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를 넘은 욕망
전국시대 말엽에 조나라 도성 한단에 온 여불위는 이미 부자였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이미 가진 재물만으로도 한평생 넉넉히 호사를 누릴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은 그를 바라보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잠시 사마천을 벗어나서『전국책戰國策』「진책秦策」다섯 번째 편을 펼친다. 여불위의 욕망이 사뭇 진득하여 앞으로 그가 살아갈 모습을 미루어 알기에 넉넉하다.
복양濮陽 사람 여불위가 한단邯鄲에 장사하러 왔다가 진나라의 인질 이인異人을 만난 뒤 돌아와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여쭸다.
“농사를 하면 몇 배나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열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느니라.”
“보석 장사를 하면 몇 배나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백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느니라.”
“그럼 한 나라의 임금을 세우면 몇 배나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계산할 수 없을 만큼이니라.”
그러자 여불위는 이렇게 아뢰었다.
“지금 온갖 고생을 다해 일해도 등 뜨습고 배부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라 일으키고 임금 세우면 후세까지 대대로 은택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저는 가서 이 일을 하겠습니다.”
濮陽人呂不韋賈于邯鄲, 見秦質子異人, 歸而謂父曰 : “耕田之利幾倍?” 曰 : “十倍.” “珠玉之贏幾倍?” 曰 : “百倍.” “入國家之主贏幾倍?” 曰 : “無數.” 曰 : “今力田疾作, 不得暖衣餘食 ; 今建國立君, 澤可以遺世. 愿往事之.”
조나라 도성 한단에 왔을 때, 여불위는 이미 그 자리에서 ‘천금’이라는 거금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부자였다. 그러했지만 그는 등 뜨습고 배부른 데 만족하지 못했기에 더 큰 목표가 나타났다. 바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재물’, 그의 머릿속엔 이 한 목표뿐이었다. 그랬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그에게는 곧 재물이었다.
이인과 여불위를 사마천은 무대에 함께 등장시켰다. 이인은 달리 자초子楚라고 부른다.「여불위열전」에서 사마천은 자초를 처음 만난 여불위의 감정을 ‘불쌍히 여겼다’라고 했지만, 바로 이어서 나온 여불위의 혼잣소리는, ‘이 진귀한 물건은 사 둘 만하다’. 였다. 한 번 더 풀이하면, ‘자초는 진귀한 물건이기에 사들여 보관했다가 값이 오르면 내다 팔면 되겠다.’는 뜻이다. 자초를 불쌍히 여겼다기보다는 돈벌이 수단으로 계산했음을 알 수 있다.
-자초子楚
당시 진나라 군주는 소양왕昭襄王, 그는 기원전 306년에 자리에 올라 기원전 251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장 쉰여섯 해 동안 진나라를 오로지했다. 그는 재위 중에 조나라와 장평에서 치른 세 해 동안의 전쟁으로 진나라를 이미 칠웅 가운데 일웅이 될 바탕을 탄탄히 마련했다. 이런 그에게도 슬픔이 있었다. 자리에 오른 지 마흔 해 되던 해에 태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태자 죽은 지 이태 뒤, 소양왕은 둘째아들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다.
안국군에게는 아들만 스무 명 남짓이었다. 이 가운데 장유의 순서가 중간쯤 되는 아들이 바로 자초였다. 그를 낳은 어머니 하희夏姬는 안국군의 굄을 받지 못하였다. 안국군은 그의 곁 여러 여인 가운데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총애하며 정부인으로 삼았지만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초는 자기 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다. 뭐 하나 제대로 대접받을 수 없었던 자초는 조나라에 볼모로 와서도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 진나라가 걸핏하면 조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맞갖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으니, 찬밥이 된 자초의 몰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큰 장사꾼 여불위가 자초 앞에 나타났다. 자초라는 진귀한 물건을 사 두기 위해서였다. ‘내가 당신 가문을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소.’, 여불위는 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자초에게 이 말부터 던졌다. ‘당신 가문이나 크게 만든 뒤에 내 가문을 크게 만들어 주시오.’, 자초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불위는 장사꾼의 치밀한 셈법이 이미 서 있었다.「여불위열전」을 펼친다.
……, 여불위가 말했다.
“당신은 가난한 데다 이곳 객지에 떨어져 있으니 어버이를 잘 모시거나 빈객들과 사귈 수도 없습니다. 제가 비록 가난할지라도 당신을 위해 천금을 가지고 서쪽으로 가서 안국군安國君과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섬겨 당신을 태자로 삼도록 만들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초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계책대로만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겠소.”
……, 呂不韋曰 : “子貧, 客於此, 非有以奉獻於親及結賓客也. 不韋雖貧, 請以千金爲子西游, 事安國君及華陽夫人, 入子爲適嗣.” 子楚乃頓首曰 : “必如君策, 請得分秦國與君共之.”
자초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여불위에게 건넨 말 한 마디가 자초가 처한 오늘의 곤궁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천금’으로 만들, 계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물을 마음속으로 셈하며 슬그머니 남몰래 웃음 지었을 여불위의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여불위는 ‘천금’의 위력을 정확하게 셈했다. 오백 금을 뚝 떼어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구입했다. 화양부인이 목표였다.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는 백 곱절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의 귀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의 목표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화살은 정확하게 날아가서 알과녁에 꽂혔다. 화양부인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는 자초를 후사로 삼았기 때문이다. 안국군도 총애하는 화양부인의 베갯머리송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자초는 이제 찬밥 신세를 벗어나게 되었다. 자초는 조나라에서 볼모로 지냈지만 신세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여불위를 통해 보낸 많은 물품도 자초를 푸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불위가 한단에서 얻은 여러 첩 가운데 미모가 뛰어난 데다 춤까지 잘 추는 여자를 건네받았기 때문이다. 자초는 이 여인에게서 아들까지 얻었다. 이 아들의 이름은 영정嬰政.
-더 큰 욕망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로 책봉되었던 그의 둘째아들 안국군이 자리를 이으며 효문왕孝文王이 되었지만 겨우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나라로 돌아온 자초가 장양왕莊襄王으로 바통을 넘겨받았다. 욕망을 향해 내닫던 여불위의 치밀한 셈법이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일찍이 찬밥신세로 조나라 한단에서 곤궁한 세월을 보낼 때, 자초는 여불위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며, 그대의 계책대로만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하겠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장양왕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았다. 게다가 문신후文信侯로 봉하고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내렸다. ‘천금’은 백배, 천배, 만 배를 넘어 계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숫자로 곱셈하며 불었다. 자리에 오른 지 세 해 뒤, 장양왕이 세상을 떠났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영정이 뒤를 이었다. 영정은 제후국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이면서 또한 통일 제국 진나라의 시황제 아닌가. 영정은 여불위를 높여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고 불렀다.
욕망이 절제를 제치며 위로 올라설 때, 바로 그때 불행의 씨는 싹튼다. 여불위도 그러했다. 어린 군주 영정의 눈을 피해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는 식객을 포함하여 하인까지 모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가 남몰래 정을 나눈 태후는 누구인가? 한단에 온 장사꾼 여불위가 얻었던 첩실 조희趙姬였다. 그리고 그녀의 미모에 넋을 앗긴 자초가 떼를 쓰며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여불위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여자 아닌가. 여불위는 ‘사 둘 만한 귀한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하여 자초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잠시「여불위열전」의 한 부분을 데려온다.
여불위는 한단에서 얻은 여러 첩 가운데 잘 생긴 데다 춤까지 잘 추는 여자와 함께 살았는데, 그녀가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초는 여불위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몸을 일으켜 여불위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그녀를 달라고 했다. 여불위는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집안 재산을 다 기울여 자초를 위해 힘쓰는 것은 사 둘 만한 귀한 물건을 손에 넣으려는 데 있다는 생각에 마침내 그녀를 자초에게 올렸다. 그녀는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숨기고 만삭이 되어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는 드디어 이 여자를 부인으로 세웠다.
呂不韋取邯鄲諸姬絶好善舞者與居, 知有身. 子楚從不韋飮, 見而說之, 因起爲壽, 請之. 呂不韋怒, 念業已破家爲子楚, 欲以釣奇, 乃遂獻其姬. 姬自匿有身, 至大期時, 生子政. 子楚遂立姬爲夫人.
사마천은 제후국 진나라의 마지막 군주이면서 통일 제국 진나라의 시황제 영정의 친아버지는 바로 여불위라고 이른다. 진위를 둘러싼 견해는 분분하지만 적어도「여불위열전」은 자초에게 조희를 올리기 전에 이미 임신 중이었음을 여불위가 알았다고 기록한다.
상식은 많은 사람들이 두루두루 그렇게 생각하며 타당하다고 믿는 앎이다. 이런 점에서 여불위는 상식 밖 저 멀리 존재했던 인물이다. 아무리 첩실이라지만 자기 아이를 가진 여자를 남에게 올렸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 보자면, 여불위는 다 가진 사나이였다. ‘천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을 손에 쥐었고, 집안에는 식객을 포함하여 하인이 1만 명이 넘었다. 이때, 바로 이때 물러났어도 불행한 끝장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린 군주 영정도 늘 어린 상태로 머물러 주지 않았다. ‘중부’라 불렀던 여불위가 자기 어머니와 벌이는 음란한 모습을 누군가는 귀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달콤한 말 한 마디로 권력을 손에 쥐려는 이는 궁궐 안 곳곳에 있었다,
-셈 빠른 장사꾼의 끝장
어느 날, 여불위의 정수리에 찬물 한 동이가 쏟아졌다. 등골이 오싹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후와 벌이고 있는 음란한 행동을 끝내지 않으면 큰 재앙이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 으스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큰 남자를 찾았다. 노애嫪毐라는 사나이를 찾아낸 여불위는 셈 빠른 장사꾼이 되어 계책 하나를 생각해 냈다. 당시 남성을 제거하는 형벌에 처하도록 노애를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꾸미고, 다시 이를 맡은 관리를 매수하여 수염과 눈썹을 뽑아 환관처럼 만든 뒤 태후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이는 4백여 년 뒤, 당唐 나라 때, 천금공주千金公主가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잘 보이기 위해 풍소보라는 그것이 큰 사내를 진상하며 머리를 깎아 승려로 만든 사건과 겹친다.
태후는 노애와 깊은 사랑에 빠지며 아들도 둘이나 낳게 되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 했던가, 아무리 꼭꼭 숨어도 머리카락 한 올 때문에 들통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왕이 세상을 뜨면 우리 아들이 대를 잇게 합시다.’
노애가 태후와 함께 이런 모의를 했다는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게다가 상국 여불위도 이 일에 연관이 있음을 알았다. 시황제는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가 낳은 아들 둘도 죽였다. 그렇다면 상국 여불위는? 선왕을 섬긴 공로를 생각하며 목을 내리지 못했다고「여불위열전」은 기록하고 있으나 1만 명이 넘는 그의 사인들의 힘이 우선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봉지 하남에 내쳐진 여불위에게 빈객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시황제는 그를 없애기로 마음을 굳혔다. 혹시 변란을 꾀할세라 두려웠기 때문이다.「여불위열전」에서 그의 마지막을 본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하남 땅에 봉하고 식읍 10만 호를 내렸단 말이오?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린단 말이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蜀 땅으로 옮겨 사시오!”
여불위는 스스로 점점 더 옥죄어 옴을 느꼈다. 그리고 죽음을 당할세라 두려워하며 짐주鴆酒를 마시고 죽었다.
“君何功於秦? 秦封君河南, 食十萬戶. 君何親於秦? 呼稱仲父. 其與家屬徙處蜀!”
呂不韋自度稍侵, 恐誅, 乃飮鴆而死.
여불위의 한평생은 욕망을 채우는 일로 시작되고 끝났다. 욕망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욕망하다가 끝내는 불행한 결말을 맞았던 이가 어디 한둘인가. 이로부터 530여 년 뒤, 서진西晉의 개국공신 석포石苞의 여섯째아들 석숭石崇도 재물을 향해 한껏 부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불행한 끝장을 맞는다.
역사는 전진하는가, 아니면 같은 틀의 비슷한 반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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