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거열車裂된 밑돌-상앙商鞅

촛불횃불 2022. 4. 17. 09:16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

 

 위 나라 서얼 공자 상앙商鞅이 위 나라로 가서 그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痤를 섬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품은 욕망이 남달랐던 그에게 위 나라는 그의 뜻을 널리 펼치는 데 더없이 좋은 나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위나라는 전국시대 여러 나라 가운데 강국이었다. 이 나라 재상 공숙좌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관장하는 집사의 자리에 상앙을 앉혔다. 이는 그의 능력에 대한 큰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상앙

 당시 위나라 군주는 혜왕,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흔히 양혜왕梁惠王으로 불리는 그는 춘추시대 군주처럼 패자를 꿈꾸는 야심만만한 임금이었다. 어느 날, 혜왕은 깊은 병으로 일어날 가망이 없는 재상 공숙좌를 찾아 이 나라를 이끌 재상으로 적합한 인물의 천거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공숙좌는 상앙을 천거했다. 상앙의 나이 서른을 이제 막 넘겼을 때였지만 남보다 빼어난 그의 재능을 익히 알았기에 강력히 천거했지만 혜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상군열전商君列傳을 펼친다.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주위를 물리치고 이렇게 아뢰었다.

 “왕께서 상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반드시 죽여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십시오.”

왕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王且去, 座屛人言曰 : “王卽不聽用鞅, 必殺之, 無令出境.” 王許諾而去.

 

 혜왕이 돌아가자 공숙좌는 상앙을 불렀다. 그리고 혜왕과 주고받은 말을 그대로 알리며 빨리 위나라를 떠나라고 일렀다그러나 상앙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되받았다. 상군열전이다.

 

 저 왕께서 어르신 말씀을 듣고도 저를 쓰지 않았는데, 또 어찌 어르신 말씀을 들어 저를 죽이겠습니까?”

 그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彼王不能用君之言任臣, 又安能用君之言殺臣乎?“ 卒不去.

 

양혜왕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상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들이 위기라고 생각할 때 의연할 수 있는 마음도 또한 용기였다. 얼마 뒤, 공숙좌가 세상을 떠났다. 상앙은 진 나라로 갔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이제 막 자리에 오른 효공이 내린 포고령을 들었던 것이다. 포고령의 마지막 문장만 여기에 옮기기로 한다.진본기秦本紀이다.

 

 빈객과 여러 신하 가운데 진나라를 강성하게 해줄 뛰어난 계책을 내놓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나 또한 관직을 높여주고 그에게 땅덩어리를 나누어 줄 것이다.

賓客群臣有能出奇計强秦者, 吾且尊官, 與之分土.

 

 높은 관직과 손에 넣을 땅덩어리야말로 재능 있는 젊은이 상앙의 욕망이 목표로 하는 지점이었다.

 

전국시대 초기 형세도

 

두 욕망이 만나는 곳

 

 진나라는 춘추시대 초엽만 해도 서쪽의 변방이었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여러 제후국들이 각자의 힘을 바탕으로 서로 싸우며 무력으로 정벌하고 다투어 합병할 적에도 그 흔한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서쪽 편벽한 지역에 위치했기에 눈을 부라리는 제후국도 드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목공穆公이 이룩한 영광이 있었다. 기원전 361, 군주의 자리에 오른 효공은 2백 몇 십 년 전 그의 조상 목공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가득했다.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계책을 가진 인재가 절실했다. 효공이 내린 포고령에는 욕망 달성을 위한 간절함이 절절히 넘쳤다.

 서쪽 진나라를 찾은 상앙은 먼저 경감景監을 찾았다. 당시 궁중에서 일하는 환관 가운데 우두머리를 태감太監이라고 일렀는데, 경감은 경 씨 성을 가진 태감이었다. 그는 많은 환관 가운데 우두머리이기에 자연스레 군주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상앙은 그의 속셈대로 경감을 통해 효공에게 유세할 수 있는 짬을 얻어냈다.진본기는 상앙의 개혁안을 효공이 좋소.’, 이렇게 한 마디로 승낙한 것으로 기록했지만상군열전은 상앙이 효공을 세 번 알현하여 자기 뜻을 펼치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효공 앞에서 유세하는 상앙

 첫 번째 만남에서 상앙은 제도帝道’, 요순堯舜의 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길을 역설했다. 동쪽으로 나아가서 더 많은 땅덩어리를 차지할 욕망으로 조급했던 효공이 귀를 기울일 리 없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상앙은 왕도王道’, ··, 이 삼왕의 길을 힘써 아뢨다. 왕도를 실현하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한데, 자기 살아생전 욕망을 실현하고 싶었던 효공이 고개를 끄덕일 리 없었다. 효공은 이제 다시는 상앙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경감의 주선으로 세 번째 효공을 알현한 상앙은 패도覇道를 힘주어 펼쳤다. 신속하게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맞붙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두며 다른 제후국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겸병하는 길, 이것이 곧 상앙이 역설한 패도였다. ‘효공이 상앙 앞으로 무릎을 자꾸 옮기며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라고상군열전은 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패도를 통하여 전국시대 다른 제후국을 겸병하여 자기 권력을 극대화하기, 이것이 곧 효공의 욕망이 다다라야 할 목표였다. 일찍이 한비자는 무릇 유세의 어려움은 상대방의 속셈을 잘 알아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방법을 상대방에게 적응시키는 데 있다.라고 그의세난에서 일렀다. 상앙은 세 번 만에 상대방의 속셈을 꿰뚫으며 자기 욕망을 실현시킬 디딤돌을 마련했다. 효공과 상앙, 이 두 사람이 만나 손을 맞잡은 곳은 둘의 욕망이 뜻을 같이한 곳이었다.

 

줏대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 ‘줏대에 대한 풀이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쓸개줏대를 대신하지만 두 낱말이 완전한 교집합을 이루지는 않는다. 상앙은 줏대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군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상앙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답은 없다이다. 그에게는 오로지 욕망뿐이다. 높은 자리와 큰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것, 이런 욕망의 달성을 위해 주장이나 의견 따위는 있어도 없다. 군주의 욕망에 맞춘 주장이나 의견만이 그의 주장이나 의견이었다.

 전국시대 여러 제후국의 군주를 찾아다니며 권력을 탐하던 책사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였다. 서류 보관함에 몇 가지 을 넣어두고 새로 부임할 장관의 입맛에 맞추어 그 중 한 가지 을 내놓아 신임을 얻으며 자리보전하는 관리가 오늘도 있으니, 역사는 비슷한 틀의 무한 반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리산은 그의전국칠웅에서 이런 책사의 모습을 일러 이규李逵를 만나면 날이 넓고 평평한 큰 도끼를 내놓고, 노달魯達을 만나면 선장禪杖을 꺼내고, 송강松江을 만나면 강호의 의기를 이야기한다.’라며 비꼬았다. 입은 있지만 입장은 없고 방법은 있지만 의견은 없는 이, 상앙의 모습이 꼭 이러했다.

 

진효공

 효공은 상앙의 뜻에 따라 큰일을 추진하려고 마음을 굳혔지만 법을 바꾸는 데는 또 다른 결심이 필요했다. 세상 사람들이 새 법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비방할 일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상앙이 바꾸려는 법을 두고 조정에서는 토론이 벌어졌다. 명문세족으로 대신의 자리에 있던 감룡甘龍과 수구파의 대표적인 인물 두지杜摯가 변법 시행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미 시행하고 있는 법에 관리나 백성들이 모두 익숙하여 거침이 없는 데 굳이 바꾸어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들이 내세운 이유였지만 새로 만들어 시행할 법이 이들의 이익을 건드릴 게 분명했던 것이다. 이때, 상앙이 내세운 논거를 한 번 보자. 역시상군열전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지 아니하기에 자기 나라에 편리하면 옛날 법을 본받지 않아도 됩니다. 옛적, 탕왕과 무왕은 옛 법을 본받지 않았어도 왕 노릇을 하였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은 옛 예법을 바꾸지 않았어도 망했습니다. 옛 법을 반대한다고 비난할 일도 아니고, 예법을 따른다고 칭찬할 일도 아닙니다.”

 “治世不一道, 便國不法古. 故湯武不循古而王, 夏殷不易禮而亡. 反古者不可非, 而循禮者不足多.”

 

논전을 펼치는 상앙

 

 논쟁을 지켜보던 효공은 딱 한 마디, ‘옳소이다’, 이렇게 상앙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미 마음속에 상앙의 변법을 따르기로 셈이 서 있었던 것이다.

 

널리 공포한 변법變法

 

 법률 고치기, 그리고 고친 법률로 제도를 바꾸어 묵은 방법이나 관습을 새롭게 만들기는 권력을 손에 쥐며 자리에 오른 군주라면 누구나 시도할 만큼 일반적이었다. 변법, 개혁, 변혁, 혁신, 유신, 그리고 오늘 이 땅의 적폐청산 등은 모두 이름만 달리할 뿐이지 그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시대 초엽, 나라 문후 곁에 기용된 이회李悝가 추진한 변법, 초나라 도왕이 영윤으로 임명한 오기가 밀고 나아간 변법, 제나라 위왕威王이 상국으로 맞아들인 추기鄒忌가 앞에서 끈 변법, 한나라 소후昭侯의 지지를 받으며 신불해申不害가 처리하며 끌고 나아간 변법, 그리고 진나라 효공이 좌서장左庶長으로 임명한 상앙이 추진한 변법. 이들 여러 변법에서 공통되는 점은 세습 귀족이 그 동안 누려온 특권의 제한이었다.

 상앙이 효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추진한 변법의 주요 내용은 먼저 정전제井田制의 폐지였다. 국유를 빌미로 사실상 귀족들이 소유했던 토지 제도를 없애고 개인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라가 토지의 사유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매매도 허용했다. 게다가 분봉제分封制를 없애고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을 강화했다. 또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열 집 또는 다섯 집을 한 조로 묶어 서로 잘못을 감시하도록 하고 그 중 한 집이 죄를 지으면 한 조로 묶인 집들이 모두 벌을 받도록 했다. 여기에 더하여 군대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공의 크기에 따라 벼슬을 내리도록 했으며 공을 세우지 못한 이는 존경받을 수 없도록 했다.

 상앙은 백성들이 법령을 믿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믿음이야말로 나라를 이루는 데 가장 큰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공자의 이야기를 상앙도 잘 알았던 듯하다. 함께 보기로 하자.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모은논어論語중에서안연편顔淵篇의 한 부분을 연다.

 

사목지신徙木之信

 

 자공子貢이 나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하여 여쭙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사 시설이나 장비를 넉넉히 준비하는 것, 그리고 백성들이 통치자를 믿도록 하는 것이니라.”

 자공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사 시설과 장비이니라.”

 자공이 또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이 또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둘 중 어떤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이니라. 예로부터 모두 죽음이 있지만,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나라는 존재할 수 없느니라.”

 子貢問政, 子曰 :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 “必不得已而去, 于斯三者何先?” : “去兵.” 子貢曰 : “必不得已而去, 于斯二者何先?” :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상앙은 1백여 년 전, 공자와 그의 제자 자공이 나눈 이 이야기를 깊이 새겼던 듯하다. 상앙은 변법을 널리 시행하기에 앞서 도성 저잣거리 남쪽 문 앞에 세 길이나 되는 막대기를 세워 놓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이 막대기를 북쪽 문 앞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을 주겠노라고. 백성들은 힐긋 쳐다만 볼 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금을 50금으로 올리자 어떤 이가 속는 셈치고 북문으로 이 막대기를 옮겼다. 즉시 50금을 내렸다. 이어서 새로 만든 법령을 널리 공포했다.

 

거열車裂된 밑돌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강국으로 바꾸었다. 전쟁터에서 베어온 적의 머리로 공훈을 헤아렸기에 잔인한 나라가 되었지만 다른 제후국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나라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상앙은 법의 시행에 너무 차가웠다. 특권을 누려왔던 세습 귀족들이 효공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상앙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지만 이는 진심이 아니었다. 이들은 남몰래 새파랗게 칼을 갈았다. 새 법령이 시행된 지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무렵, 태자가 법을 어겼다. 효공의 뒤를 이을 태자였기에 형벌을 가할 수 없었던 상앙은 태자의 태부太傅였던 공자건公子虔을 처벌했다. 또 태사太師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던 형벌, 곧 묵형을 내렸다. 그 몇 년 뒤, 공자건이 또 법을 어기자 이번에는 공자건의 코를 베어내는 벌을 내렸다. 이들은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복수할 날을 날이면 날마다 손꼽았다.

 진나라가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우뚝 서며 강국이 된 것은 오로지 상앙의 변법 때문이었다. 나라 출신이었기에 위앙衛鞅이었던 이 양반이 상앙이 된 건 그의 공적을 인정한 효공이 그에게 내린 봉지가 상과 오 땅이었기 때문이다. 나라 군주 혜왕이 상앙을 재상으로 쓰라는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두고 한탄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거열형 집행 장면

 상앙이 진나라 재상이 된 지 10년쯤 지난 때였다. 조량趙良이라는 자가 상앙 앞에 나타났다. 그는 친구가 되자는 상앙의 청을 물리치면서 간절히 일렀다. 봉지로 받은 상과 오 땅을 돌려주고 전원으로 돌아가야 오래 살 수 있다며 쓴 말을 올렸지만 상앙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상앙은 덕보다는 힘을 믿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앙이 누린 힘은 그가 만든 힘이라기보다 효공이 그에게 내린 힘이었다. 힘의 원천인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앙의 손아귀에 쥐였던 힘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사가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르니 혜문왕惠文王이다. 헤문왕이 태자였던 시절, 자기 잘못으로 형벌을 받은 공자건이 가만있지 않았다. 의형劓刑을 받아 코를 베인 뒤 복수의 칼날을 새파랗게 갈고 있던 그가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상앙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혜문왕이 관리를 보내 상앙을 체포하게 했지만 상앙은 이를 미리 눈치 채고 변방으로 몸을 피했다. 변방의 어느 여관에 들었지만 묵을 수 없었다. 여행증을 가지지 못한 상앙을 여관 주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앙이 만든 변법에는 연좌되어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로 도망했지만 그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자기의 봉지 상으로 돌아와 병사를 동원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만든 법은 이제 그를 옥죄는 족쇄였다. 나라 맹지黽池가 상앙에게 최후의 땅이 되었다. 기원전 338년이 그에게는 마지막 해였다. 물론 효공의 마지막 해와 그대로 겹칠 수밖에 없었다. 거열형, 찢어진 그의 주검은 나라 안 곳곳을 돌며 저잣거리에 내보여 백성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상앙의 집안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상앙의 <상군서>

상앙은 수구세력의 반격으로 온 몸이 다섯 조각으로 찢기는 형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변법은 철저하게 성공했다. 그가 살아생전에도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효문왕은 변법 자체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진나라가 전국칠웅 가운데 최후의 일웅이 되는 데 밑돌이 되었다. 그는 그가 만든 변법 때문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가 만든 변법은 1백여 년 뒤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 왕국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쓰러진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 밑돌이 되었던 것이다. 두 욕망이 만나 이룬 변법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