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없고 모진 사나이 오기吳起
기원전 440년, 전국시대 초엽, 위衛 나라에서 태어난 오기는 부잣집 도령으로 세상물정 모르고 호강스럽게 자랐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큰 벼슬을 얻으려고 유세에 나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려버렸다. 마을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자 그는 자기를 비웃으며 헐뜯은 이웃을 서른 명이나 죽이고 위나라 동쪽 성문을 빠져나와 몸을 피했다. 이때, 그가 어머니에게 하직하며 맹세한 장면이「손자·오기열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오기는) 자기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제 팔을 물어뜯으며 맹세하여 아뢨다.
“저는 공경이나 재상이 되지 않으면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與其母訣, 齧臂而盟曰 : “起不爲卿相, 不復入衛.”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위나라 동쪽 노나라로 가서 증자曾子의 문하가 되었다. 사마천은「손자·오기열전」에서 오기가 일찍이 증자에게 배웠다고 했는데, 여기서 가리키는 ‘증자’는『대학大學』이나『효경孝經』을 저술한 ‘증삼曾參’이 아니라 그의 둘째아들 ‘증신曾申’을 가리킨다. 오기는 증자의 문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을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증자가 예를 크게 어긴 오기를 내치며 다시는 자기 문하에 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오기의 각박함을 나무란다. 이것이 오기를 인정 없고 모진 사나이로 각인한 첫 번째 사건이다. 하지만 오기로서는 사람을 서른 명이나 죽이고 떠나온 고향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섶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뒤, 오기는 노나라 군주를 섬기기 시작했다. 마침 이때, 이웃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다. 노나라에서는 제나라와 맞설 장군으로 오기를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었다. 제나라를 처갓집으로 둔 오기가 이 나라에 맞서 용감하게 싸울 수 있겠는가, 노나라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낌새를 눈치챈 오기가 칼을 뽑았다. 그리고 제나라가 고향인 아내의 목을 내려 자신이 노나라 편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장군에 임명된 그는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아내보다 공명을 선택한 그를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인정 없고 모진 사나이라고. 이를 증명한 두 번째 사건이었다.
오기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물리쳐 크게 이기자 오기를 모함하는 이들이 생겼다. 큰 공을 세우면 그 공을 탐하며 샘하는 무리가 군주 곁에 나아가 사탕발림을 하기 마련이다. 신하의 힘이 커지면 군주는 위협을 느낀다. 이럴 즈음, 군주는 그 신하를 멀리 내치거나 날로 붇는 신하의 힘을 갖은 방법으로 약화시킨다. 노나라 군주는 오기를 내쳤다. 아내를 죽여 장군이 된 오기는 인정 없고 모진 사나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결국 군주의 의심을 받으며 노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가 다시 찾은 곳은 위魏 나라였다. 현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위나라 군주 문후文侯를 섬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군사 개혁 무졸제武卒制
위나라 군주 문후는 오기가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히긴 하지만 병사를 다루는 데는 춘추시대 제나라 명장 사마양저보다 낫다는 참모의 말을 받아들여 장군으로 삼았다. 오기는 장군이 되어서도 병사들과 함께 수고로움을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부하의 등에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기까지 했다. 장군이 된 뒤, 오기는 위나라 군주의 지지를 받으며 군사 개혁을 진행하여 이 나라를 전국시대 강자의 위치에 우뚝 솟게 만들었다.
춘추시대에는 전쟁이 일어나야만 필요한 병력을 소집하고 군수 물자를 징발했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초기에는 춘추시대의 이런 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하여 사용했다. 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오기는 이런 동원병 제도를 모병제로 바꾸었다. 이들을 다시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세분화하여 배치 운용함으로써 전투력을 이전보다 몇 배나 더 높였다. 이렇게 모병된 병사들이 동원병을 대신하여 점차 위나라 군대의 바탕이 되었다.
핵심은 병사들의 정예화였다. 모병제에 의해 모집된 병사들은 또 다시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일단 심사를 통과한 병사에게는 그의 가족이 요역을 면제받는 대우를 누릴 수 있었다. 심사 중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으면 하급 장교로 발탁되기도 했다. 오기는 심사 기준을 엄격하게 정했다.
윗도리와 넓적다리, 그리고 종아리, 이 세 곳에 갑옷을 걸친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검을 차며, 어깨에는 긴 창을 멘다.
십석궁十石弓을 손에 잡고, 화살 5십 개를 휴대한다.
등에는 사흘 치 마른 양식을 짊어진다.
위와 같은 상태로 한나절에 백 리[약 40km]를 행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선발을 위한 심사 기준 가운데 하나였다. 오기의 남보다 앞선 생각이 벌써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런 심사 과정을 통하여 병사들의 남과 다른 능력을 알아내어 이들을 서로 다른 전술을 운용하는 부대에 배치했다. 근접전에 능한 병사, 활쏘기에 능한 병사, 붙잡고 기어오르기에 능한 병사 등등 각각의 능력에 따른 부대 배치와 운용으로 실전에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오기가 이끄는 군사는 매우 강하여 맞서 겨룰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였다. 오기가 거느린 군사는 첫 출정에서 진秦 나라를 쳐서 다섯 개의 성을 금세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다.
오기보다 3백여 년 뒤, 평민 출신으로 옛 로마의 사령관이 된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가 공들여 진행한 군사 개혁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오기가 진행한 군사 개혁과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지구 저쪽 로마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제도 개혁을 통해 기반을 잡은 직업군인제는 모병제를 통한 정예부대를 지향한 오기의 개혁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마다 일정한 병기와 장비를 갖추게 한 점도 공통된다. 지구 이쪽 전국시대 동방의 위나라와 지구 저쪽 서방의 옛 로마가 개혁의 필요성이 있을 때에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을 각각 만났기에 거의 닮은꼴의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개혁은 언제나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점이다. 이 점은 오기의 끝장을 살피는 데 자못 깊이 시사한다.
문후는 오기를 깊이 신임했다. 진秦과 한韓, 이 두 나라에 맞선 오기의 모습에 든든해진 문후는 그를 서하西河 지방 태수에 임명했다. 서하는 학자들에 따라 가리키는 곳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황하 서쪽의 광대한 지역으로 당시 진秦 나라의 동진을 막는 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한다. 이를 통하여 문후의 오기에 대한 큰 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후가 세상을 뜬 뒤 자리를 이은 그의 아들 무후에 이르러 자그마한 문제가 커지면서 발화점을 넘는 일이 벌어졌다.
직언의 폐해
어느 날, 무후는 배를 타고 서하를 따라 내려가다가 오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을 던졌다. 오기는 무후의 말에 올곧은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침묵이 구원자가 되는 경우를 오기가 모를 리 없었지만, 오기는 참지 못했다.「손자·오기열전」을 연다.
(어느 날) 무후가 배를 띄워 서하를 따라 내려가다가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워라, 산과 강의 견고함이여, 이것이 바로 위나라의 보배로다!”
이에 오기가 답하여 아뢨다.
“(나라의 보배는 임금의) 덕행에 있지 산과 강의 험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옛적에 삼묘씨三苗氏의 나라는 왼쪽에는 동정호가 있고 오른쪽에는 팽려호가 있었지만 덕과 의를 닦지 않았기에 우임금에게 멸망했습니다. 또 하나라의 걸왕이 있던 곳은 왼쪽에는 하수와 제수가 흐르고 오른쪽에는 태산과 화산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이궐이, 북쪽에는 양장이 있었지만 정치를 베풂에 어짊이 없었기에 탕임금에게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은나라 주임금의 땅은 왼쪽에는 맹문산이 있고 오른쪽에는 태항산이 있으며 북쪽에는 상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하수가 흐르지만 정치를 베풂에 덕이 없었기에 무왕이 그를 죽였습니다. 이로 볼 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중요한 것은 임금의) 덕행에 있지 산과 강의 험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
무후가 말했다.
“알았소.”
武侯浮西河而下, 中流, 顧易謂吳起曰 : “美哉乎山河之固, 此魏國之寶也!”起對曰 : “在德不在險. 昔三苗氏左洞庭, 右彭蠡, 德義不修, 禹滅之. 夏桀之居, 左河濟, 右泰華, 伊闕在其南, 羊腸在其北, 修政不仁, 湯放之. 殷紂之國, 左孟門, 右太行, 常山在其北, 大河經其南, 修政不德, 武王殺之. 由此觀之, 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 武侯曰 : “善.”
배 안에는 두 사람 외에도 여러 신하들이 있었을 것이다. 견고한 요새가 된 산천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한껏 기분이 부푼 무후에게 오기가 던진 말은 정수리에 붓는 찬물 한 동이였다. 오기의 말에는 힘이 넘쳤다. 그러나 걸러야 할 지점을 알아야 했는데 막힘이 없었다. 몇 년 뒤, 무후가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혜왕惠王도 그의 면전에 대고 내지른 맹자孟子의 힘이 넘치고 거침이 없는 말에 찬물 한 동이를 뒤집어쓰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맹자는 혜왕의 신하가 아니었지만 오기는 이 나라 군주 무후의 신하였다. 신하가 내지르는 결기 넘치는 말에 오직 한 마디, ‘알았소’, 라고 끝냈지만, 무후는 속으로 칼을 갈며 치욕을 되갚을 날을 셈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때, 위나라에서 새로 마련한 재상 자리는 전문田文에게 돌아갔다. 사마천은 오기를 위해 마련한 ‘열전’에 오기가 재상은 마땅히 자기 차지여야 한다며 전문과 벌인 논쟁을 제법 길게 전개했다. 오기는 우선 수긍했지만 전문이 죽고 나서도 재상 자리는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무후가 공숙公叔을 재상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고향을 떠날 때 자기 팔뚝을 물어뜯으며 재상이 되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올린 맹세는 한참 뒤에나 이루어질 일이 되어 버렸다. 전문이나 공숙이 오기보다 재상 임무 수행에 적합한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기가 배 안에서 무후의 들뜬 기분을 한순간 차갑게 식힌 그 직언 탓일 수도 있다. 오기에게는 권력을 손에 쥔 임금이 지금 이 한 사람뿐이지만 임금에게는 자리만 만들어 주면 찾아올 능력 있는 장군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즉 깨달았어야 했다. 권력이 무엇인가, 자기 뜻대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아닌가.
화살에 쓰러진 개혁
새로 재상이 된 공숙은 오기를 해치기로 작정한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무후의 속마음을 읽은 공숙이 군주의 더 많은 굄을 얻기 위하여 오기를 해치는 데 앞장섰는지도 모른다. 이럴 때면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는 인물이 나타나서 갖은 궤언으로 판을 헤집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공숙의 하인이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인이 소곤소곤하자 공숙이 빙긋 웃으며 끄덕끄덕. 생명에 위협을 느낀 오기는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내달았다.
당시 초나라 군주는 도왕悼王이었다.「초세가楚世家」는 도왕의 처음과 끝을 이렇게 기록했다.
성왕聲王 6년, 도적이 성왕을 살해하자 아들 도왕悼王 웅의熊疑가 자리를 이었다. ......도왕 21년, 도왕이 죽자 아들 숙왕肅王 장臧이 자리를 이었다.
聲王六年, 盜殺聲王, 子悼王熊疑立. …… 二十一年, 悼王卒, 子肅王臧立.
건조하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단어뿐이다. 그러나「손자·오기열전」에 이르면 도왕의 주검을 제 몸으로 덮은 오기의 몸뚱이 위로 쏟아진 화살에 쓰러진 개혁이 보인다.
도왕은 제 발로 찾아온 오기를 재상 자리에 앉혔다. 오기가 남달리 현명하다는 말을 벌써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기를 헐뜯으며 치욕을 안긴 동네 사람 서른 명의 목을 내리고 고향을 떠나던 날, 공경이나 재상이 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제 팔 물어뜯으며 어머니에게 맹세한 말을 재상이 된 날 오기는 분명 되새겼을 것이다.
재상이 된 오기는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사마천은 초나라에 온 오기가 재상이 되어 추진한 개혁에 대하여 세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 얼개를 살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잠시 이곳에「손자·오기열전」의 한 부분을 불러온다.
(오기는) 법령을 분명하고도 세밀하게 하고, 요긴하지 않은 관직을 없애고, 왕실과 촌수가 먼 왕족의 봉록을 없애고, 전투할 수 있는 병사를 길렀다. 요체는 병력을 강하게 만들어 합종과 연횡을 주장하는 유세객을 깨뜨려 내치는 데 있었다.
明法審令, 損不急之官, 廢公族疏遠者, 以撫養戰鬪之士. 要在彊兵, 破馳說之言縱橫者.
법령을 제정한 뒤 널리 공포하여 이를 집행하는 관리는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만듦으로써 온 나라에 구석구석 시행하는 데 문제가 없게 되었다. 또 작위를 받은 귀족들도 삼대가 지나면 세습된 봉록을 취소하고 왕족과 거리가 멀어진 이들을 땅 넓고 사람 드문 변방으로 이주시켰다. 요긴하지 않은 관리를 없애고 여기서 생긴 재원을 병력을 양성하는 데 투입함으로써 전투력을 강화했다. 모두 오기가 초나라에서 시행한 개혁이었다.
『사기』 밖에서 오기가 행한 개혁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구절들이 있다. 먼저 여불위의『여씨춘추呂氏春秋』「귀졸貴卒」에서 한 구절 가져온다.
오기가 초나라 임금에게 일러 아뢰었다.
“초나라에 남아도는 것은 토지요 부족한 것은 백성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부족한 것으로 남아도는 것을 늘리려고 하지만,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吳起謂荊王曰 : “荊所有餘者, 地也 ; 所不足者, 民也. 今君王以所不足益所有餘, 臣不得而爲也.”
토지는 남아돌 만큼 넓지만 백성은 부족하다, 이는 귀족들의 손안에 백성들이 있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귀족들의 손안에 든 백성들을 풀어내어 임금의 손안에 넣은 뒤, 이들을 강력한 병사로 길러야 나라가 강성해질 수 있다는 게 속뜻이다. 귀족들의 손안에 움켜쥔 권력을 빼앗아야 한다는 오기의 셈을 읽을 수 있다. 왕실과 촌수가 먼 왕족의 봉록을 없앴다는 사마천의 기록을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비자韓非子』「화씨和氏」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
옛적에 오기가 초나라 도왕에게 그곳 풍조를 가리켜 아뢰었다.
“대신들의 권세는 너무 크고 봉지를 받은 귀족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위로는 임금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괴롭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가난하게 하고 병력을 약화시키는 길입니다.”
昔者吳起敎楚悼王以楚國之俗, 曰 : “大臣太重, 封君太衆 ; 若此, 則上逼主而下虐民, 此貧國弱兵之道也.”
이미 권력을 손에 쥔 채 내려놓지 않고 오랜 세월 대를 이어 유지해 온 세력을 멀리한다는 게 개혁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권력을 쉬 내려놓으려 할까? 자기 권력을 쉬 내려놓으려는 자는 예나 이제나 어디에도 없다. 권력이 얼마나 좋은지 권력을 손에 쥐고 맛본 자가 더 잘 안다. 군주와 손을 맞잡은 오기의 개혁에 뒤로 물러났던 귀족들은 내놓았던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자리에 오른 지 스물한 해째 되던 해, 병석에 누운 초나라 군주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는 정보가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피던 귀족들이 어깨를 겯고 일어났다. 무려 일흔 집안에 이르는 귀족들이 눈짓 한 번에 오랫동안 모의해 온 것처럼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다. 이들은 활시위에 오늬를 잔뜩 메긴 채 궁중으로 치달았다. 오기도 이들보다 앞서 방금 세상을 떠난 도왕의 주검을 향해 내달았다. 그리고 그의 몸으로 도왕의 주검을 덮었다. 그 위로 화살이 빗발로 쏟아졌다. 몇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며 금단현상에 빠졌던 이들은 오기를 향해 가지고 있던 화살을 남김없이 날렸다. 오기의 주검과 도왕의 주검은 날아온 화살로 고슴도치가 되었다. 기원전 381년, 오기가 힘 있게 추진해온 개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장났다. 밀려났던 귀족들이 날린 화살에 그가 추진하던 개혁도 끝장났다. 이 때문인가, 군주의 시호를 ‘도悼’로 만든 까닭이.
사마천은 오기의 행실이 인정 없고 모질었기에 목숨을 잃었다고 이르며, 이렇게 깊이 탄식한다. ‘슬프도다!’
사족蛇足
오기는 자기에게 화살을 날린 이들 귀족의 무리를 저승으로 이끄는 데 길을 닦았다. 초나라 법에 군주에게 병기를 쓴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규정을 알았던 그가 도왕의 주검을 제 몸으로 덮은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를 향해 귀족들이 날린 화살은 도왕의 주검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도왕의 아들로서 뒤를 이은 소왕의 입장에서도 이들 귀족은 거칫거려서 거북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기에 이들을 주살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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