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사기』라는 무대에 올린 인물은 수도 없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갈등을 풀고 화해함으로써 함께 산 인물이 있는가 하면, 갈등으로 깊어진 원한을 피로써 풂으로써 함께 죽은 인물도 있다. 상대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권력에 빌붙어 영원히 살 것처럼 으스대던 인물은 역사의 무대에서 바짓단 걷고 매를 맞으며 죽음보다 더 큰 치욕을 당하는가 하면, 당시 역사의 무대에서 죽임을 당하며 사라졌던 인물은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기도 한다.
모자라면 채워야 한다. 힘써 채워도 모자람을 기울 수 없다면 자기 곁에 있는 인물의 힘을 빌리는 방법이 있다. 재능 넘치는 인물이 곁에 없으면 멀리서라도 모셔야 한다. 모자람을 채우기보다 재능 넘치는 인물을 제거함으로써 홀로 권력을 오로지하며 우뚝 서려다가 추물이 된 인물을 사마천은 지나치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모자람을 서로 채워줌으로써 함께 우뚝 선 인물도 있다. 사마천은 이런 인물도 놓치지 않는다.
-앞 이야기
『손자병법』으로 이름난 손무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 년쯤 지나 동쪽 제나라에서 태어난 손빈孫臏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방연龐涓과 함께 귀곡자鬼谷子를 모시고 동문수학했다. 그러나 이 인연은 아름다운 우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두 사람을 화해할 수 없는 원수 사이로 만들었다.먼저「손자·오기열전」에서 한 부분을 가져 온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공부했다. 방연은 위魏 나라를 받들어 섬기며 혜왕의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이 손빈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남몰래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렀다. 방연은 그가 자기보다 현명한데다 능력까지 나음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없는 죄를 만들어 그의 두 발을 자르고 얼굴에 먹물로 글자까지 새겨 넣고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孫臏嘗與龐涓俱學兵法, 龐涓旣事魏, 得爲惠王將軍, 而自以爲能不及孫臏, 乃陰使召孫臏. 臏至, 龐涓恐其賢於己, 疾之, 卽以法刑斷其兩足而黥之, 欲隱勿見.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서쪽 변방의 진秦 나라가 마지막 일웅이 되었지만 이 시대 처음 약 70년 동안은 위魏 나라가 강국이었다. 혜왕이 동쪽을 넘보며 도읍을 대량으로 옮기면서 형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아직은 다른 제후국이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지만, ‘만약’이라는 말을 데려와 역사를 가정한다면, 방연이 혜왕을 모시며 동문수학한 동무 손빈의 재능을 모자라는 자기 그릇에 채워 더했더라면 나라는 물론 이 둘도 역사의 무대에 함께 빛났을 것이다.
환공桓公을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로 만든 관중管仲도 젊은 시절 함께한 동무 포숙아鮑叔牙의 빛나는 우정이 없었더라면 역사에서 둘이 함께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며, 전국시대 조나라의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의 화해가 없었더라면 남쪽의 강국 진나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전국시대에는 차마 역사의 기록에 올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극단적인 인물이 많았다. 방연도 그러했다. 동무를 물리쳐야 할 적으로 보고 폐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쓸모없이 된 손빈의 쓸모를 알아본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위나라에 잠시 들른 제나라 사신이었다. 다시「손자·오기열전」을 펼친다.
제나라의 사신이 대량大梁에 왔다. 손빈은 형벌을 받는 신분으로 남몰래 제나라 사신을 만나 그를 설득했다. 제나라 사신은 손빈이 참으로 만나기 힘든 인재라고 생각하고 남몰래 자기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가 그를 높이 평가하며 아꼈을 뿐만 아니라 빈객으로 대접해 주었다.
齊使者如梁, 孫臏以刑徒陰見, 說齊使. 齊使以爲奇, 竊載與之齊. 齊將田忌善而客待之.
위기를 맞았던 손빈이 더 큰 위기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니, 이는 위기를 기회로 살린 손빈의 지혜와 용기에 더하여 온전히 참 인재를 알아본 제나라 사신이 있었기에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그는 제나라 장군 전기의 인정까지 받게 되었다.
인재를 알아보고 곁에 둔 지도자가 나라를 번영의 길로 이끈 예는 수도 없이 많다.「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의 한 구절을 본다.
당시 진나라는 상앙商鞅을 써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병력도 강화했다. 초나라와 위나라도 오기를 써서 몇몇 나라를 무릎 꿇리고 상대 나라를 약하게 만들었다. 제나라에서는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이 손빈과 전기 같은 인물을 씀으로써 제후들이 동쪽 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當是之時, 秦用商君, 富國彊兵 ; 楚, 魏用吳起, 戰勝弱敵 ; 齊威王, 宣王用孫子, 田忌之徒, 而諸侯東面朝齊.
손빈의 재능을 알아본 전기가 제나라 군주 위왕에게 손빈을 천거함으로써 다리 잘리고 이마에 자자된 인물을 역사 무대에 꽃으로 활짝 피게 만들었다.
기원전 353년, 위나라 혜왕이 8만이나 되는 큰 병력을 동원하여 조나라 도성 한단邯鄲으로 향했다. 조나라는 급히 동쪽의 이웃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는 진즉 동맹 관계가 맺어진 터였다. 당시 제나라 군주는 위왕이었다. 위왕은 전기에게 군사를 주어 나아가 싸우게 했다. 손빈은 장군으로 쓰려는 위왕의 제안을 조용히 물리고 전기 아래로 기꺼이 들어가서 작전에 지혜를 보태는 일을 맡았다. 맞선 상대는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나선 방연. 귀곡자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방연과 손빈이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위나라와 제나라가 벌이는 전쟁은 곧 샘 많은 방연과 지혜 넘치는 손빈이 맞선 대결이기도 했다.
-맞붙은 전쟁 둘
첫 전쟁터는 계릉桂陵. 이곳 계릉의 위치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창위안현 長垣縣 서북쪽이라는 설, 같은 성 푸양濮陽 인근이라는 설, 이보다 동쪽 산둥성山東省 허쩌荷澤 동쪽의 어느 한 지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이 지점이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다. 어떻든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제나라 군대가 매복과 기습 작전으로써 크게 승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결과는 제나라 승리, 위나라 패배였다. 두 다리 잘리고 얼굴에 자자된 손빈의 승리, 상대를 폐인으로 만든 방연의 패배였다.
그러나 위나라 혜왕은 조나라 한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때 포기할 수 있는 이는 현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혜왕은 끝내 포기할 줄 몰랐다. 10년 뒤, 이번에는 마릉馬陵이 전쟁터가 되었다. 마릉은 지금의 산둥성 랴오청시聊城市 신현莘縣 부근이다. 이 전쟁 역시 손빈과 방연의 물러설 수 없는 일전, 결과는 10년 전과 같았다. 두 장군이 겨룬 지혜 싸움에서 이번에도 방연이 패배했다. 손빈의 ‘감조퇴병減竈退兵’ 작전에 방연이 내린 오만한 판단은 위나라가 다시는 우뚝 일어설 수 없는 패배를 안겼던 것이다.
손빈은 ‘감조퇴병’ 작전으로 병사들을 뒤로 물리면서 그때마다 부뚜막의 숫자를 줄임으로써 상대방에게 겁 많은 군대, 도망병의 숫자가 급증하는 군대라는 인식을 심어주며 적군을 자기 진영 깊숙이 유인했다. 방연은 십 년 전 계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당한 치욕을 갚을 생각이 그 무엇보다 컸기에 진격의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하지만 이와 비례하여 패배의 상처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을 수밖에 없었다.
방연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릉 협곡에 들어섰을 때는 어둠이 이제 막 짙어지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다. 바로 이때, 1만 명이 넘는 제나라 궁수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방연이 이끄는 군대는 방어 채비도 할 새 없이 그대로 혼란에 빠지며 순식간에 쓰러졌다. 손빈이 아름드리나무의 껍질을 도끼로 깎아낸 뒤 그 자리에 큰 붓으로 검게 쓴 ‘방연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는 글귀를 방연이 불 밝혀 읽는 순간 날아든 화살은 그야말로 빗발이었다. 지혜가 모자랐음을 깨달은 방연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목에 칼을 꽂았다.
-승자와 패자
「손자·오기열전」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방연은 계략을 펼칠 수 없어 패배가 이미 정해진 판국이라는 것을 알자 칼을 뽑아 스스로 제 목숨을 끊었다. 숨이 떨어지기에 앞서 순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애송이 같은 놈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만들었구나!”
제나라 군대는 승리를 여세를 몰아 위나라 군대를 철저히 궤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손빈은 이 일로 해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그의『병법』도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龐涓自知智窮兵敗, 乃自剄, 曰 : “遂成豎子之名!” 齊因乘勝盡破其軍, 虜魏太子申以歸. 孫臏以此名顯天下, 世傳其兵法.
그러고 보면,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방연은 무릎을 꿇지 않은 셈이다. 지략에 졌지만 상대방을 ‘애송이’라고 폄하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방연을 해치운 손빈의 책략이 영명했음을 인정했지만 일찍이 다리를 잘리는 재앙을 피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어떻든 방연은 허상에 빠져 진상을 놓쳤다. 방연이 손빈과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결었더라면, 역사에서 가정은 터무니없다지만,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은 위나라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욕망의 덫에 갇힌 방연의 최후도 안타깝지만 두 다리 잘린 손빈이 전쟁터에 나가서 새파랗게 날선 칼날로 복수하는 장면은 통쾌함보다 차라리 슬픔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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