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굶어죽은 군주-제환공齊桓公

촛불횃불 2022. 4. 14. 19:10

환공, 관중을 받아들이다

 

 사실 관중은 환공桓公 편이 아니었다. 환공이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 그는 공자 소백小白이었다. 곁에는 배다른 형 공자 규가 있었다. 군주는 양공襄公, 이들의 형이었다. 함께 살려면 자기 곁에 있는 이들을 향해 품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양공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웃 노나라 환공을 술에 취하게 만든 뒤 주살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인과 가만히 정을 통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수시로 변하는 양공을 지켜보던 소백과 규, 이들 둘은 각각 거 나라와 노 나라로 몸을 피했다. 아무런 까닭 없이 사람을 마구 죽이는 양공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 곁에서 소백 편에 섰던 이가 포숙아였고 규 편에 섰던 이가 관중이었다.

 양공을 시해하고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이태 만에 옹림雍林에 놀러갔다가 벌써부터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에게 살해되었다. 일찍이 소백과 사이가 괜찮았던 대부 고혜高傒가 거나라에 있던 소백을 가만히 제나라로 불렀다. 노나라도 같은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규에게 보냈다. 그리고 관중에게는 따로 군사를 주어 거나라로 통하는 길을 막게 했다.

 

춘추시대 첫 패자 제환공

 길목에서 숨어 기다리던 관중 앞에 제나라 도성으로 향하던 소백이 나타났다. 관중은 활시위를 한껏 당겨 소백을 향해 날렸다. 소백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꺼꾸러졌다. 관중은 사람을 보내 노나라에 이 소식을 알렸다. 규를 호송하는 노나라 군대는 행군 속도를 늦췄다. 그러나 이들이 도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제나라 군주는 소백이 차지하고 있었다. 소백, 바로 환공이었다.

 관중이 활시위를 한껏 당겨 날린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의 쇠 부분을 맞추었고, 소백은 그대로 죽는 시늉으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결국 군주의 자리를 둘러싼 경쟁에서 공자 규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으며, 관중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공자 소백에서 제나라 군주가 된 환공은 자기를 지켜온 포숙아를 대부로 삼아 나랏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때, 포숙아가 환공에게 올린 말을 사마천은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기록으로 남겼다.

 

 “신이 다행히 주군을 따르며 모셨는데 마침내 나라님이 되셨습니다. 주군께서 존귀한 자리에 이르셨으니 이제 신은 주군을 더 높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군께서 그저 제나라만 다스릴 생각이라면 고해와 신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패왕이 되실 생각이라면 관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관중이 머문 나라는 반드시 강성해질 것이니, 그를 놓쳐서는 아니 되옵니다.”

臣幸得從君, 君竟以立. 君之尊, 臣無以增君. 君將治齊, 卽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覇王, 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國國重, 不可失也.”

 

포숙아

 

 군주의 넓은 품이 큰 인재를 안았다. 자기 몸에 화살을 날린 관중을 향해 환공은 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껏 품을 열었다.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는 환공이었지만, 환공을 패자의 자리에 올린 이는 관중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드라마의 각본은 포숙아의 것이었다. 이런 포숙아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눈길은 사뭇 따스하다.·안열전·晏列傳에서 한 문장만 데려온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아를 더 찬미했다.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세상 사람들의 입을 빌린 사마천의 사람보기 기준 아니겠는가. 어떻든 무대에 오른 세 사람은 모두 성공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러나 셋 다 최후의 승자는 아니었다.

 

두 가지 일화

 

 환공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마흔두 해나 있었다. 이 가운데 마흔 해를 관중과 함께했다.

 

관중

 기원전 681, 환공이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 다섯 해째 되는 해였다. 제나라는 이웃 노나라와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승리를 거둔 터였다. 환공은 당시 노나라 군주였던 장공莊公과 가읍柯邑에서 만났다. 수읍遂邑을 바치며 화해를 청한 장공의 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단상에는 양쪽 군주가 마주 앉았다. 장공으로서는 치욕적인 회맹이었지만 이날 그를 수행한 장수 조말曹沫은 비수를 뽑아들고 단상을 향해 비호처럼 내달았다. 그리고 환공의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위협했다. 이 장면은제태공세가보다자객열전이 훨씬 더 생동감이 넘친다.

 

 환공이 장공과 함께 단상에서 맹약을 맺고 있을 때, 조말이 비수를 손에 쥐고 환공을 위협했지만 환공의 주위에 있던 이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환공이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려는가?”

 조말이 대답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한데 큰 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함이 너무 심합니다. 지금 노나라 도성 성곽이 무너지면 제나라 땅에 떨어질 만큼 깊숙이 들어왔는데, 군주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소서.”

 환공은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다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환공이 말을 마치자 조말은 비수를 내던지고 단 아래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신하의 자리에 앉았는데, 얼굴빛은 변함이 없고 말소리도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桓公與莊公旣盟於壇上, 曹沫執匕首劫齊桓公, 桓公左右莫敢動, 而問曰 : “子將何欲?” 曹沫曰 : “齊强魯弱, 而大國侵魯亦甚矣. 今魯城壞卽壓齊境, 君其圖之.” 桓公乃許盡歸魯之侵地. 旣已言, 曹沫投其匕首, 下壇, 北面就群臣之位, 顔色不變, 辭令如故.

 

조말

 조말이 제 목을 겨누었던 비수를 내던지고 단 아래로 내려가자 환공은 곧 후회했다. 손안에 들어온 땅덩어리를 다시 돌려주다니, 안 될 일이었다. 환공은 조말을 잡아 목을 내리려고 했다.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막 올랐을 때, 포숙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겸손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위기 때만 무릎 꿇는 모습 보이다가 위기를 벗어나자 눈을 부라리는 모습은 덕이 높은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었다. 패자를 향해 힘 있게 나아가는 기세가 너무 대단했던 탓일까. 이때, 관중이 곁에서 올린 간언이 오히려 대인의 풍모 그대로였다.제태공세가를 함께 보자.

 

 “위협받을 때는 허락했다가 이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다면 단지 조그마한 즐거움만 얻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제후들에게 신의를 저버리고 천하의 지지를 잃을 것이니, 아니 되옵니다.”

夫劫許之而倍信殺之, 愈一小快耳, 而棄信於諸侯, 失天下之援. 不可.

 

 이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환공은 이로부터 이태 뒤 마침내 온 제후국을 호령하는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기원전 679, 환공 7년이었다.

역아

 

 이때부터 환공의 주위에 알랑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권력은 자칫 냄새 나는 오물이 되기 십상이어서 걸핏하면 파리가 떼로 꾀기 마련, 이는 옛적에도 오늘이나 다름이 없었다. 역아易牙도 파리 떼 가운데 하나였다. 사마천은사기에 역아의 요리솜씨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단지 임종을 앞둔 관중에게 새로운 재상 천거를 요청하며 나눈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개했다. 그 가운데 역아에 관한 부분만 가져 온다.제태공세가이다.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이렇게 물었다.

 “여러 신하 가운데 누가 재상이 될 만하오?”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만큼 신하를 잘 아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자 환공이 다시 물었다.

 “역아는 어떻소?”

 관중이 대답하여 아뢨다.

 “자식 죽여 임금 뜻에 맞추려 했으니, 남을 동정하는 따스한 마음이 아닙니다. 아니 되옵니다.”

 管仲病, 桓公問曰 : “群臣誰可相者?” 管仲曰 : “知臣莫如君.” 公曰 : “易牙如何?” 對曰 : “殺子以適君, 非人情, 不可.”

 

 궁중 요리사였던 역아가 자기 아들을 요리하여 환공에게 바쳤음을 알 수 있다. 환공의 요구가 없는데도 역아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욕망 때문에 자발적으로 제 아들을 요리로 바쳤는지 알 수 없다. 사마천은 이 점에 대하여 끝내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어떤 작가는 역아의 충성에 감동한 나머지 눈자위에 눈물까지 어린 환공이, ‘사랑하는 그대여, 정말 훌륭하오.’, 라고 썼다.

 어떻든 이 부분에 이르면 환공의 비극적인 종말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다.

 

스스로 불러온 불행

 

 관중이 세상을 떠난 지 이태 뒤, 환공도 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불행의 씨는 벌써부터 싹트고 있었다. 오만도 그 싹 가운데 하나였다. 제후들을 모아 회맹하는 횟수가 늘수록 환공의 오만은 수위를 높였다.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규합하고 난 뒤에는 자신이 천하를 바로잡았노라 큰소리쳤다. 환공이 내놓은 재상 후보를 관중은 하나같이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관중이 세상을 떠나자 환공은 제 아이를 요리하여 올린 역아, 환공을 섬긴다며 자기 아버지를 열다섯 해 동안 찾아보지 않은 개방開方, 그리고 제 손으로 거세하면서 왕에게 가까이 가려고 애쓴 수도豎刀를 곁으로 불러 중용했다. 관중이 모두 가까이 두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던 이들 셋은 정권을 휘저으며 오로지했다.

 

 

 게다가 환공이 병이 들자 각기 다른 몸에서 난 다섯 공자들이 서로 파당을 지어 제나라 군주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이들에게는 환공의 병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앞이었다. 서로 공격하느라 궁중은 늘 비어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군주가 아침저녁 끼니를 거르는 날이 계속되었다. 환공은 결국 굶주림으로 세상을 끝냈다.제태공세가는 환공이 눈을 감은 뒤의 모습을 딱 한 문장으로 기록했다.

 

굶어죽은 제환공

 

 환공의 주검은 침상에 육십칠 일이나 있어 주검에서 생긴 벌레가 문 밖까지 기어 나왔다.

 桓公尸在床上六十七日, 尸蟲出于戶.

 

 눈앞의 달콤함에 이성을 내팽개친 환공의 자업자득이었다.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주 곁에는 자기 이익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간신의 무리가 들끓게 마련이다. 여기에 더하여 환공은 여색을 밝혀 부인처럼 예우를 받는 희첩을 여섯이나 곁에 두었으니, 이들 몸에서 낳은 배다른 형제들이 권력을 두고 벌인 암투는 또 얼마나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혔겠는가.

 권력을 위해서라면 제 아들까지 제물로 바쳤던 역아 같은 인물을 기꺼이 곁에 두었던 환공의 끝장은 슬픔을 넘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귀 기울임으로써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覇者가 된 환공은 스스로 귀를 닫음으로써 불행한 결말을 만들어낸 수많은 패자敗者가운데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