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붓 들어 슬쩍 지나치듯이 한 차례 언급한 인물을 책장 덮고 다시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인물이 바로 그 순간에 바로 저런 행동을 했기에 바로 이런 결과로 나타났구나, 이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인물이 바로 그 순간에 바로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한다.
지난 날 일어났던 수도 없이 많은 사건은 모두 역사가 될 수 있지만 그 많은 사건이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다 기록되는 일은 없다. 그 많은 사건 가운데 기록으로 남으려면 선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선택하는가? 역사를 기록하는 이가 선택한다. 어떻게 선택할까? 선택하는 이의 기준에 맞갖아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은 모두 진실한가? 그렇지 않다. 사실이라고 다 진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는 사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사마천이 두툼한 볼륨으로 역사의 무대에 큰 옷 입혀 불러낸 인물이 역사의 물줄기를 자기가 생각하는 ‘있어야 할 세계’로 방향 전환시키는 모습은 자못 우람하여 책장을 덮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그러나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처럼 천대받던 인물이 지혜와 담력으로 정상에 이르는 모습 또한 주먹 불끈 쥐고 응원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실의에 빠진 이를 따스한 눈길과 말 한 마디로 최고의 위치에 올린 이름 모를 ‘아줌마’를 만나면 손바닥 활짝 펼쳐 힘찬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나는 사마천이 정말로 짧은 시간 무대에 올렸던 몇 인물을 독자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만약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저렇게 행동했더라면’, 이런 가정법 때문에 역사는 비로소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운 여름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혼자 책과 씨름하여도 나는 즐거웠다. 결코 외롭지 않았다. 이들과 마주하니 이들도 외롭지 않았고 나도 외롭지 않았다. 이들을 만나면 세상 안에서 내가 외롭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하여 이제 이런 인물 하나를 만난다.
자, 한번 가 보자.
나이 지긋한 농부
1. 마지막 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초나라 노랫소리에 깜짝 놀란 항왕이 침상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항우본기」에서 가져온다.
“유방의 한나라 군대가 벌써 초나라를 다 손에 넣었던 말이냐? 초나라 사람이 어찌 이리 많으냐!”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之多也!”
사마천이『사기』1백 30편을 씀에 한 편 한 편마다 공들이고 힘 쏟지 않은 곳 없지만「항우본기」에 이르면 서른한 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뜬 항우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던 듯하다. 사마천은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며 옛것을 본받지 않고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운 항우를 안타까워하면서도 ‘패왕’이 된 그를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며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제왕이 된 적 없으나 제왕처럼 땅덩어리를 나누어 분봉하며 잠깐이나마 실질적인 제왕 노릇을 했다지만 진시황과 고조 유방의 ‘본기’ 사이에 ‘항우’를 안배한 사마천의 배짱은 우러를 만하다.
천하를 종횡무진하던 항우는 이 밤, 초나라 노랫소리를 들으며 절망했을 것이다. 젊음으로 패기 넘쳤던 항우에게는 전쟁터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던 우미인虞美人과 충성심과 용맹함으로 이름난 준마 추騅가 있었다. 항우는 군막 안에서 술을 마시며 슬프고도 애절하게 노래했다. 노래는 슬프고도 애절했지만 기개가 한껏 넘쳤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세는 세상을 덮을 만하지만,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오추마 달리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柰何,
虞兮虞兮柰若何!
우미인도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항우의 얼굴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리에 있던 이들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패왕 항우와 그가 사랑하는 우희와의 이별을 제재로 삼은『패왕별희覇王別姬』는 지금도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젊은 항우의 마지막 밤에 만들어진 두 개의 관용어는 오늘 이 땅 대한민국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적에 둘러싸여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이 고립된 상태를 비유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가 그 하나이고, 영화나 드라마의 제목으로 널리 쓰이면서도 영웅의 비장한 끝장이나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실행한 일이 결국은 실패했음을 이르는 ‘패왕별희覇王別姬’가 또 다른 하나이다.
노래를 끝내고 술잔을 내려놓은 항우는 군막 밖으로 나와 말에 올라탔다.
2. 나이 지긋한 농부
8백 명 남짓한 장병들이 말에 올라 항우를 따랐다. 사방이 어두운 캄캄한 밤, 이들은 포위망을 피하며 남쪽으로 내달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항우는 포위망이 느슨한 지점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날이 밝자 상황은 달라졌다. 유방의 군대가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기병 5천을 거느린 기장 관영灌嬰이 항우 추격의 책임을 졌다.
관영은 원래 비단을 팔던 장사꾼이었다. 그는 패공이 된 유방을 따르면서 비단 팔던 장사꾼에서 벗어나 한왕을 따라 싸움터를 누비기 시작했다.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뒤쫓는 임무를 받았을 때, 그의 직함은 어사대부였다. 몇 인물을 묶은「번·역·등·관열전」의 ‘관영’ 부분은 ‘관영이 기마병을 이끌고 항우를 동성東城까지 뒤쫓아 가 무찔렀다.’라고 기술했다.
항우가 쫓기며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 그를 따르는 기병은 이제 겨우 1백 명뿐이었다. 음릉陰陵에 이른 항우는 나아가야 할 길까지 잃고 헤매었다. 이때까지도 항우는 살아서 뒷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아직은 겹겹이 싸인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다. 이때, 항우는 나이 지긋한 농부를 만났다.「항우본기」이다.
항왕이 음릉에 이르러 길을 잃어 나이 지긋한 한 농부에게 길을 묻자 나이 지긋한 이 농부는 속여 말했다.
“왼쪽입니다.”
나이 지긋한 농부의 말대로 왼쪽으로 가다가 커다란 늪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나라 군대가 항우를 바짝 뒤쫓아왔다.
項王至陰陵, 迷失道, 問一田父, 田父紿曰 : “左”. 左, 乃陷大澤中. 以故漢追及之.
나는 이 부분에서 잠시 책장을 덮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마천은 이 농부를 ‘전부田父’라고 일렀다. 단순히 ‘농부’를 뜻하는 ‘전부田夫’라는 낱말을 피하고 굳이 ‘전부田父’를 선택했다. 사전을 펼치고 눈여겨보면, ‘전부田父’의 ‘부父’는 [fu3]으로 발음하도록 안내되어 있다. ‘아버지’를 뜻하는 ‘부父’처럼 [fu4]로 발음하지 않는다. 따라서 [fu3]으로 발음하는 ‘부父’를 우리말로 바꾼다면 ‘옹’, ‘노인장’ 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전부田父’을 ‘나이 지긋한 농부’라고 옮겼다. ‘늙은 농부’와 ‘나이 든 농부’와 ‘나이 지긋한 농부’, 이 세 가지를 두고 잠시 저울질하다 ‘나이 지긋한 농부’를 선택한 것은 ‘나이 지긋한’이 ‘지혜도 있고 듬직하다’라는 뜻까지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때는 삶의 현장이 곧 전쟁터였을 정도로 창날이 번쩍이고 피가 튀는 날이 계속되었다. 진나라 말엽은 그야말로 새로운 전국시대였다. 게다가 몇 년 동안 계속된 초한전쟁은 이 농부에게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날마다 던졌을 것이다. 한 성을 공격하여 손에 넣으면 적이었던 상대방을 산 채로 매장하는 일도 숱하게 보아온 농부의 입장에서는 젊은 항우의 용맹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더 높이 샀을 것이다. 고통에 빠진 대상을 향한 따스한 마음이야말로 전쟁터에서도 가져야 할 바탕이라고 이 농부는 깊이 성찰했을지도 모른다. ‘나이 지긋한 농부’라면 이런 마음을 넉넉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 나이 지긋한 농부가 한 말은, ‘왼쪽입니다’, 단 한 마디뿐이었다. 그가 항우에게 가리킨 방향에 ‘커다란 늪’이 있었기에 짐짓 속여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좌左’를 우리말로 ‘왼쪽입니다’, 이렇게 다섯 음절로 바꾸어 옮겼지만, 중국어로는 ‘줘’[zuo3], 한 음절로 ‘왼쪽’이라는 뜻 이외에도 ‘사악하다’, ‘한쪽으로 치우쳐 공평하지 못하다’, ‘비정상적이다’이라는 뜻까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나이 지긋한 농부가 보기에 항우가 패왕이 되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온전하다고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진나라 말엽 벌어진 학정에 견디다 못해 일어선 진섭을 뒤이어 항우가 ‘의義’를 위해 깃발을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음릉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길을 잃고’ 헤맸다는 게 이 ‘나이 지긋한 농부’의 인식이었을지도 모른다.
3. ‘만약에……’
쫓기며 동성東城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날 밤 함께했던 기병 8백 명은 이제 겨우 스물여덟 명만이 남게 되었다. 항우는 싸움 잘못한 죄가 아니라 하늘이 자기를 버렸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포위망을 뚫고 오강烏江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만 해도 이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강의 정장이 소식을 듣고 배를 강가에 댄 채 항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생각을 달리했다. 만약에 그 ‘나이 지긋한 농부’가 길을 속여 가리키지 않았더라면, 말에 올라 그를 따랐던 8백 명의 기병 외에도 더 많은 보병까지 있었을 터이니, 뒷날을 도모하기에 그런대로 넉넉했을 터, 그는 화살을 뒤쪽으로 겨눈 채 오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3백여 년 전, 바로 전국시대, 초나라 평왕에게 쫓기던 오자서도 강가에 이르렀다. 항우가 오강에 이르렀다면 오자서는 장강에 이르렀다. 이때, 배를 가지고 있던 한 어부가 위급한 상황에 놓인 오자서를 배에 태우고 강을 건네주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오자서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어부에게 건넸다. 그러나 어부는 100금이나 되는 칼을 한사코 받지 않았다. 만약 그때, 어부가 오자서를 건네주지 않았더라면, ‘통쾌한 복수’ 또는 ‘지나친 복수’라는 의미를 가진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말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나라 군주 부차가 ‘춘추오패’에 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농부’, 사마천이 무대에 그야말로 잠깐 등장시켜 내놓은 ‘왼쪽입니다’, 이 한 마디에 한나라 고조 유방의 세계는 몇 발자국 앞으로 당겨지며 더욱 튼실해졌다. 다른 한편, ‘왼쪽입니다’, 이 한 마디에 항우의 세게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무너졌다. 무너지면서도 칼을 뽑아 스스로 제 목을 찔러 한생을 마침으로써 그의 삶은 그나마 비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점은 항우에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다. 게다가 현상금이 붙은 그의 몸뚱이를 두고 벌이는 군상들의 이악스런 모습이 무대에 펼쳐졌기에 항우의 죽음은 또 다시 비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항우본기」에서 이 부분만 가져온다.
항왕의 몸뚱이도 십여 군데 부상을 입었다. 그는 한나라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넨 나의 옛 친구가 아닌가?”
여마동이 그를 보고는 왕예王翳에게 항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양반이 항왕이오.”
이에 항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 목에 천금과 만 호의 식읍이 걸렸다는 말을 들었네. 내 자네를 위해 덕을 베풀겠네.”
이에 스스로 목을 찔러 세상을 떠났다. 왕예가 그의 머리를 가졌고, 나머지 기병들이 항왕의 몸뚱이를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낭중기郎中騎 양희楊喜, 기사마 여마동, 낭중郎中 여승呂勝과 양무楊武가 각각 사지를 하나씩 차지했다. 다섯이 차지한 몸을 맞춰보니 모두 맞았다.
項王身亦被十餘創. 顧見漢騎司馬呂馬東, 曰 : “若非吾故人乎?” 馬童面之. 指王翳曰 : “此項王也.” 項王乃曰 : “吾聞漢購我頭千金, 邑萬戶, 吾爲若德.” 乃自刎而死. 王翳取其頭, 餘騎相蹂踐爭項王, 相殺者數十人, 最其後, 郎中騎楊喜, 騎司馬呂馬童, 郎中呂勝, 楊武各得其一體. 五人共會其體, 皆是.
만약에 ‘나이 지긋한 농부’가 속여 말하지 않고 ‘오른쪽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 던졌더라면, 이익을 앞에 두고 이익의 조각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악착스레 달려들던 이들 군상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목숨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도 이익 앞에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마천은 ‘나이 지긋한 농부’를 무대에 등장시켰는지도 모른다.
사족 하나-낭중기 양희는 사마천의 사위 양창楊敞의 증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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