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이야기
전국시대 말엽,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함부로 넘보기에는 버거운 상대가하나 있었으니 바로 조나라였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철저히 무릎 꿇리기엔 자기가 입을 상처도 만만치 않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조나라에는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그리고 조사趙奢 같은 영명하고 지혜 넘치는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79년, 화씨벽和氏璧이라는 옥덩어리 하나가 조나라 조정에 풀기 힘든 문제를 던졌다. 당시 조나라의 군주는 혜문왕惠文王, 진나라의 군주는 소양왕昭襄王이었다. 소양왕이 던진 말 한 마디, 그것도 계산된 말 한 마디에 조나라 혜문왕은 조정 대신들에게 지혜를 구했다.
진나라 소양왕의 요구는 이러했다.
“성읍 열다섯을 드릴 테니 화씨벽을 우리 진나라에 넘기시오.”
이쯤에서「염파․인상여열전」을 함께 보자.
조왕은 대장군 염파를 비롯하여 여러 대신들과 의논했다. 진나라에 넘기자니 진나라가 속이며 성읍을 주지 않을세라 우려되고, 넘기지 않자니 진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세라 걱정이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답변을 들을 만한 인물을 찾았지만, 이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때, 환관의 우두머리 무현繆賢이 이렇게 말했다.
“저희 집 사인 인상여藺相如를 사신으로 보낼 만합니다.”
趙王與大將軍廉頗諸大臣謀 : 欲予秦, 秦城恐不可得, 徒見欺 ; 欲勿予, 卽患秦兵之來. 計未定, 求人可使報秦者, 未得. 宦者令繆賢曰 : “臣舍人藺相如可使.”
‘열전’에 함께 묶여 오른 인물 ‘염파’가 전쟁터에서 세운 빛나는 공적은「조세가」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인상여’는 오늘에야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 화씨벽 이야기
중국인의 옥玉 사랑은 대단하여 그들의 속담에도 ‘황금은 값이 있지만 옥은 값을 셈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옥에는 천자의 정령이 머문다고 생각했기에 군주의 옥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지극한 사랑은 넘치는 눈물이 함께하기 마련, ‘화씨벽’도 이런 눈물이 있다. 화씨벽의 내력은 사마천보다 150년 정도 앞서 살았던 한비韓非의『한비자韓非子』가 큰 도움을 준다. 「화씨和氏」세 단락 가운데 첫 번째 단락을 다 가져온다.
초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형산荊山에서 옥돌 한 덩어리를 얻었다. 그는 옥덩어리를 여왕厲王에게 올렸다. 여왕은 옥장에게 이를 감정하게 했다. 옥장은 이렇게 말했다.
“돌덩어리입니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하며 그의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세상을 뜨고 무왕武王이 자리에 오르자 화씨는 이 옥덩어리를 무왕에게 올렸다. 무왕이 옥장에게 이를 감정하게 했다. 옥장은 또 말했다.
“돌덩어리입니다.”
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하여 그의 오른발을 잘랐다. 무왕이 세상을 뜨고 문왕文王이 자리에 오르자 화씨는 이 옥덩어리를 품에 안고 형산 자락에서 사흘 밤낮을 울었다. 눈물이 말라 계속하여 피가 흘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세상에 발 자르는 형을 받은 자가 많거늘, 그대는 어이 그리 슬피 우는가?”
이 물음에 화씨의 대답은 이러했다.
“발 잘려서 슬픈 게 아니라 보옥寶玉을 돌덩어리라 하고 충성스럽고 참된 사람을 사기꾼으로 모는 게 슬플 뿐입니다. 이게 바로 내가 슬퍼하는 까닭이외다.”
문왕은 옥장이에게 이 옥덩어리를 가공하게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보옥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름을 붙여 ‘화씨의 벽’이라고 일렀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 “石也.” 王以和楚人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 : “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 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于楚山之下, 三日三夜, 淚盡而繼之以血. 王聞之, 使人問其故, 曰 :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 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 遂命曰 : “和氏之璧.”
기원전 740년을 앞뒤로 일어난 사건이다. 여왕도 여왕이지만 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무왕도 같은 방법으로 남은 한 쪽 발을 자르며 변화卞和, 곧 화씨에게 슬픔과 분노를 함께 안긴다. 이렇게 초나라 궁실에 있던 ‘화씨벽’이 어떤 사정과 경로로 조나라 궁중으로 들어왔는지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로부터 4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인상여’를 역사의 무대에 끌어올리며 ‘완벽귀조完璧歸趙’라는 네 글자 성어를 탄생시켰다.
- 돌아온 화씨벽
‘완벽귀조’란 ‘빌려준 물건이 흠 하나 없이 주인에게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인상여가 진나라 소양왕 앞에 가져갔던 화씨벽을 흠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조나라 왕실로 되가져온 이야기에서 비롯된 성어이다.
사신으로 소양왕 앞에 이른 인상여는 먼저 사랑하는 조나라를 업신여기는 진나라의 예의를 벗어난 행동에 분노를 삼켰다. 함양에 있는 궁전이 아니라 행궁의 별관에서 사신 일행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비빈은 물론 문무백관들까지 다 만세 소리 높이며 귀중한 화씨벽을 손으로 만지면서까지 감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귀한 보옥이 드디어 제 것이 되었다며 환호했지만 열다섯 성읍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때, 앞으로 나선 인상여의 모습을「염파․인상여열전」에서 살펴보자.
인상여는 진나라 왕이 조나라에게 성읍을 줄 마음이 없음을 알아채고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화씨벽에는 흠이 하나 있으니, 제가 대왕께 그 흠을 가리켜 드리기를 청하옵니다.”
왕이 화씨벽을 건넸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손에 넣자 몇 걸음 물러나서 기둥에 기대서더니, 노발대발하며, ……, 인상여는 화씨벽을 가지고 기둥을 노려보며 기둥에 그것을 치려고 했다. 진나라 왕은 화씨벽이 깨질까 봐 두려워서 잘못을 사과하고 그렇게 하지 않도록 사정했다. ……,
“화씨벽은 천하가 다 아는 보물입니다. 조나라 왕께서는 진나라가 두려워서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나라 왕께서는 이 화씨벽을 보낼 때, 닷새 동안 재계하셨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닷새 동안 재계하시고 대궐 뜰에서 구빈九賓을 맞이하는 예를 갖추시면, 저는 감히 이 화씨벽을 올리겠습니다.”
相如視秦王無意償趙城, 乃前曰 : “璧有瑕, 請指示王.” 王授璧, 相如因持璧卻立, 倚柱, 怒髮上沖冠, ……, 相如持其璧睨柱, 欲以擊柱. 秦王恐其破璧, 乃辭謝固請, ……, : “和氏璧, 天下所共傳寶也, 趙王恐, 不敢不獻. 趙王送璧時, 齋戒五日, 今大王亦宜齋戒五日, 設九賓於廷, 臣乃敢上璧.”
닷새 뒤, 진나라 왕이 구빈을 맞이하는 예를 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화씨벽은 이미 조나라로 돌아간 뒤였다. ‘대왕을 속인 죄로 마땅히 죽어야 함을 알고 있으니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내려 달라.’는 인상여를 바라보며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갑론을박하며 분노했지만 진나라 왕은 두 나라의 우호 관계는 물론 화씨벽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조나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 또 다시 승리한 인상여
조나라 군주 혜문왕은 인상여를 상대부로 삼았다. 당시 제후국의 작위는 경卿, 대부大夫, 사士, 이렇게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인상여가 받은 작위는 ‘경’보다는 한 등급 낮은 직위로서 세 등급으로 나눈 ‘대부’ 중에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가 진나라에서 치욕을 당하지 않고 돌아온 점을 높이 샀던 것이다.
그 뒤, 진나라는 우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핑계를 앞세워 서하西河 남쪽 민지澠池로 조나라 왕을 불러냈다. 혜문왕은 두려웠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며 염파와 인상여가 갈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인상여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민지에서 두 나라 군주가 만났지만 진나라 군주 소양왕은 흥겨워진 술자리에 찬물을 끼얹었다.「염파․인상여열전」이다.
진나라 왕은 술을 마시고 불콰해지자 이렇게 말했다.
“과인이 가만 들으니 조왕께서는 음악을 좋아한다는데, 거문고 한 곡을 뜯으시지요.”
조나라 왕이 거문고를 뜯었다. 진나라 사관이 앞으로 나와 이렇게 기록했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진나라 왕께서 조나라 왕과 만나 술을 마시다가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뜯도록 명령했다.
秦王飮酒酣, 曰 : “寡人竊聞趙王好音, 請奏瑟.” 趙王鼓瑟. 秦御使前書曰‘某年月日, 秦王與趙王會飮, 令趙王鼓瑟.’
외교상 예의를 벗어나도 이만저만 벗어난 게 아니었다. 조나라를 얕보지 않았다면 아예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인상여가 앞으로 나서며 방금 앞서 진나라 왕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올렸다. 제가 듣기로 대왕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시어 분부盆缻 연주를 잘 하신다니 서로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십사고 사뢴 것이다. 물론 진나라 장양왕은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염파․인상여열전」이다.
“저 인상여와 대왕 사이는 다섯 걸음도 되지 않습니다. 제 목의 피를 대왕께 뿌려서라도 청할 것이옵니다!”
“五步之內, 相如請得以頸血濺大王矣!”
서슬이 퍼렇다. 진나라 왕 주위에 있던 신하들이 칼을 뽑았지만 인상여의 부릅뜬 눈과 마주하자 모두 뒤로 물러섰다. 인상여의 부릅뜬 눈이, 춘추시대 노魯 나라 장군으로서 제齊 나라 환공桓公의 군사와 세 번 맞붙어 세 번 다 패배한 조말曹沫이 노나라 군주 장공庄公과 제나라 군주 환공이 회맹하고 있던 단 위로 뛰어올라 환공의 목에 비수를 들이댄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그로부터 약 370년 뒤, 전국시대 조나라 인상여의 모습이 그대로 춘추시대 노나라 조말의 모습과 겹치며 역사의 반복을 느끼게 만든다.
인상여는 조나라 사관을 불러,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진나라 왕께서 조나라 왕을 위해 분부를 연주했다.’라고 기록하게 했다.
-갈등과 화해
염파의 가슴에 염장을 지른 이는 조나라 군주 혜문왕이었다. 민지에서 이루어진 진나라와의 만남에서 세운 공로를 치하하며 인상여를 상경上卿의 자리에 올렸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조나라에서 상경은 고생하며 세운 공이 큰 대신이나 귀족에게 내리는 작위로 재상에 상당하는 위치였다. 염파는 피가 튀고 창날이 번쩍이는 전쟁터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조나라를 지키는 데 평생을 다 바친 장군이었다. 그가 보기에 겨우 세 치 혀로 이룬 공적으로 자기보다 윗자리를 차지한 인상여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염파로서는 인상여 밑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치욕적이었다. ‘내 그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한사코 염파를 피했다. 그러자 인상여의 사인들이 이제는 주인 곁을 떠나겠다고 나섰다. 겁 많은 이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시「염파․인상여열전」을 열어 인상여의 말을 들어보자.
“강한 진나라가 감히 우리 조나라를 넘보지 못하는 건 바로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외다. 지금 두 호랑이가 서로 맞붙으면 분명 둘 다 존재할 수 없을 것이오. 내가 이렇게 참으며 피하는 건 나라의 위급함을 앞세우고 개인적인 원망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兩人在也. 今兩虎共鬪, 其勢不俱生. 吾所以爲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
이 말이 염파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당장 고개를 푹 떨구며 웃옷을 벗었다. 부족했던 자신의 마음을 가늠했던 것이다. 이어 등에 가시나무를 한 짐 지고 인상여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사죄했다.
둘은 화해했다. 죽음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하며 서로 손을 굳게 맞잡았다. 아름다운 풍경은 함께하는 이를 언제나 감동으로 적신다. 이를 기록하며 사마천의 붓도 감동으로 잠시 떨렸으리라. 지금도 염파와 인상여는 둘 다 아름다움으로 부활하고 있다.
서한 초기 사부辭賦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마상여司馬相如도 인상여를 흠모한 나머지 ‘상여’를 자기 이름으로 삼았다. 인상여는 역사에서 이렇게 빛으로 거듭났다.
'역사 인물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셈 빠른 장사꾼의 끝장-여불위呂不韋 (0) | 2022.04.14 |
---|---|
욕망이 만든 비극-이사李斯 (0) | 2022.04.13 |
이런 복수-손빈孫臏과 방연龐涓 (0) | 2022.04.12 |
재치와 해학으로 승리한 사나이-순우곤淳于髡 (0) | 2022.04.12 |
황후의 몸종에서 숙비淑妃가 된 여인-풍소련馮小憐 (0) | 2022.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