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상
한나라 초기, 허부許負는 나라 안에 이름을 날리던 관상쟁이였다. 관상에 관한 저서까지 남길 정도였던 그녀는 사마천이「유협열전游俠列傳」에 데려온 협객 곽해郭解의 외할머니였다. 주아부周亞夫가 그녀를 불러 자기 관상을 맡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그녀에게 자기 얼굴을 보이며 앞날을 알고 싶은 이는 이미 주아부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 해 뒤 후에 봉해지고, 다시 여덟 해가 지나 장군과 승상이 되어 큰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허부의 말에 주아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 주발周勃에게 주아부는 맏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당연히 맏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며 맏아들이 죽더라도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부가 내어놓은 그 다음 말에 주아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시 아홉 해가 지나면 굶어죽게 될 것이라는 허부의 말이 잇달았건 것이다. 주아부는 당장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후가 되고 다시 장군과 승상이 되어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 어떻게 굶어죽는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소?”
여기서 잠시「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를 펼친다.
허부는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 입가의 가로무늬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소. 이게 바로 굶어죽을 상이외다.”
許負指其口曰 : “有從理入口, 此餓死法也.”
등통도 그랬다. 꿈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더위잡던 문제를 뒤에서 밀어 올렸던 그 등통도 굶어죽을 것이라는 관상쟁이를 용한 인물로 만들지 않았던가. 관상쟁이의 말을 믿지 못한 문제가 촉 땅 구리광산을 내려 동전을 주조하게 했지만 등통은 결국 굶어죽고 말았다. 어쩌면 그때 등통의 관상을 본 이도 오늘 주아부의 관상을 본 허부였을지 모른다, 같은 시대였으니까. 아니면 태평성세를 이루었다는 ‘문경의 치세’에 관상을 보는 일이 성행하여 이 나라에 관상쟁이가 넘쳤거나.
2. 참장군 주아부
기원전 158년, 한나라 문제 후원後元 6년, 북방 흉노가 대대적으로 변새를 뚫고 침입했다. 문제는 당시 하내河內 지방 군수였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세류細柳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세류는 한나라 도성 장안 서남쪽에 위치한다. 결국 문제는 주아부에게 도성 외곽 경비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하내 지방 군수 주아부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장군이 되었으니, 관상쟁이 아주머니 허부의 관상은 제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문제는 전선에 배치된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하여 패상覇上과 극문棘門의 주둔군을 찾았다. 문제는 말을 타고 군영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과 관리들이 말을 타고 나와 문제를 영접했다. 얼마 뒤, 문제는 마지막으로 세류의 군영을 찾았다. 갑옷을 걸치고 날카로운 창을 든 병사들이 황제의 행차를 막아섰다. 뿐만 아니라 화살을 메긴 병사들은 자신을 향해 활을 잔뜩 겨누고 있었다. 물론 성벽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군중에서는 오로지 장군의 명령만이 통할 뿐, 천자의 조서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옛날 ‘장군은 군중에서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사마양저司馬穰苴의 목소리를 사마천은 놓치지 않고「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에 기록으로 남겼다. 참 장군의 모습을 따끔하게 가르치려는 사마천의 뜻을 읽을 수 있다.
부절을 맞춰본 뒤에야 주아부는 황제를 군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주아부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병사는 절을 올리지 않는 법이라며 군대의 예에 따라 황제를 맞았다. 다시「강후주발세가」이다.
“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앞서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아이의 노리개와 같아서 가만히 공격하여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주아부라면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
“嗟乎, 此眞將軍矣! 曩者覇上, 棘門軍, 若兒戱耳, 其將固可襲而虜也. 至於亞夫, 可得已犯邪!”
문제의 찬탄이다. 참 장군의 기개에 자못 감탄하는 문제의 흐뭇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는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앉혔다. 아버지 문제에게 참 장군의 모습을 보인 주아부를 아들인 경제도 높이 샀던 것이다.
3. 오초7국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주아부
기원전 154년, 한나라 경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는 해, 제후국 일곱 나라가 어깨를 겯고 중앙에 맞서며 일으킨 반란을 ‘오초7국의 난’이라 이른다. 오왕吳王 비濞, 초왕楚王 무戊, 조왕趙王 수遂, 제남왕濟南王 벽광闢光, 치천왕淄川王 현賢, 교서왕膠西王 인印, 교동왕膠東王 웅거雄渠, 이들이 바로 반란에 참여한 일곱 제후국의 군주이다.
한나라 초엽, 같은 성을 가진 여러 제후국의 군주는 봉지로 내려 받은 땅덩어리도 컸지만 고조와 혈통도 같았기에 중앙의 황제에게 온힘을 다해 충성을 바쳤다. 이들은 장안의 황제를 빙 둘러싸고 보위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일곱 제후국이 손을 맞잡고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모든 일에는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에도 앞들에 개구리 울어야 뒷산에 뻐꾸기도 맞받아 우는데, 하물며 인간관계에 있어서야 더 말할 바 무엇이겠는가. 역사가들은 제후국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짐에 따라 황제의 권한에 맞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둥, 어사대부御史大夫 조착晁錯이 올린 ‘삭번책削藩策’을 중앙의 황제 경제가 받아들임으로써 제후국들이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었다는 둥 반란이 일어난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집어낸다.
이런 갖가지 견해는 물론 틀리지 않다. 큰 사건에는 따르는 까닭도 하나뿐이 아니다. 갖가지 까닭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엎뎌 있다가 어느 순간 하나로 뭉치며 터지는 일들을 역사는 숱하게 보여준다. 이 경우, ‘원한’이라는 낱말은 큰 사건의 까닭을 푸는 데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다.「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서 몇 문장을 가져온다.
문제 때, 오왕의 태자가 조정에 들어가 천자를 뵙고 나서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었다. 오나라 태자의 스승은 모두 초나라 사람으로서 경박하고 사나웠으며 태자 또한 평소에도 교만하였다. 황태자와 바둑을 두는데 길을 다투는 모습이 공손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바둑판을 끌어당겨 오나라 태자에게 집어던져 죽이고 말았다. …… 오왕은 이때부터 봉토를 받은 신하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지 않았다.
孝文時, 吳太子入見, 得侍皇太子飮博. 吳太子師傅皆楚人, 輕悍, 又素驕, 博, 爭道, 不恭, 皇太子引博局提吳太子, 殺之. …… 吳王由此消失藩臣之禮, 稱病不朝.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가슴에 쌓이는 원한의 크기만큼 날마다 남모르게 칼날을 새파랗게 갈며 복수를 준비했을 것이다. 더구나 제후국 오나라는 성읍만 해도 5십여 개로 땅덩어리도 컸을 뿐만 아니라 동쪽 바다에서 나는 어염은 나라를 점점 부유하게 만들었기에 군사력을 키우는 데도 부족함이 없었다. 기원전 155년, 조착이 올린 ‘삭번책’은 거사 일정을 셈하던 오나라 군주 비를 활활 타오르게 만든 기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아부의 지략에 이들은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제후국의 군주가 전투 중에 피살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 난의 평정으로 한나라 초기 황제의 권한은 더욱 확고해졌다. 여기에 큰 공을 세운 이가 바로 주아부였다. 처음에는 반란군이 잠시 우세를 유지하며 유리한 위치에 서기도 했지만 주아부가 이끄는 정예군이 반란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전세는 한순간에 역전되면서 끝을 향해 치달았다. 그 뒤, 주아부는 승상으로 직위가 올랐다. 경제도 주아부를 남달리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자는 주아부의 주장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허락을 얻으며 그대로 추진되었다. 주아부의 지략이 황제의 용단을 만나며 승리는 이루어졌다. 제후국 일곱 나라가 어깨 겯고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데 주아부의 공적은 다른 어떤 이의 공적보다 앞일 수밖에 없었다.
4. 파국破局
아버지 주발이 한나라 개국 공신으로서 강후絳侯에 봉해졌다고는 하지만 주아부 자신은 이를 승계할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맏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이 나라에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주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주아부는 조후條侯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내 지방의 군수로 있던 그가 황제의 부름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세류에 주둔하며 흉노가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군대의 기강을 다잡으며 세운 공은 오로지 그의 것이었다. 또 일곱 제후국이 손을 맞잡고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데 세운 공도 대부분이 그의 것이었다. 그의 지혜와 용기가 때맞춰 훌륭한 결과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직언에서 출발했다. 게다가 직언에서 자칫 모자라기 쉬운 게 겸손이라는 점을 그는 지나쳤다. 어떻든 황제 턱밑에 거슬러 난 비늘 하나는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경제는 한때 총애했던 율희栗姬 소생의 태자를 폐위하려고 마음을 굳혔는데 주아부가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 일로 경제는 주아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모든 권력이 황제로부터 나오던 시대였다. 주아부의 신세는 점점 개밥의 도토리로 내리막길을 만나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두태후竇太后의 미움까지 더해졌다. 두태후는 옛 조나라 땅 출신으로 여태후가 힘을 쓰던 시절 입궁하였다. 그녀는 한낱 궁녀의 신분으로 여태후를 곁에서 모셨다. 여태후는 이런 궁녀들을 몇 명씩 나누어 제후국 여러 군주들에게 내려 보냈다. 두희竇姬도 이런 출궁 대열에 끼었는데, 그녀는 이런 일을 관장하는 환관에게 자기 고향 조나라로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환관이 이 당부를 깜박 잊어버리고 대代 땅으로 보냄으로써 그녀의 신세는 오히려 땅에서 하늘이 되었다. 대 땅의 군주 유항의 굄을 받으며 딸 표嫖와 두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유항은 여씨 천하가 끝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문제였고, 문제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경제는 두희의 맏아들이 아니었던가. 두희는 두태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둘째아들 유무劉武는 제후국 양梁의 군주 효왕孝王이 되었다. 양효왕은 황제를 조회하러 올 때마다 두태후에게 주아부의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반복이 낳은 효과였을까, 두태후는 둘째아들 양효왕이 주아부의 험담을 늘어놓을 때마다 생긴 미움을 점점 더 크게 키웠다. 결국 두태후는 주아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눈엣가시가 되었다.
작위를 봉하는 문제를 놓고도 주아부는 황제의 심기를 몇 번이나 거슬렀다. 황후의 오라비 왕신王信을 후에 봉하는 문제를 두고도 두태후와 황제의 마음을 건드렸고, 투항한 흉노의 왕에게 후의 작위를 주는 문제를 두고도 황제와 대립했다. 반대하는 주아부의 입장에도 상당한 근거와 이유가 있었지만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빗겨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결국 황제는 주아부를 가리키며 불만에 가득 찬 저 사람은 어린 황제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 한 마디로써 영원히 그와 결별하고 말았다.
상대가 눈에 차지 않으면 하는 그가 하는 일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고깝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주아부가 승상 자리를 그만두고 돌아온 뒤, 그의 아들이 순장할 때 쓰는 갑옷과 방패를 5백 개나 구입하여 아버지에게 올렸다. 아들은 갑옷과 방패를 모두 이런 것들을 제작하는 관공서에서 집으로 옮겼지만 수고한 이들에게 품삯도 주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이들이 주아부가 아들과 함께 이 무기를 바탕으로 모반을 획책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미 마음이 떠난 황제는 정위廷尉에게 치죄할 것을 명했다. 여기서 다시「강후주발세가」를 펼친다.
정위가 꾸짖어 물었다.
“그대는 모반하려고 하는가?”
주아부가 대답했다.
“내가 병기를 산 것은 다 순장품殉葬品인데 어찌 반역을 말하오?”
관리가 받았다.
“그대가 설령 이 땅에서는 모반하지 않는다지만 지하에서는 모반할 게 뻔하오.”
廷尉責曰 : "君侯欲反邪?” 亞夫曰 : “臣所買器, 乃葬器也, 何謂反邪?” 吏曰 : “君侯縱不反地上, 卽欲反地下耳.”
이미 끝장내기로 작정한 황제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해 온 힘을 다한 주아부였다. 일곱 제후국이 손 맞잡고 일으킨 난을 평정하는 데 지혜와 용기를 때맞춰 쏟아 부은 주아부였다. 그러나 그는 역린을 건드렸다. 겸손해야 할 때 겸손하지 못했다. 참 지혜와 참 용기가 필요할 때, 바로 그때, 그는 오만했다. 부인의 만류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한 주아부는 결국 정위에게 넘겨졌다. 그로부터 닷새 동안 곡기를 멀리한 그는 끝내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슬프도다!
절조는 지켰으나 겸손하지 못했던 주아부의 마지막에 보낸 사마천의 탄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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