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한 알
먼저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가운데 '한비자韓非子' 부분 첫 번째 단락을 가져온다.
한비韓非는 한韓나라 여러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형명과 법술에 관한 학문을 좋아했다. 그의 학설의 이론적 바탕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에 있다. 한비는 말을 더듬는다는 결점 때문에 유세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문장으로 이론을 세우는 데는 뛰어났다. 그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을 스승으로 모시고 섬겼는데, 이사는 자신이 한비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韓非者, 韓之諸公子也. 喜刑名法術之學, 而其歸本於黃老. 非爲人口吃, 不能道說, 而善著書. 與李斯俱事荀卿, 斯自以爲不如非.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이사李斯는 자신이 한비만 못하다고 생각했다.’에 얼른 밑줄을 그었다. 귀곡자를 함께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던 방연도 ‘자신의 재능이 손빈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난 뒤에 비극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던가.
견주어 모자람을 알면 물러서서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일이다. 대어 보아 미치지 못하면 뒤로 비켜서서 자기 자리 상대에게 내어줄 일이다. 이렇게 쉬운 일을 못하는 게 인간이다. 욕망 때문이다. 욕망은 절제를 모른다. 내 손에 쥐어진 권력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생각을 막는다. 욕망에 눈먼 자는 욕망을 욕망하며 타인의 욕망까지 욕망한다. 그리고 끝내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비극의 씨는 이렇게 잉태된다.
이와는 달리 욕망을 덜어냄으로써 비극을 저 멀리 물리고 평화를 자기 곁으로 당겨놓은 이도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포숙아는 자기가 온전히 손안에 넣을 수 있었던 권력을 관중에게 넘김으로써 세세대대로 권세를 물림했다. 눈앞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더 큰 행복을 차지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다 기록함으로써 커다란 거울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죽은 이는 부활하여 영원히 우리의 벗이 되었고 살아서 영화를 누리던 이는 이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쥐 철학
기원전 247년, 초나라 상채上蔡 출신의 이사李斯가 진나라로 왔다. 상채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주마뎬시駐馬店市 상차이현上蔡縣이다. 진나라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창고지기였다. 그것도 곡식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였다. 먼저「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한 부분을 가져온다.
(이사는) 관청 측간의 쥐는 더러운 것을 먹다가도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오면 그때마다 무서워서 놀라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창고에 들어간 이사는 그곳 쥐는 쌓인 곡식을 먹으면서도 큰 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리하여 이사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느니 못났다느니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달렸구나!”
見吏舍厠中鼠食不潔, 近人犬, 數驚恐之. 斯入倉, 觀倉中鼠, 食積粟, 居大廡之下, 不見人犬之憂. 於是李斯乃嘆曰 : “人之賢不肖譬如鼠矣, 在所自處耳!”
측간의 쥐보다는 곡식 창고의 쥐가 되고 싶었던 이사는 창고지기를 그만두고 순자荀子를 찾아가서 그의 문하에 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한비를 만났다. 운명이었다. 둘은 함께 ‘제왕지술帝王之術’을 공부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 곧 ‘정치 철학’을 익혔던 것이다. 이사는 순자의 문하를 떠나 진나라로 향했다. 진나라 군주 영정이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여불위呂不韋를 찾았다. 그리고 기꺼이 그의 사인이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이제 막 장양왕莊襄王이 세상을 떠나고, 나중에 시황제가 된 영정嬰政이 겨우 열세 살의 나이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진시황의 아버지는 자초子楚이다. 달리 이인異人이라 불렸던 그는 안국군安國君, 곧 나중에 자리에 오른 장양왕의 스무 명쯤 되는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안국군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정부인으로 삼았지만 아들이 없었다. 자초의 생모는 하희夏姬였다. 그녀는 안국군의 굄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장양왕으로 자리에 오른 자초는 오늘의 자기를 만든 여불위를 외면하지 않고 승상으로 삼았다. 이제 장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영정이 자리에 올랐으니, 여불위의 권세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전국 칠웅 가운데 진나라를 고른 이사의 상황 판단도 예사롭지 않지만 여불위를 택하여 기꺼이 그의 사인이 된 결정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측간의 쥐가 되기를 마다하고 창고의 쥐가 되기로 결심했던 지난날을 잊지 않고 초지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큰 사상가이면서 정치가였던 순자의 문하에서 익힌 학문도 만만찮음을 알 수 있다.
이사는 진나라 승상 여불위의 눈에 들어 진나라 군주 영정의 시위관으로 임명되었다. 제 뜻을 군주에게 유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마침내 진나라 군주 영정은 그에게 장사長史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의 ‘쥐 철학’에 밝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욕망이 키운 영광은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었다.
-덫
어느 날, 한 편의 글을 읽던 진나라 군주 영정이 이렇게 탄식했다. 「노자·한비열전」가운데 한 부분을 데려온다.
어떤 이가 한비의 글을 진나라에 전했다. 진나라 왕이「고분孤憤」과「오두五蠹」를 읽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짐이 이 분과 만나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으련만!”
人或傳其書至秦. 秦王見孤憤, 五蠹之書, 曰 “ ”嗟乎, 寡人得見此人與之游, 死不恨矣!“
곁에 있던 이사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우리 진나라와 동쪽으로 국경을 맞댄 이웃 한韓 나라에 지금도 살아 있는 한비의 글이라고 아뢨던 것이다. 진나라 군주는 급히 군대를 파견하여 한나라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한나라 군주가 한비를 등용하여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냈다. 결국 한비의 비극적인 결말은 진나라에서 이루어졌다. 진나라 군주 영정은 그를 의심하며 등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등용하려고 해도 이사가 품을 넓힐 리 없었다. 당시 여불위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사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던 것이다.
한나라 공자 출신이 진나라를 위해 일할 리 없다고 곁에서 부추긴 데다 죄를 뒤집어씌워 법에 따라 죽여야 한다며 이사 편에 선 대신의 말에 진나라 군주 영정은 귀를 기울였다. 한비가 쓴 글은 영정을 감동시키는 데서 끝나고 말았다. 결국 한비는 이사가 보낸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세상을 마쳤다. 이사의 욕망이 만든 덫이 한비의 한생을 끝낸 셈이다.
-태사공 사마천의 탄식
한비의『한비자』10여 만 자 쉰다섯 편 가운데「세난說難」은 유세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한 부분만 데려온다.
무릇 유세의 어려움은 자신의 재능으로 군주를 설득하는 데 있지도 않고, 자신의 말재주로 자기 의견을 펼치는 데 있지도 않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결 방법을 몽땅 다 표현하는 데 있지도 않다. 무릇 유세의 어려움은 상대방의 속셈을 잘 알아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방법을 상대방에게 적응시키는 데 있다. ……,
凡說之難 : 非吾知之有以說之之難也, 又非吾辯之能明吾意之難也, 又非吾敢橫失而能盡之難也. 凡說之難 : 在知所說之心, 可以吾說當之. ……,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비는 상대를 설득하기 어려운 까닭을 한참이나 더 늘어놓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제대로 된 유세 한 번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안타깝다. 동문수학한 동무를 설득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그가 보낸 독배를 마셔야 했으니, 세상에 이런 악연도 없다.「노자·한비열전」에서 사마천이 탄식하며 내놓은 한 마디 말을 여기에 가져온다.
나는 오로지 한비가「세난」을 짓고도 자신은 재앙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슬퍼할 따름이다.
余獨悲韓子爲說難而不能自脫耳.
-덫의 덫
덫은 덫이 된다. 제 욕망 채우려고 상대를 옭은 덫이 결국 자신을 옭아매는 덫으로 변하며 불행에 빠뜨린다. 동문수학한 동무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사의 덫은 곧 자신을 가두는 덫으로 변한다.
전국시대를 끝낸 진나라 군주 영정은 드디어 시황제가 되었다. 시황제는 아직은 술렁대는 천하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걸핏하면 순행에 나서곤 했다. 기원전 210년 7월, 순행 중 갑자기 병을 얻은 시황제가 사구沙丘에서 세상을 떠났다. 황제를 모시고 나섰던 행렬 가운데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趙高, 그리고 막내아들 호해胡亥와 몇몇 환관만이 황제의 죽음을 알 뿐이었다. 죽음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는 몽염蒙恬 장군 곁에서 북쪽 변방을 지키고 있었고, 황제의 옥새 관리는 조고가 책임지고 있었다. 정변이 조고의 머리에서 싹을 내밀었다. 호해에게 2세황제의 자리가 넘어감과 동시에 큰 권력이 조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권력의 한 조각을 더위잡으며 버티던 이사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벼슬과 봉록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이사에게는 욕망의 끝이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외쳐도 조정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만큼 조고의 위세는 하늘을 덮을 정도였기에 이사는 버티려야 버틸 수 없었다.
사마천은「이사열전」에서 기원전 208년 7월, 그가 맞이한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사에게 오형五刑을 갖추어 죄를 논하고 함양의 저자에서 허리를 자르도록 했다. 이사는 옥에서 나와 함께 잡혀 형을 받게 된 둘째아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 너와 함께 누렁이를 이끌고 또 한 번 상채의 동문을 나와 사냥하며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 어찌 그런 기회가 오겠느냐!”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은 함께 소리 내어 울었고, 그의 삼족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具斯五刑, 論腰斬咸陽市. 斯出獄, 與其中子俱執, 顧謂其中子曰 : “吾欲與若復牽黃狗俱出上蔡東門逐狡兎, 豈可得乎!” 遂父子相哭, 而夷三族.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측간의 쥐였던 시절을 그렸지만 동문수학한 동무까지 죽음의 덫에 가두며 욕망을 향해 질주했던 지난날의 죄업은 끝내 씻을 수 없었다. 리궈원李國文은 그의『중국 문인의 비정상적 죽음中國文人非正常的死亡』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사와 같은 사나이를 아마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이다.’[至少, 這種赴死的慷慨, 這種生死不計的從容, 這種坦對死神的勇氣, 後來的中國人, 除了那些有着堅定信仰的革命黨人外, 恐怕再難找到類似李斯這樣死無足懼的漢子了. 2003년, 인민문학출판사, p.10. 5~8행.]라며 제법 강개한 어조로 말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키워 온 욕망의 덫은 그를 이렇게 끝장내고 말았다. 슬프다, 욕망의 끝이 만든 비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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