들이 부부의 연을 맺었던 사람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한의 조엽趙曄이 편찬한『오월춘추吳越春秋』는『열사전列士傳』이나『효자전孝子傳』보다도 그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하여 검을 주조하며 ‘막야가 머리카락을 끊고 손톱을 잘라서 화덕에 넣었다’는 데까지 발전한다. 이렇게 간장과 막야 이야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 발전하여 내용도 더욱 풍부해진다. 간장과 막야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검을 만들고 이들의 아들이 원수를 갚은 이야기는 중국 옛적에 만들어진 전설 가운데 하나로 대대로 전해지며 변화하고 발전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가 사실보다 더 진실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깊이 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동진東晋 때 간보干寶가 민간에 회자되는 신기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수신기搜神記』에 실린 간장과 막야 이야기가 내용도 풍부할 뿐만 아니라 생동감이 넘치고 인물의 형상도 선명하고 돋보인다.
초나라에 솜씨가 훌륭한 대장장이 간장과 막야 부부가 초왕에게 보검을 주조하여 올려야 했다. 이들은 이 검을 세 해만에 만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제는 화가 난 초왕은 이들 부부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보검은 자검과 웅검 두 자루였다. 이때, 간장의 아내는 몸을 풀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간장은 아내인 막야에게 이렇게 간곡하게 일렀다.
“초왕에게 올릴 보검을 세 해가 되어서야 완성했소. 이 때문에 화가 난 초왕이 나를 죽일 게 뻔하오. 이제 당신이 몸을 풀어 아들을 낳는다면, 이 아이가 장성하거든 꼭 이렇게 일러주시오. 방문을 열고 나서서 남쪽 산을 보면 소나무가 돌 위에서 자라고 있을 터인즉, 그 나무 뒤쪽에 보검이 있다고 말이오.”
이렇게 이르고 나서, 간장은 자검을 가지고 초왕에게 갔다. 초왕은 이미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그는 곁에 있던 신하에게 보검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명령했다.
“원래 검이란 자검과 웅검 두 자루로 짝을 이루는데 여기 자검은 왔습니다만 웅검은 아예 오지 않았습니다.”
초왕은 머리끝까지 치민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높였다.
“저 놈의 목을 당장 내려라!”
막야의 아들 적赤이 성인이 되자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적의 어머니 막야는 이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네 아비는 몇 년이나 걸려서 초왕에게 올릴 보검을 만들었지만 초왕은 오히려 화를 내며 네 아비를 죽였다. 네 아비는 초왕에게 올릴 보검을 가지고 떠나던 날,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이 어미에게 이렇게 신신 당부했단다.
‘아들이 크면 이렇게 말해 주시오, 문을 열고 나서서 남쪽 산을 바라보면 돌덩이 위에 소나무가 있을 터인즉 그 나무 뒤쪽에 보검이 있다고 말이오.’ ”
아들 적이 즉시 문을 열고 나섰으나 눈앞에 산이라고는 뵈지도 않았다. 본채 바로 앞에 보이는 기둥이 돌덩이 위에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적은 도끼로 이 기둥을 빠개고 아버지가 숨긴 보검을 마침내 찾아냈다. 아들 적은 이때부터 밤낮으로 초왕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어느 날, 어떤 젊은이가 초왕 앞에 나타났다. 두 눈썹 사이가 한 뼘이나 될 만큼 넓은 이 젊은이의 얼굴에는 남다른 기상이 뚜렷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왔소.”
초왕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었다. 꿈이었다. 초왕은 당장 이 젊은이를 체포하는 데 현상금을 걸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적은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적은 비통한 마음을 다스리며 슬픈 노래를 불렀다. 지나던 협객이 적에게 다가와 이렇게 일렀다.
“아직 한창 젊은이가 무슨 까닭이 있어 그리 슬피 우는고?”
“저는 간장과 막야의 아들로 이름은 적이라고 합니다. 초왕이 아버지를 죽였기에 그 원수를 갚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 그런데 초왕이 자네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데. 자네 목과 그 검을 내게 건네면 내 자넬 대신하여 원수를 갚아줌세.”
적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제 목을 베었다. 그리고 자기의 머리와 웅검을 두 손으로 받쳐 협객에게 건넸다. 젊은이의 주검은 뻣뻣하게 선 채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에 협객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뜻을 내 결코 저버리지 않겠노라.”
그제야 뻣뻣하게 섰던 주검이 쓰러졌다.
젊은이의 머리를 손에 넣은 협객이 초왕 앞에 이르렀다. 초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게 바로 그 젊은이의 머리입니다. 가마솥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삶아야 할 것입니다.”
초왕은 협객의 말을 좇아 젊은이의 머리를 펄펄 끓는 물속에 던졌다. 사흘 동안 밤낮으로 삶았지만 젊은이의 머리는 흐물흐물해지지 않았다. 솥뚜껑을 열자 펄떡 튀어나와 눈을 부릅뜬 채 분노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대왕께서 가까이 다가가서 직접 살펴보소서. 그리하면 분명 흐물흐물 문드러질 게 분명합니다.”
협객이 이렇게 이르자 초왕이 뒷짐을 지고 솥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이때, 협객이 웅검으로 초왕의 목을 내려쳤다. 초왕의 머리가 펄펄 끓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협객도 그 자리에서 웅검으로 제 목을 스스로 내려쳤다. 그의 머리도 펄펄 끓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세 사람의 머리가 한꺼번에 끓는 물속에서 빙빙 돌더니 흐물흐물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데 엉겨 누구 것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냥 세 부분으로 나누어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삼왕묘三王墓’라는 말은 이래 서 생겼다. 이 무덤은 오늘날 여남汝南 북의춘현北宜春縣(지금의 장시성江西省 이춘시宜春市) 경내에 있다.
아들 적이 웅검을 찾아내는 과정을 보며 한국의 독자들 머릿속에 겹쳐 떠오르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바로 유리왕 신화이다. 선왕이 숨겨놓은 물건을 찾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삼은 옛적 신화의 원형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적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 목까지 기꺼이 내놓는 장면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서늘해진다. 자기의 목과 웅검을 포악한 군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미끼로 이용하는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용기 있는 자를 높이는 사회 풍조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건 아닐까?
고점리高漸離만 해도 그렇다. 사마천의「자객열전刺客列傳」에 등장하는 인물 다섯 가운데 맨 마지막 인물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의 식객으로 있을 때, 고점리는 그의 벗이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 나라는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장평長平에서 벌어진 큰 싸움에서 이미 저울추는 진나라 쪽으로 기울어진 뒤였다. 연나라 태자 단이 협객 형가에게 한 자루 검을 쥐어주며 진시황의 목을 벨 자객으로 삼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형가는 진시황의 미움을 받으며 연나라로 망명한 번오기樊於期가 기꺼이 내놓은 머리까지 가지고 떠났지만 진시황을 향해 던진 날카로운 검이 빗나가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형가의 몸뚱이는 그야말로 산산조각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 식객이었던 시절, 함께 우정을 나누었던 고점리가 진시황이 내린 지명수배를 피해 이름을 바꾸고 방랑하다가 그의 축筑 연주 솜씨가 널리 퍼지며 진시황 곁에 이르게 되었다. 끝내 신분을 알게 된 진시황은 그의 축 연주 솜씨를 아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의 눈을 멀게 했다.
“이놈의 목을 내려라.”
점점 느슨해지는 자기를 향한 경계를 눈치 채며 고점리는 축 속에 납덩어리를 가득 넣었다가 진시황을 향해 날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무엇이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버리게 만들었을까?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며 길을 떠나는 아들 적을 어머니 막야는 왜 막지 않았을까? 또 고점리는 벗의 원수를 갚으려면 제 목숨을 버릴 게 뻔한데도 어찌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칼 비껴 차고 나서서 하늘 향해 웃으니,
떠난 자와 남은 자 모두 하나같이 기백 웅혼하네.
我自橫刀向天笑,
去留肝膽兩昆侖.
청나라 말기, 정치개혁을 위해 앞장섰던 담사동譚嗣同이 옥중에서 읊은『옥중제벽獄中題壁』가운데 한 부분이다. 의로운 일이라는 믿음 앞에서 죽음쯤이야 오히려 하찮게 보았던 한 선비의 당당함도 간장과 막야, 그리고 그 아들 이야기에서 보듯이 몇 천 년 중국 역사를 꿰뚫으며 내려온 한 줄기 서늘한 물줄기였을까? 이들 선비는 무릎 꿇고 사는 길보다는 오히려 선 채로 당당하게 죽는 길을 기꺼이 선택했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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