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유방의 반응
기원전 191년, 이 해는 한나라 고조 11년, 나라를 연 지 이제 겨우 10년을 넘겼지만 나라 안팎의 형세는 태평성세가 아니었다. 스스로 ‘대왕代王’을 자처하던 진희陳豨가 지금의 허베이河北 땅에서 획책한 모반도 이때였다. 당시 그는 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는 뛰어난 인재들도 여럿이었다. 진희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며 모반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조 유방은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유방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평정하는 길에 나섰다.
바로 이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고조 유방의 출정에 따르지 않고 도성에 남아 진희의 모반에 호응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을 진희에게 은근한 방법으로 알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신은 먼저 도성 안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이들을 궁궐로 진격시킬 계획까지 촘촘하게 세웠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한신의 부하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 동생에게 까발렸고, 이 동생은 당장 여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고조 유방이 진희의 모반을 평정하기 위하여 출정한 동안 홀로 도성을 지키던 여후는 자못 당황했지만 사태의 전후를 헤아리며 소하蕭何를 곁으로 불러 의논했다. 소하는 일찍이 패현 관아의 하급 관리로 근무할 때부터 유방의 사람됨에 온 마음을 기울이며 가까이 지나온 인물이다. 나이도 비슷한 이들은 진나라의 폭정에 맞서 기의하기 전부터 시작하여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한 지금까지 거의 한평생을 함께했다. 유방이 한나라 개국의 공신 셋 가운데 소하를 앞서 손꼽을 정도였으니, 여후의 입장에서도 먼저 소하를 곁에 불러 어려움을 헤칠 방도를 물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소하는 한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목을 내릴 묘책을 내놓았다. 여기서「회음후열전」을 잠시 펼친다.
여후는 한신을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혹시 그가 오지 않을세라 두려워 상국 소하와 계획을 세워 사람을 시켜 고조가 있은 곳에서 온 것처럼 속여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진희는 벌써 사로잡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여러 제후와 뭇 신하들이 와서 모두 축하하고 있습니다.”
상국 소하가 한신을 속이며 이렇게 말했다.
“설령 편찮으시더라도 부디 들어오셔서 축하의 뜻을 표하십시오.”
한신이 궁궐에 들어오자 여후는 무사들에게 한신을 묶어 장락궁의 종실鍾室에서 그의 목을 내리도록 명령했다.
呂后欲召, 恐其黨不就, 乃與蕭相國謀, 詐令人從上所來, 言豨已得死, 列侯群臣皆賀. 相國紿信曰 : “雖疾, 彊入賀.” 信入, 呂后使武士縛信, 斬之長樂鍾室.
출정에서 돌아온 고조 유방은 한신이 처형된 사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마천은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엾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희喜’와 ‘연憐’, 이 두 글자를 나란히 놓되 ‘가엾게 여기다’를 ‘기뻐하다’ 뒤에 놓음으로써 고조 유방의 한신에 대한 감정과 생각을 교묘한 방법으로 묘사했다. 소하의 천거로 한신을 대장에 임명할 때만 해도, 아니 초한전쟁을 거치며 가는 곳마다 승리의 북소리를 울릴 때만 해도 한신은 유방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고조본기」에서 한 부분을 잠시 살핀다.
“백만 군사를 이끌고 싸우면 틀림없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손에 넣는 데는 내가 한신만 못하오.”
連百萬之軍, 戰必勝, 攻必取, 吾不如韓信.
이는 천하를 손에 넣은 뒤 낙양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고조 유방이 한신을 장량과 소하와 함께 추켜세우며 한 말이다. 그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지만 이제 한신은 유방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한신의 세력이 너무 큰 데다 오만하기까지 하여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조 유방이 출정에서 돌아온 이날 여후와 나눈 말을 한번 보자.「회음후열전」이다.
고조가 물었다.
“한신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소?”
여후가 대답했다.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게 한스럽다고 했습니다.”
高祖問 : “信死亦何言?” 呂后曰 : “信言恨不用蒯通計.”
고조 유방은 괴통이 제나라에서 말재주로써 활동했던 인물이라는 정도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에게 모반을 획책하라고 유세했다니 결코 가만둘 수 없었다. 고조 유방은 당장 괴통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정립鼎立하소서
제나라 출신 괴통蒯通은 원래 괴철蒯徹이었지만 한나라 무제의 이름이 유철劉徹이기에 피휘避諱하여 괴통이 된 인물이다. 그는 귀족 사이를 오가며 말재주로써 계책을 내놓으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유방과 항우가 초한전쟁으로 서로 힘을 겨루며 다툴 때, 한신은 제나라를 공격하여 손에 넣은 뒤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 왕으로 봉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요구하여 뜻을 이루었다. 이제 한신은 유방은 물론 항우와도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유방도 항우도 모두 한신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이때, 괴통은 한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었다.
그는 한신에게 자기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설득했다.「회음후열전」에는 이 부분이 몇 쪽에 걸쳐 길게 펼쳐지지만 이곳에서는 간단하게 요지만 적는다.
“장군께서는 지금 결정적인 시점에 서 있기에 그야말로 정확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유방은 야심이 대단하여 천하를 제 손 안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가 장군을 중용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장군을 앞세워 항우와 맞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일단 항우의 목을 내리고 나면 다음 차례는 장군이 될 게 뻔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장군께서는 유방 편에 설 게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되는 게 제일입니다.”
무슨 뜻인가?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의 발처럼 벌여 서라, 그 셋 가운데 하나를 당신이 차지하면 천하는 안정되고 당신도 비명에 목을 내려놓을 일이 없다, 그러나, 한신은 괴통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뒤 괴통이 다시 힘주어 건의했지만 한신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때, 만약 한신이 괴통의 건의를 받아들였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다시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신은 유방을 배반하지 않았다. 괴통이 처음 ‘정립’하라고 했을 때, 한신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가로젓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겠다면서 결단을 유보했을 뿐이다. 괴통이 며칠 뒤 다시 설득했을 때, 한신은 끝내 유방을 배반하지 않고 그의 건의를 물리쳤다. 한신이 끝내 유방에게 등을 돌리지 않자 괴통은 짐짓 미친 체하며 무당이 되었다.
한신은 왜 배신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그가 걸어온 짧은 한평생은 가난했던 소년 시절의 경험이 결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소년 시절, 한신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입을 옷조차 없어서 추운 겨울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유방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며 인격적으로 대우했다. 먹을 음식을 주었으며 입을 옷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러니 어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한신이 괴통에게 건넨 말을 한번 들어보자.「회음후열전」이다.
“한왕은 나를 참으로 잘 대우해 주었소. 당신 수레에 나를 태워 주었고, 당신이 입을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으며, 당신이 먹을 음식을 내가 먹도록 했소. 다른 이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자기가 지고, 다른 이의 옷을 입는 자는 그 사람의 우환을 자기가 품으며, 다른 이의 음식을 먹는 자는 그 사람의 일을 위해 죽는다고 들었소. 내 어찌 이익을 위해 의리를 저버리겠소!”
漢王遇我甚厚, 載我以其車, 衣我以其衣, 食我以其食. 吾聞之, 乘人之車者載人之患, 衣人之衣者懷人之憂, 食人之食者死人之事, 吾豈可以鄕利倍義乎!“
먹을 것 입을 것 없어서 고통스러웠던 소년 시절이 이번에도 그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신이 진희의 모반에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한신은 한나라 개국 공신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적을 인정받았지만 왕의 작위를 빼앗기며 결국은 한낱 자그마한 성읍 회음에 후로 봉해지는 치욕을 견딜 수 없었다. 소년시절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얻어먹고 동네 건달의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치욕은 앞날의 공명을 위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피가 튀고 창이 번득이는 전쟁이 끝난 마당에 당해야 하는 치욕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한신의 앞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순간, 한신은 그의 모사였던 괴통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부귀도 공명도 몽땅 없음의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세 치 혀가 살린 목숨
진희가 일으킨 모반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 유방은 여후의 말을 듣고 당장 괴통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조 유방은 잡혀온 괴통을 무릎부터 꿇렸다. 그러고 나서 다짜고짜 회음후 한신에게 모반하여 천하를 정립하라고 건의한 사실 여부부터 물었다. 괴통은 당당했다. 사마천은 이 부분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회음후열전」에서 이곳을 그대로 옮긴다.
괴통이 잡혀 오자 고조 유방이 이렇게 물었다.
“네가 회음후에게 모반하라고 일렀는가?”
괴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일렀습니다. 하지만 그 못난이가 제 계책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그 못난이가 제 계책을 들었더라면 폐하께서 어떻게 그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蒯通至, 上曰 : “若敎淮陰侯反乎?” 對曰 : “然, 臣固敎之. 豎子不用臣之策, 故令自夷於此. 如彼豎子用臣之計, 陛下安得而夷之乎!”
괴통은 모반하라고 건의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바에야 아예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게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내린 이런 판단을 세 치 혀로 내놓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괴통은 이런 면에서 참으로 용기 있는 변사였다. 그러나 이 말에 화가 벌컥 치솟은 고조 유방이 소리를 높였다.
-이놈을 삶아 죽여라.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자는 승리한다. 괴통이 그랬다. 다시「회음후열전」으로 간다.
괴통이 아뢨다.
“오호라, 삶겨 죽다니, 억울합니다!”
고조 유방이 말했다.
“네가 한신에게 모반하라 일렀기 때문에 삶아 죽이려 하는데 무에 억울하단 말이냐?”
通曰 : “嗟乎, 寃哉亨也!” 上曰 : “若敎韓信反, 何寃?”
둘 사이의 대화에 긴장이 팽팽하다. 죽이려는 자와 살려는 자의 줄다리기가 결코 느슨하지 않다. 이제 괴통이 자기를 옥죄는 그물을 끊고 나와야 할 차례이다.
그의 세 치 혀가 만들어내는 돌파구를 보자. 역시「회음후열전」이다.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개는 자기 주인이 아닌 이를 보면 짖습니다. 당시 저는 오로지 한신만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천하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가지고 폐하께서 하신 일을 하려는 이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들은 다만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이들을 모두 삶아 죽이렵니까?“
“蹠之狗吠堯, 堯非不仁, 狗因吠非其主. 當是時, 臣唯獨知韓信, 非知陛下也. 且天下銳精持鋒欲爲陛下所爲者甚衆, 顧力不能耳. 又可盡亨之邪?”
자기가 섬기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개’를 빌려 진솔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마음에 켕김 없이 기운차게 나타냈다. 괴통의 이런 마음이 세 치 혀를 통해 고조 유방의 마음을 흔들었다.
-풀어 줘라.
사마천은「전담열전田儋列傳」에서 ‘괴통의 계책이 회음후 한신을 교만에 빠지게 하며 망쳤다’라고 이르면서도 ‘괴통이 책사로서 종횡술에 뛰어나 전국시대의 권모술수를 논한 글 여든 한 편을 지었다.’고 일렀다. 사마천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괴통은 마지막 순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삶의 기회를 잡았다. 그의 세 치 혀가 그를 죽음에서 삶으로 이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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