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만년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그 아들 진함을 침상 곁으로 불러 훈계했다. 삼경에 이르자 아들 진함이 잠이 들어 머리를 병풍에 부딪쳤다. 진만년은 크게 화를 내며 막대기로 치려고 했다.
“아비가 지금 너를 훈계하고 있거늘, 너는 오히려 잠을 자며 아비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고?”
진함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다 듣고 있습니다. 요지는 그저 아첨하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진만년은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陳萬年乃朝中重臣也, 嘗病, 召其子咸戒于床下. 語至三更, 咸睡, 頭觸屛風. 萬年大怒, 欲杖之, 曰 : “乃公戒汝, 汝反睡, 不聽吾言, 何也?” 咸叩頭謝曰 : “具曉所言, 大要敎咸諂也.” 萬年乃不敢復言.
『한서漢書』 「진만년전陳萬年傳」
관아 곡식 창고 생쥐란 놈 크기가 됫박인데,
사람이 창고 여는 걸 봐도 달아나지 않네.
장병들 양식 없고 백성들 굶주려도,
누가 날마다 그대 입안에 처넣게 하는가.
官倉老鼠大如斗,
見人開倉亦不走.
健兒無糧百姓饑,
誰遣朝朝入君口.
당나라 때 시인 조업曹鄴의 『관창서官倉鼠』이다. 거리낄 것 없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탐관과 오리를 이 시에서는 생쥐에 비유했다. 얼핏 보면 낱말 선택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는 자못 깊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은근하고도 점잖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제 주머니 채우기에 눈이 벌건 관리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이들은 언제나 전선에 나선 병사들이나 일터에서 허리끈 졸라매고 일하는 백성들의 괴로움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부패한 관리일 뿐이다.
서한의 뜨겁던 태양도 이제 서서히 식으며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 한 선제宣帝를 보좌하며 어사중승의 자리에 있던 진만년陳萬年이 몸져누웠다. 그는 이미 병이 깊었음을 알고 아들 진함陳咸을 머리맡으로 불렀다. 아들을 깨우치며 가르쳐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는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앉자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훈계의 중심은 벼슬길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 긴요한 술수였다. 한번 시작된 훈계는 한밤중까지 계속되었고, 아들은 아비의 지성스럽고 절실한 훈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병풍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아비는 아들을 한 대 쥐어박으며 꾸짖었다.
“내가 아비로서 네게 이렇게 간절하게 이르는데도 말뚝잠을 자며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아들 진함은 허둥지둥 자세를 바르게 고치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그가 곧 내놓은 말에 아비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버님께서 제게 내리실 말씀의 골자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손을 비비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한서漢書』「진만년전陳萬年傳」에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기록으로 전하는 내용은 진만년이 아들 진함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벼슬길에 나선 아들이 승진이나 영전, 그리고 뒷돈이 생기는 좋은 자리를 지키는 데 필요한 몇 가지 ‘관규칙官規則’을 일러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들이 아비의 말에 내놓은 반응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이런 주문을 한두 번 하는 데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의에서 나온 행동보다 자기 이익을 지키는 데 더 힘을 쏟은 이들이 더 많아서일까, 아니면 이들의 행동이 역사에 더 크게 기록되었기 때문일까, 간신이나 탐관과 오리들을 만나는 일이 충신이나 열사를 만나는 일보다 훨씬 더 쉽다. 진만년도 뇌물로써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옛적에는 죽기 전에 미리 마련한 관곽도 뇌물로 쓸 수 있는 물목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진만년은 죽으면 자기 옷이 될 관까지 힘 있는 자에게 뇌물로 올리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태복太僕의 자리까지 이르렀다. 태복은 한나라 때 황제 전용 마필은 물론 전국의 관용 마필을 관장하는 부서의 우두머리로서 구경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로 보자면 국토교통부장관에 해당될 정도로 높은 자리였다. 후세의 평가는 진만년에게 내세울 만한 특별한 재능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진만년이 앞뒤를 살피며 자신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사려 깊었다면 이만하면 만족할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는 인간이 맞이하는 끝장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높은 곳에 이르러도 그 자리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더 높은 자리가 있는 한 목표가 달성되어도 또 다른 목표가 그 앞에 있기 때문이다. 구경 앞에는 삼공이 있었다. 더 높은 자리는 명예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까지 아름으로 안기기에 벼슬길에 오른 이를 분발하게 만든다. 분발이 실력을 갈고 닦으며 덕을 쌓는 데 쏟는 기운이라면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능력이 모자란 이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데 필요한 가장 멋진 무기는 뇌물과 아첨이라고 믿는다. 진만년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어사대부 병길丙吉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진만년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함께 병문안을 갔던 대신들이 자리를 떴지만 진만년은 병길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다. 단 둘이만 남게 되자 진만년은 그날 밤이 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갖가지 달콤한 말로 병길을 위로했다. 이런 진만년에게 어떻게 감동하지 않겠는가? 병길의 병이 더 깊어지자 그를 몹시 아끼던 한선제漢宣帝가 직접 문병을 왔다. 이 자리에서 황제는 병길에게 뒤를 이어 어사대부 자리에 앉힐 인물의 천거를 요청했다. 진만년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병길이 세상을 떠나자 선제는 진만년을 어사대부의 자리에 앉혔다. 서한 때 어사대부는 승상, 그리고 태위와 더불어 삼공 중에 하나였다.
변경에서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나 해 뜨기 전에 나아가 해 진 뒤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농민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보다 자기 이익과 자리를 보전하는 데 애쓰는 자는 역사에 수도 없이 많았다. 진만년도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는 이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4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주요 업적을 역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빌붙으라고 아들에게 가르치다.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아첨과 빌붙음을 무기로 삼았던 이는 후세에도 역사의 무대에 불려나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캄캄한 한밤에 보는 이 없다며 마음대로 저지른 잘못도 역사는 곧잘 밝혀낸다.
아첨하며 손을 비비라며 벼슬길의 숨은 규칙을 가르침으로 받았던 아들 진함은 애초에 아비의 높은 벼슬에 힘입어 ‘낭郎’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비와는 달리 천성이 꼿꼿하고 굽은 데 없이 발랐다.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잘못까지도 질책하며 상소를 올리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진만년이 세상을 떠난 뒤, 한 원제元帝는 진함을 어사중승으로 높여 임명했다. 주와 군의 사무를 총괄하고 그곳 지방장관인 자사刺史의 치적을 심사하고 평가하는 직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궁중에서 황제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던 중서령中書令 석현石顯의 독단적인 일처리를 낱낱이 밝히며 고발했다. 이 일로 그는 석현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진함이 살인을 저지른 친구 주운朱雲을 감싸주며 구하려다 그만 관가의 비밀을 누설하는 일이 발생했다. 석현의 눈엣가시였던 진함은 보복을 피하지 못했다. 네 해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친구를 살리려다 잘못을 저지르며 지은 죄로 옥살이를 했다고 역사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옹호할까? 명분도 그럴 듯하고 법에도 어긋나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우정이라는 면류관을 머리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꼿꼿하고 바른 천성은 명분도 그럴 듯하고 법에도 어긋나지 않을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장사長史로 기용되었다. 변방의 태수를 보좌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이다. 그 뒤, 한 발 한 발 오르며 한 군의 장관인 태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도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만족할 줄 몰랐다. 거기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벼슬살이를 함께 시작한 동료들이 이미 저 위쪽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며 그를 내려다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든 벼슬길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해 비열한 수단도 마다않고 불나방처럼 불길로 뛰어든 이는 수도 없이 많았다. 진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서 큰 힘을 쓰며 권력을 오로지하던 이는 거기장군 왕음王音이었다. 그리고 그의 심복은 진탕陳湯이었다. 왕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 진탕이었다. 진함은 오랜 벼슬살이를 통해 터득한 규칙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줄 알았다. 몇 년 동안 힘써 긁어모은 재물이 진탕에게 흘러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적에도 지방에서 근무하는 벼슬아치의 목표는 서울이었다. 뇌물은 마약처럼 효과가 빨랐다. 소부少府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와 황궁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소부는 궁중에서 병참을 담당하는 벼슬아치로 관리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였다.
궁중 창고에는 보물도 많았다. 진함은 일일이 조사하며 대조했다. 남몰래 보물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일을 저지른 자를 찾아내어 보물을 몰수했다. 그리고 법에 따라 처분을 내려야 했다. 관계된 벼슬아치들이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꼿꼿하여 굽은 데가 없다는 평가는 지난 삶이 깨끗해야 얻을 수 있는 명예였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친구를 구하려다 옥살이를 하고 옥살이하는 그를 또 다른 친구가 구해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의 모든 잘못을 덮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도 다른 벼슬아치를 두려워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기원전 15년, 한 성제成帝 때, 승상 적방진翟方進이 먼저 칼을 빼들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두려움의 대상을 제거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진함은 태수로 근무하던 시절, 죄 없는 아전과 백성을 괴롭히고 법을 어기며 뇌물을 챙긴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게다가 온갖 머리를 다 짜내어 높은 이에게 알랑거리며 뇌물을 바쳐 서울로 올라왔지만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적방진의 탄핵으로 진함은 그대로 파면되었다. 탄핵 내용이 사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 보면, 진만년이 병이 들었을 때, 그를 머리맡으로 불러 벼슬길에서 지켜야 할 숨은 규칙을 알려주자,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말뚝잠을 자다가 아비의 다그침에 깨어나 내뱉은 말은 이랬다.
“아버님께서 제게 내리실 말씀의 골자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아첨하며 손을 비비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진함은 아비의 가르침을 듣기 전부터 벼슬길에서 높은 자리로 오르는 ‘숨은 규칙’을 이미 알았다는 뜻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그 결과는 파면되어 고향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다.
원인을 만든 자는 결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언제나 어긋남이 없었다.
-벼슬길에 오른 이가 지켜야 할 마음가짐은 오직 세 가지뿐이다. 맑고 깨끗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는 마음,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 그리고 부지런히 일하고 힘쓰려는 마음이 바로 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을 가지면 녹봉과 벼슬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치욕스러운 일을 멀리할 수 있다.
(當官之法, 唯有三事, 曰淸, 曰愼, 曰勤. 知此三者, 可以保祿位, 可以遠恥辱)
송나라 때 여본중呂本中의『관잠官箴』가운데 한 구절이다.
앞선 시대에 본새 없이 행동하다 코가 깨지고 이마에 멍이 든 이가 있었다면, 당연히 이를 보고 교훈으로 삼아 자신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이를 마음에 새겨 거울로 삼을 생각도 없이 자기 이익 챙기기에 급급했던 인물의 최후는 언제나 같았다. 역사는 그들을 결코 부활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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