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무제 유철은 황제에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질고 착한 인재를 불러 쓰겠다고 널리 알렸다. 이때, 제나라 사람 동방삭東方朔이 장안으로 올라와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는 글을 올렸다. 그것도 황제에게 상주할 때 쓰는 죽간 3천 장에 이르는 긴 글이었기에 한무제 유철이 이를 읽는 데만 두 달이 꼬박 걸렸다고 하니, 동방삭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익살스럽고 언사가 민첩한데다 재치까지 넘쳐서 무제 유철도 늘 그와 자리를 함께하며 담소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방삭을 익살과 재치 넘치는 광대로 취급하며 높여 쓰지 않았다. 사마천은 ‘열전’ 70편 가운데「골계열전滑稽列傳」의 여러 인물 가운데 동방삭을 넣어 그의 언행을 기록했다. 이곳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그의 세 치 혀가 벌이는 해학과 재치를 맛보기로 한다.
죽간 3천 장에 이르는 ‘자소서’를 읽은 무제 유철이 그를 불러들여 내린 벼슬은 ‘낭관郎官’이었다. 어느 날, 동방삭이 궁궐 안에서 한가롭게 산보하고 있을 때, 동료 낭관이 짓궂게 집적거렸다. 이때, 그가 내놓은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골계열전」을 펼친다.
어떤 낭관이 그에게 이렇게 일렀다.
“사람들이 선생을 모두 미치광이라고 합디다.”
동방삭이 대답했다.
“나 같은 사람은 이른바 조정에서 속세를 피하는 것이외다. 옛날 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속세를 피했지만 말이오.”
郎謂之曰 : “人皆以先生爲狂.” 朔曰 : “如朔等, 所謂避世於朝廷間者也. 古之人, 乃避世於深山中”
‘소은小隱은 숲속에 숨지만 대은大隱은 저잣거리나 조정에 숨나니, 백이伯夷는 수양산에 숨었고, 노자老子는 주하사柱下史되어 몸을 숨겼도다.’라고 말한 이는 서진西晉 때의 시인 왕강거王康琚이다. 하지만 오래 전 서한 무제 때의 ‘미치광이’ 동방삭은 이를 이미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하는 방법으로 인적 드문 깊은 산속을 택하는 대신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뛰어듦으로써 오히려 은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재치 있는 해학’을 무기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잔치에서 술이 불콰하게 올라 몸도 마음도 거나해지면 땅바닥을 손으로 짚고 노래했다.
세속에 묻혀 살며 금마문金馬門에서 세상을 피하네.
궁중에서도 은거하며 내 몸 온전히 보전할 수 있는데
하필 깊은 산속 띠집에서 세상 피해 숨어살랴.
세 치 혀가 부리는 재치와 익살을 무기로 삼는다면 궁궐 안이 오히려 세상 피해 몰래 살기 더 좋다는 말이다.
어느 날, 건장궁建章宮에 고라니와 생김새가 비슷한 동물이 나타났지만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무제 유철은 동방삭을 불러 보게 하니 동방삭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맛난 술과 쌀밥을 내려 실컷 먹도록 해 주시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황제 앞에서 맛난 술과 쌀밥을 주어야 말하겠다는 용기와 배짱이 여간 아니다. 황제는 물론 그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제 유철도 그의 용기와 배짱을 높이 샀을까, 한시라도 바삐 알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는 여유가 있다. 맛난 술과 쌀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 동방삭은 또 한 가지를 더 요구한다. 이쯤 되면 맞앉아 농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지난날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방삭의 익살에 활짝 얼굴 펴며 웃음 터뜨리는 무제 유철의 모습이 겹친다.
“폐하께서 어느 곳의 공전公田과 물고기 뛰노는 연못과 갈대밭 몇 이랑을 제게 내리시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무제 유철이 이번에도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자 동방삭은 대답했다.
“추아騶牙입니다. 멀지 않아 폐하의 의로움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무리가 귀순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과연 동방삭의 예언대로 한 해가 좀 지나 흉노의 혼야왕混邪王이 10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무제 유철은 동방삭에게 큰돈과 재물을 내렸다. 이를 보면 동방삭은 자연현상으로써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깊이 쌓인 내공이 있었던 듯하다.
이쯤에서『사기』밖에서 만난 무제 유철과 동방삭이 펼친 익살을 보기로 하자. 이는 중국 쪽 포털사이트를 여행하다 만난 이야기이지만 아쉽게도 전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방삭이라면 만판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내놓을 만한 재치요 해학이라고 믿어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만나기로 한다.
어느 날, 상림원上林苑에 나들이 나왔던 무제 유철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멋진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무제 유철이 곁에 있던 동방삭에게 나무 이름을 물었다.
“이 나무는 선재善哉라고 부릅니다.”
‘선재善哉’를 굳이 옮기자면 ‘좋다!’, ‘옳다!’ 정도가 될 것이다. 대답을 들은 무제 유철은 아무도 몰래 사람을 시켜 이 나무에 표지를 해 두도록 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무제 유철은 동방삭에게 이 나무 이름을 다시 물었다.
“이 나무는 구소瞿所라고 부릅니다.”
‘구소瞿所’를 인터넷 신화사전新華詞典에는 ‘전설 속의 나무 이름’으로 풀이했다. 여기에 더하여 더 이상 자세히 알 수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몇 년 전에는 ‘선재’라고 했는데 지금은 ‘구소’라고 이르니 무제 유철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겠는가?
“몇 년 전 그대가 내게 이른 이 나무 이름하고 어찌 다르오? 그래, 과인을 이렇게 오랫동안 속이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이오?”
동방삭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넉살스럽게 받아넘겼다.
“큰 놈은 말이라 이르고 작은 놈은 망아지라 이르지 않습니까? 또 큰 놈을 닭이라 이르고 작은 놈은 병아리라 이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큰 놈은 소라 이르고 작은 놈은 송아지라 이르지 않습니까? 사람도 어릴 때는 아이라 이르지만 나이 들면 어른이라 이르지 않습니까? 그때는 ‘선재’였지만 지금은 세월 지나 ‘구소’가 되었습니다. 만물은 생로병사는 물론 모두 흥망성쇠가 있거늘 어찌 정해진 이름이 있겠습니까?”
무제 유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삼천갑자, 한 갑자 예순 해에 3천 번을 곱한 숫자, 곧 1십 8만 년을 산 인물로 널리 알려진 동방삭은 그의 연표에 따르면 기원전 154년에 태어나 기원전 9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겨우 한 갑자를 살았을 뿐이다. 장수의 대명사가 된 동방삭의 이야기는 ‘전설 따라 3천 리’ 수준의 꾸며낸 이야기로 사마천의『사기』에는 이에 대한 언급조차 찾을 수 없다. 역사학자로서 사마천이 사료 수집과 선택에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끌어다 옮긴 ‘선재구소善哉瞿所’가 사마천의 큰 업적에 한 점 누가 되었다면 용서를 빌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한평생 세 치 혀가 부리는 해학과 재치 속에 살았던 동방삭도 늘그막에 이르자 무제 유철에게 올곧은 말을 올렸다.「골계열전」을 펼친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간사하게 아첨하는 이를 멀리하시고 참언을 내치십시오.”
무제가 말했다.
“이제야 동방삭이 좋은 말을 많이 하네.”
이렇게 말하며 괴이하게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방삭은 과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原陛下遠巧佞, 退讒言.” 帝曰 : “今顧東方朔多善言.” 怪之. 居無幾何, 朔果病死.
동방삭을 끝내며 사마천은『논어』「태백편太伯篇」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바로 동방삭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이른다. 이 부분을 한번 보자.
새는 죽을 때가 되면 그 울음소리 애달프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
鳥之將死, 其鳴也哀 ; 人之將死, 其言也善.
재치와 해학으로 한평생 궁궐 안에서 ‘은둔’하며 살았던 동방삭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무제 유철에게 올린 올곧은 말 한 마디를 사마천은 놓치지 않고 헤아려 가치를 매긴다. 그러나 동방삭이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삭막할 수밖에 없는 궁중의 분위기를 재치와 해학으로 부드럽게 만들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이 무제 유철은 물론 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안녕으로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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