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상이 어느 곳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 만대통萬大通은 양梁의 장군 왕림 王琳을 따라 북제北齊로 귀순했다. 뒷날 강남의 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이 때문에 만보상은 주악을 관장하는 악호樂戶로 유배되었다. 그가 음률에 정통한데다 갖가지 악기를 능속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옥경玉磬을 만들어 북제의 황제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萬寶常, 不知何許人也. 父大通, 從梁將王琳歸于齊. 後復謀還江南, 事泄, 伏誅. 由是寶常被配爲樂戶, 因而妙達鍾律, 遍工八音. 造玉磬以獻于齊.
『수서隋書』「만보상열전萬寶常列傳」
사수泗水 돌 잘라 경쇠를 만드니,
옛 음악 소박하다 듣는 이 적었다네.
악공이 천시 받아 백아伯牙 사광師曠 드물어지니,
사악한 소리 가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 싫어했네.
泗濱浮石裁爲磬,
古樂疏音少人聽.
工師小賤牙曠稀,
不辨邪聲嫌雅正.
-원진元稹의『화원경華原磬』 부분
만보상萬寶常, 이 양반의 죽음은 초라했다. 그리고 불행했다. 그는 한평생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이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으며, 타고난 천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제 뜻을 펼쳐 이루지도 못했다. 그의 음악은 ‘서역 음악’, 또는 ‘오랑캐 음악’이기에 선비의 뜻을 펼칠 수 없다며 멸시 당했다. 늘그막에는 큰 병이 그의 몸을 덮쳐 그를 한없이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그를 곁에서 지키며 수발해야 할 아내마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한 푼 남김없이 챙겨 도망을 갔다. 게다가 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도 없이 처참한 모습으로 고독하게 떠났다. 얼마나 안타깝고 분했을까? 그는 죽음을 앞두고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저작한 팔음전조八音轉調와 여든네 가락이 담긴『악보樂譜』 64권을 타오르는 불 속으로 던졌다. 다행히 곁에 있던 이가 황급히 불 속에서 몇 권을 건져냈다.
어느 날 저녁, 그가 젊은 시절 야외에서 만났던 신선이 집안 뜰로 찾아왔다.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인이었소. 그런데 하늘 궁전의 쾌적함과 편안함을 버리고 인간을 경험하겠다고 세상에 온 거요. 인간에 섞인 지 오래, 이제 기한이 다 되어 돌아갈 때가 되었소. 그대, 천상 운정궁雲亭宮 잔치를 아직 기억하오?”
그는 한참이나 멍했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이웃사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원래 신선이었소. 어쩌다가 인간 세상으로 귀양을 왔지만 이제 곧 하늘로 돌아갈 때가 되었소.”
열흘 뒤, 갑자기 그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전설이다. 이들은 한 천재의 죽음을 참으로 안타깝게 여겼기에 이런 전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있음의 세계에서 이룰 수 없었던 꿈을 있어야 할 세계로 변화시켰다. 그의 꿈은 마침내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만보상은 수隋 나라 때의 음악가였다. 그의 아버지 만대통萬大通은 일찍이 남북조 시대 양梁의 무관으로 북제北齊에 귀부했다가 곧이어 강남으로 돌아가려고 남몰래 도모하다 일이 밖으로 터지며 피살되었다. 아들 만보상은 죽음은 면했지만 음악을 관장하는 부서에 악공으로 강제 배치 당했다.
사실 만보상은 남북조 시대 말기에 태어나 비록 몇 년밖에 유지되지 못한 수왕조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이 시대 남조의 양나라에서 태어나 북제와 북주를 차례로 거쳐 수나라 때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짧은 한평생은 네 왕조를 거친 셈이다. 수많은 왕조가 바삐 교체되며 명멸한 파란만장한 역사는 이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생애를 파란만장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만보상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진陳이 양梁을 멸망시킨 뒤, 그의 아버지 만대통은 양나라 장군이었던 왕림王琳을 따라 북제에 몸을 의탁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도 아버지를 따라 북제의 백성이 되었다.
왕림이 진陳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자 만보상의 아버지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남조로 돌아가려고 남몰래 도모하다 발각되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북제의 법규에 따르면, 만보상은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았기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악공으로 강제 배치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뒷날, 어린 만보상의 재능을 지나치지 않은 이가 있었다. 북제의 대음악가 조정祖珽이었다. 그는 만보상을 제자로 맞았다. 조정의 음악적 천재는 그의 아버지 조영祖瑩으로부터 물려받았던 듯하다. 조영도 음률에 정통한 천재로서 종鍾, 경磬(심지어 옥경玉磬까지 제작했다고 한다), 관管, 현絃 등 여러 가지 악기를 제작했다. 어떻든 만보상은 조정의 기예를 물려받아 당시 음악을 관장하는 ‘태상太常’에서 일하며 낙양의 옛 곡조를 고치고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창작 경험을 넓히며 음악의 대가로 성장했다.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린 뒤, 운명은 만보상을 북주의 악공으로 만들었다. 얼마 뒤, 양견楊堅이 남과 북의 분열 상황을 종결시키고 수隋 왕조를 세우자, 만보상은 저절로 이 나라 악부의 악공이 되었다. 그는 네 왕조를 겪으며 살았지만 비천한 악공의 신분으로 가난과 고통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야 했다.
수문제 양견 개황開皇 초년, 그러니까 기원후 581년, 정택鄭澤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새로 음률을 정한 뒤 황종조黃鐘調를 제정했다. 황종조 따라 갖가지 악기로 연주한 뒤, 수문제 양견은 만보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소? 그대 의견을 한 번 말해 보오.”
만보상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이야말로 망국의 음이옵니다. 폐하께서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될 소리이옵니다.”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까닭을 말해 보오.”
수문제 양견은 언짢았지만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방금 들으신 음악 소리는 원망이 가득 담긴 데다 예의에 크게 벗어나 방탕하기 그지없습니다. 실로 올바른 음악의 도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수문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대가 악음樂音을 기준에 맞도록 조절하여 정돈하기 바라오.”
과연 만보상의 재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악기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악보』 64권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그 유명한 ‘84조調’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는 당나라 음악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음악으로 거듭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음악 천재 만보상의 참모습은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드러났다. 이 자리에서도 음악에 대한 이론을 놓고 갑론을박 토론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만보상은 상 위에 놓인 젓가락을 손에 쥐더니 밥그릇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이 다섯 가지 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관악기와 현악기가 제대로 이루어진 악대의 연주에 못지않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사실 그가 ‘84조’ 이론을 내놓았을 때, 그를 비웃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탁상공론일 뿐이야.”
“헛된 이론이지, 악기로는 이룰 수 없는.”
“이런 걸 황당무계하다고 이르는 거야.”
말도 많고 탈 잡는 이도 많았지만, 그는 이 이론을 능숙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이렇게 직접 곡조로 실현함으로써 사람들의 찬탄을 이끌어냈다.
어느 날, 그는 궁중에서 태상시太常寺의 음악 연주를 듣다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곁에 있던 이가 가만히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귀청이 찢어질 듯이 날카로운 데다 슬프고도 가슴 아프기가 이토록 깊으니, 세상 사람들이 서로 참혹하게 죽이는 일이 곧 일어나고야 말 것이오.”
하지만 때는 태평성세, 사람들은 그가 헛소리를 한다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외면할 뿐이었다. 그러나 수양제隋煬帝 말년, 천하의 군웅이 우르르 일어나 서로 힘을 다투니, 그가 음악을 들으며 예언한 바로 그 대란이었다. 피가 튀고 칼날이 번득이는 난리를 겪으며 숱하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했다. 게다가 음악적 천재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쳤다. 더구나 악기 의 ‘팔음八音’에 관한 연구는 정말로 대단하여 전설의 옷을 입고 다시 역사의 무대에 오를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팔음’이란 악기를 만든 재료에 따라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초草, 목木’ 등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어느 날, 그는 들판에서 한꺼번에 열 명 넘는 사람들과 참으로 우연하게 마주쳤다. 이들이 입은 옷은 화려했으며 타고 온 수레는 웅장했다.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몇몇 수행원들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서서 만보상을 자기 앞으로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그대의 음악에 관한 재능을 알아보고 인간세상에서 이제 곧 사라지려는 팔음 연주 기법을 전수하려고 하오. 그대가 정통 팔음 연주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을 터, 하늘에서 내려온 악관이 팔음의 비결을 지금 알려줄 거요.”
그러자 선인이 다가오더니 그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역대 정통 음악을 그에게 일러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러 악곡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선인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 내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촘촘하게 기록했다. 이렇게 반나절이나 지났을까, 선인은 설명이 끝나자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선인과 함께 지낸 시간은 겨우 반나절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계산하니 벌써 닷새가 지난 뒤였다. 만보상은 이로부터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그 많은 음악에 정통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었다.
왕조마다 천재 음악가는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을 한 손에 쥔 통치자의 눈에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가슴에 달아야 할 꽃은 꼭 장미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꽃 대신 번쩍번쩍 빛나는 브로치여도 관계없었다. 이들 천재 음악가는 권력의 굄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이때에는 그와 생각을 달리하는 다른 악사의 시기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시대는 언제나 천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만보상도 예외가 아니었다.
천재 음악가의 삶은 비단길이 아니라 언제나 가시밭길이었다. 가시밭길을 걷다 피투성이로 세상을 떠난 이들 천재를 역사는 다시 살려냈다. 그래서 평범한 백성들이 만든 전설은 부활의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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