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떠나야 할 때 떠난 사람-범려范蠡②

촛불횃불 2022. 4. 1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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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를 펼치면 범려范蠡를 만날 수 있다. 중학 시절이었을까, 춘추시대 미녀로 이름난 서시西施가 범려의 곁에 있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기에, 사마천을 만나면서사기곳곳을 훑었지만 서시라는 이름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민간에 떠도는 밑도 없는 이야기를 모은 야사에나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사실도 늦게야 알았다. 그러다가 중국정법대학 리샤오李曉 교수의상고지혜商賈智慧를 만나며화식열전을 새로이 또 펼쳤고, 이제 범려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부자라면……’, 역사의 무대에 영광스럽게 부활시켜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상고지혜商賈智慧』...리샤오, 商賈智慧, 廣西師範大學出版社, 『중국 옛 상인의 지혜』로 인간사랑에서 출판. 옮긴이 이기흥.

 

<상고지혜>

 이로부터 240여 년 뒤, 때는 전국시대 말엽, 조나라의 도성 한단에서 시작된 여불위의 행각에 범려의 모습이 겹쳐졌다가 다시 안개처럼 흩어지기 여러 번이었다. 난카이대학南開大學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지금은 퇴임한 쑨리췬孫立群대진 정계의 두 별大秦政壇雙星에서 여불위야말로 색다른 방법으로 부자가 되려고 했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이르며 잘못 들여놓은 한 걸음으로 한평생을 패배로 이끌었고 그 패배도 참으로 비참했다.’라고 뭉뚱그렸다. 쑨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나는 잘못 들여놓은 한 걸음을 한 발 더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었다.

 *『대진 정계의 두 별大秦政壇雙星』... 쑨리췬, 大秦政壇雙星, 中華書局, ‘呂不韋, 就是以另類手段求富的典型.……, 由于走錯一步, 導致全盤皆輸, 失敗得很慘.' p.4.10행-13행.

대진 정계의 두 별[대진정단쌍성]

 

-범려의 간언, 아니 되옵니다

 

 범려가 어떤 경로로 월 나라 군주 구천句踐을 만나서 그의 참모가 되었는지 사마천은사기어느 곳에도 기술하지 않았다.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는 구천은 회계산에서 고통을 당하고 나서 대부 문종과 범려를 등용했다고 했을 뿐이다. 단지 다른 사료를 통하여 범려의 고향땅 원 지방의 장관으로 와 있던 문종文種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았고, 나중에 월나라의 중앙관리가 된 문종이 범려를 청하여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오월 형세도

 때는 춘추시대 말엽, 오늘의 중국 중남부 동쪽으로 바다를 낀 제후국 오와 월 두 나라는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몇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야심만만했던 오나라 군주 합려闔閭가 월나라 군주 구천과 벌인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도지며 세상을 떠날 때 태자 부차夫差에게 남긴 유언은 또 다른 전쟁을 예비했다. 다음은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두루 나오는 구절이다.

 

 (합려가) 태자 부차에게 일러 말했다.

너는 구천이 너의 아비를 죽인 일을 잊겠느냐?”

부차가 대답했다.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謂太子夫差曰 : “爾忘句踐殺爾父乎?” 夫差對曰 : “不敢忘

 

합려

 

 부차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월나라에 복수하려고 군사를 훈련시킨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구천은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려고 나섰다. 바로 이때, 구천 앞에 나선 이가 범려였다. 이로써 범려는 사마천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월왕구천세가이다.

 

 범려가 간언하여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며, 다툼은 일 가운데 제일 못난 것입니다. 남몰래 모의하며 덕을 거스르고, 흉기 쓰기를 좋아하여 자신을 제일 못날 것에 시험하는 일을 하늘도 금하거늘 나선다 해도 이로움이 없사옵니다.

 范蠡諫曰 : “不可. 臣聞兵者凶器也, 戰者逆德也, 爭者事之末也. 陰謀逆德, 好用凶器, 試身於所末, 上帝禁之, 行者不利.

 

범려

 합려를 이어 자리에 오른 부차가 아버지의 원한을 제 원한으로 가슴에 키우며 두 해가 지난 뒤였다. 기원전 494, 범려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군대를 일으킨 구천은 부초夫椒[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태호太湖 안의 초산椒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차에게 아비의 원한을 갚을 기회를 주고 말았다. 구천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5천을 이끌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몸을 피했다. 이를 안 부차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이미 승리를 거머쥐고 기세 또한 만만하지 않았던 터였다. 부차는 회계산을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구천은 범려의 충언에 귀를 막았던 자신을 후회했다. 이제는 범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구천은 대부 문종을 부차에게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구천이 스스로 볼모가 되어 오나라 군주 부차를 섬겨야 이 위기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범려의 간언에 귀를 열어야 했다.월왕구천세가를 다시 펼친다.

 

 (문종은) 무릎으로 기어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왕의 망한 신하 구천이 저 문종에게 일러 감히 왕의 집사에게 아뢰옵나니, ‘구천은 신하가 되고, 그의 처는 왕의 첩이 되기를 청하옵니다.’”

膝行頓首曰 : “君王亡臣句踐使陪臣種敢告下執事 : 句踐請爲臣, 妻爲妾.”

 

와신상담

 

 무릎을 꿇어도 치욕적인 항복이었다. 구천은 쓸개를 곁에 두고 이 치욕을 되갚기 위해 온갖 고통을 다 참았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성어는 이렇게 비롯되었다. 구천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내려앉은 월나라의 국정을 범려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범려는 자신이 문종에 미치지 못하다며 굳이 사양하고 두 해 동안 오나라에 스스로 볼모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일곱 해 동안 와신상담에 절치부심하며 겨드랑이에 날개를 키우던 구천이 다시 몇 해를 지나 이제는 가능하다는 범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오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의 도편 <오월 형세도>를 살피면 고소姑蘇’[姑苏]라는 곳이 보인다. 이곳에 갇힌 오나라 군주 부차는 그의 대부 공손웅公孫雄을 구천에게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공손웅의 입을 빌려 부차가 이른 말 한 마디는 오늘 우리를 쓴웃음 짓게 만든다. 월왕구천세가이다.

 

오왕 부차

 오나라 왕의 사자 공손웅은 맨살을 드러낸 채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월나라 왕에게 강화를 요청하며 아뢰었다.

외로운 신하 부차는 감히 속마음을 드러내겠습니다. 벌써 지나간 그때, 회계산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 바라옵건대, 회계산에서 제가 왕에게 그렇게 용서해준 것처럼 외로운 신하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吳王使公孫雄肉袒膝行而前, 請成越王曰 : “孤臣夫差敢布腹心, 異日嘗得罪於會稽, ……, 意者亦欲如會稽之赦孤臣之罪乎?”

 

 오나라 사자의 간절한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구천이 허락하려고 하자 범려가 이를 막고 나섰다. 오나라 군주 부차는 결국 제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오자서의 간언에 귀를 닫았던 부차였다. 아니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오자서에게 자결을 강요했던 부차였다.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자서를 대할 면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죽음의 순간에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패배를 일으켜 세우며 승리의 방향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떠나야 할 때 떠난 범려

 

 주나라 원왕元王이 구천에게 제 지낸 고기를 내리고 구천을 제후의 머리로 명했다. 이리하여 사방의 제후들이 구천을 패왕이라 일컬었다.

 바로 이 때가 떠날 때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아는 인물은 현명하다. 범려는 때를 알았다. 때를 알았기에 때에 맞추어 간언을 올릴 줄도 알았다. 이 부분을 읽다가 책을 펼친 채로 가만 눈을 감으면, 권력의 속살을 제대로 꿰뚫으며 깨달은 범려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른다. 이 시대, 패자가 된 군주에게 또 다른 권력은 이미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 터이다. 아니, 이는 이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의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범려가 월나라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보낸 글을월왕구천세가에서 가져온다.

 

 -하늘을 나는 새가 다 잡히면 훌륭한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다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집니다. 월나라 군주 구천이라는 사람은 목이 길고 입은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니, 참으로 환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까?

蜚鳥盡, 良弓藏 ; 狡免死, 走狗烹. 越王爲人長頸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下不去?

 

조진궁장鳥盡弓藏’, ‘토사구팽兎死狗烹’, 널리 쓰이는 이 성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는 초한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이름을 날린 한신韓信, 한제국의 개국 뒤, 고조 유방의 무사에게 묶여 뒷수레에 실리며 똑같은 말을 내뱉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한신은 묶였지만 범려는 묶이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났기 때문이다.

 

한신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인물보다는 욕망의 덫에 갇혀 떠나야 할 때를 놓치고 불행한 마지막을 맞는 인물이 더 많은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다. 타박타박 두 발로 걸어서 이웃 마을로 향하던 발걸음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웃 나라로 향하는 시대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역사를 공부하는 이는 물음을 던진다.

 역사는 진전하는가, 아니면 같은 틀이 비슷하게 반복되는가.

 

-새 삶을 펼친 범려

 

 다른 이의 참언에 귀가 솔깃한 구천은 문종에게 칼 한 자루를 내렸다. 그는 제 목숨 스스로 끊으며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범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며 무겁게 짊어졌던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범려는 때맞춰 떠났기에 새 삶을 펼칠 수 있었다. 한밤에 자그마한 배를 띄워 그가 찾아간 곳은 제나라였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인물이 찾아간 곳은 보통 사람의 예상을 벗어난 곳, 주변부였다. 그곳에 이른 그는 성도 이름도 다 바꾸었다. 이제는 범려가 아니었다. 처음엔 치이자피鴟夷子皮였고 도[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딩타오현定陶縣 경내]로 옮겨서는 주공朱公이었다.

 「화식열전에는 월나라 군주 구천이 회계산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범려와 계연을 등용했다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그런데 월나라를 떠나면서 범려가 한 말이 같은화식열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범려는 회계산에서 받은 치욕을 씻고 나서 탄식하며 말했다.

 “계연의 일곱 가지 계책 가운데 월나라는 다섯 가지만 쓰고도 뜻을 이루었다. 이미 나라에서 써 보았으니, 나는 이 계책을 집에서 써 보아야지.”

 이리하여 자그마한 배에 올라 강호로 다니다가, ……,

范蠡旣雪會稽之耻, 乃喟然而嘆曰 : “計然之策七, 越用其五而得意. 旣已施於國, 吾欲用之家.” 乃乘扁舟浮於江湖, …… ,

 

 

 

계연지책은 이미 실전되어 판본이 전하지 않지만 깨끗한 부자들을 모아 기록한 화식열전에 계연의 주요 사상이 요약되어 있다. 그 가운데 상업 경영의 원칙으로 밑줄을 치고 싶은 부분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가뭄이 든 해에는 배를 준비하고 큰물이 난 해에는 수레를 준비한다. ……, 물품을 완전하게 보존하는 데 힘쓰고 돈은 손안에 잡고 있지 말아야 한다. ……, 값이 오를 때는 오물 버리듯이 내놓고 값이 헐할 때는 주옥 탐내듯이 사들여야 한다.

旱則資舟, 水則資車, …… , 務完物, 無息幣, …… , 貴出如糞土, 賤取如珠玉, …… ,

 

 오늘날의 경제 이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아니 다름이 없다. 범여는 계연의 계책을 그대로 적용하여 큰돈을 모았다. 사마천은 범려가 열아홉 해 동안 세 번 큰돈을 모았지만 몇 차례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창업했다.

 그는 나눌 줄 아는 부자였다. 한사코 움켜쥐는 데만 익숙한 졸부가 아니었다. 최고 권력을 손아귀에 쥔 월나라 군주 구천이 그를 곁에 두고자 했지만 권력 곁을 떠날 줄 알았던 범려는 또 다른 큰 권력, 곧 거만금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는 손바닥을 펼쳐 나누어 줄 줄 알았다. 그러기에 오늘도 중국의 상인들은 그를 상성商聖으로 높여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