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우리를 한껏 압도하는 엄청나고 굉장한 무대이다. 등장인물의 숫자만 해도 4천여 명, 이들이 종횡무진 활동하는 범위도 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중원을 넘어 동서남북 주변 국가까지 포섭한다.
지난 네 해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00도서관’에서 학인들과 함께 사마천의 『사기』를 강독하면서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받으며 당시의 역사 인물을 되살리느라 자못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모임을 이끌면서 특별히 여인들의 삶에 눈길을 주었고, 그 결과 오늘 ‘00필 선생이 『사기』에서 만난 여인’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곁에 있었던 여인들이 궁금했지만 『사기』에서는 정작 찾을 수 없었다. ‘열전’ 마지막 편「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도 그의 가계와 아버지의 모습은 비교적 구체적이었지만 내가 알고 싶은 그의 어머니와 자식의 모습은 없었다.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거작을 모범으로 삼아 나온『한서』에 외딸의 모습이 편린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 꼭지는 이를 바탕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다.
사마천의『사기』130 편 가운데 열 편의「표表」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록한 도표이다. 여기에는 연표年表뿐만 아니라 월표月表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리저리 얽히고설켜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이 ‘표’ 안에서 시대적인 선후 관계와 맥락을 한 번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 인물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건과 관계를 맺었는지 가로세로 맞추어 밝히는 데 쏟은 사마천의 뜨거운 열정에 가려진 뼈를 깎는 고통이 ‘표’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오늘 사마천의 정확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다. 중국 쪽 자료에도 그의 생년과 몰년 앞에서 각각 ‘약約’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약約’은 ‘대략’, ‘어림잡아’라는 뜻이다. ‘어느 왕 몇 년에 어느 나라 장수 아무개가 어느 성을 공격하여 몇 월에 함락시켰다.’라고 기록할 만큼 빈틈이 없었던 그였지만 자신의 생몰연대는 역사에 남기지 않았다.
‘열전’ 마지막 편「태사공자서」에는 사마 씨의 내력, 아버지 사마담司馬談과 자신의 이력, 아버지의 제법 긴 유언, ‘이릉李陵의 화’를 입고 감옥에 갇히고 발분하여『사기』를 저술한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우필 선생이 ’사기‘에서 만난 여인』을 집필하면서 정작 궁금했던 점은 사마천 곁을 함께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어머니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사적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그에게 외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자못 행복하게 만든다. 동한東漢의 역사학자 반고班固 덕분이다.
사마천이 불멸의 거대한 작품 『사기』 52만 6천 5백 자를 죽간에 한 자 한 자 쓸 때에 그의 외딸도 곁에서 아버지가 수집한 사료를 정리하는 작업을 도왔을 것이다. 사마천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없었기에 죽간에 한 자 한 자 붓 끝에 먹물 찍어 쓸 수밖에 없었다.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기까지는 사마천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150년도 더 기다려야 했다. 당
시 죽간은 보통 너비 0.6cm에 길이가 23~27cm, 두께는 0.2cm였다. 이 죽간 한 편에 들어가는 글자의 수효는 대체로 30자 남짓이었다. 대나무 조각의 밀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죽간 한 조각의 무게는 대체로 3~4g 정도이다. 만약 한 조각의 죽간에 35자를 넣었다면, 52만 6천 5백 자를 기록하는 데 필요한 죽간은 거의 1만 5천 1백 조각이다. 이를 다시 무게로 계산하면 어림잡아 50~60kg에 이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를 똑같이 두 부 만들었다니 그 열정과 피땀이 보이는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 가운데 한 부를 사마천의 외딸은 양창楊敞의 집으로 옮겨 깊이 숨겼다. 당시 양창은 사마천의 외딸과 약혼한 사이였다. 사마천은「항우본기項羽本紀」에 양창의 증조부 양희楊喜를 잠깐 등장시킨다. 양희는 초한전쟁의 막바지에 해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항우의 몸뚱이 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적천후赤泉侯에 봉해진 인물이다. 세월이 흘러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의 시대에 이르러 사마천은 자신의 외딸로써 이 집안과 사돈 관계를 맺는다.
사마천의 외딸과 양창의 삶의 편린이 동한의 역사학자 반고가 편찬한『한서』「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에 기록되어 있다. 좀 길긴 하지만 이 부분을 다 가져온다.
이듬해, 소제昭帝가 세상을 떠났다. 창읍왕이 여러 대신들의 부름을 받아들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음란하고 무도하여 대장군 곽광霍光과 거기장군 장안세張安世가 황제를 폐위시키고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올리기로 남몰래 모의했다. 모의가 이미 확정되자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시켜 이 사실을 양창楊敞에게 알리도록 했다. 양창이 듣고 자못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등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그저 입으로는 ‘예, 예’라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전연년이 몸을 일으켜 의복을 갈아입으려고 경의실로 가자 곁채에 있던 양창의 부인이 급히 나와 양창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국가의 대사입니다. 지금 대장군께서 벌써 계획이 서서 대사농 전연년을 시켜 당신께 알렸습니다. 당신이 급히 응답하여 대장군과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지 않으시고 머뭇머뭇 결정을 미루시면 먼저 주살될 것입니다.”
전연년이 경의실에서 돌아오자 양창 부부는 그에게 대장군의 결정에 동의한다고 일렀다. 그리고 대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모시어 조정의 대신과 함께 창읍왕을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옹립했다. 선제가 자리에 오른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양창이 세상을 떠나자 경후敬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明年, 昭帝崩. 昌邑王徵卽位, 淫亂, 大將軍光與車騎將軍張安世謀欲廢王更立. 議旣定, 使大司農田延年報敞. 敞驚懼, 不知所言, 汗出洽背, 徒唯唯而已. 延年起至更衣, 敞夫人遽從東箱謂敞曰 : “此國大事, 今大將軍議已定, 使九卿來報君侯. 君侯不疾應, 與大將軍同心, 猶與無決, 先事誅矣.” 延年從更衣還, 敞, 夫人與延年參語許諾, 請奉大將軍敎令, 遂共廢昌邑王, 立宣帝. 宣帝卽位月餘, 敞薨, 諡曰敬侯.
이 장면에 등장하는 양창의 부인이 바로 사마천의 외딸이다. 그녀가 남편 양창이 머뭇머뭇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며 겁에 질려 있을 때 거사에 동참하도록 이르는 짧은 말 속에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담력과 식견이 대단함을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의 외딸은 양창에게 두 아들을 안겼다. 맏아들 양충楊忠과 작은아들 양운楊惲이다. 사마천의 외딸이 혼례를 치르기 전에 양창의 집에 옮겨 깊이 감추어 두었던『사기』는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뒤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빛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작은아들 양운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 곧 사마천의 외딸은 일찍이 시댁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사기』를 꺼내어 아들에게 읽혔다. 양운은 이 글을 읽으며 그 내용에 깊이 빠져들며 손에서 책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감격해마지 않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하곤 했다. 서한의 선제 때, 양운은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졌다. 그는 당시 조정이 맑고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20여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자기 외할아버지의 작품이 이제 햇빛을 볼 때가 왔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그는 황제에게『사기』를 바쳤다. 비로소 이 위대한 작품은 공개적으로 발간되었다. 이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이 훌륭한 역사 서적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사마천의 이 외딸의 이름이 사마영司馬英이라고 특정한 글을 포털사이트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역사서에서 고증할 길은 없다. ‘영英’이 ‘꽃’이요 ‘재능이나 지혜가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글자이니 전고는 찾을 수 없으나 참으로 딱 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사기』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커다란 한 부분이 뚝 잘려나간 텅 빈 자리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하다.
작은 사족 하나. 사마천의 이 외딸은 중국의 명문 홍농弘農 양씨楊氏의 일세조모一世祖母이다. 수隋 나라 개국 황제 양견楊堅이 바로 이 집안 출신이다. 그러고 보면, 사마천은 하나밖에 없는 외딸을 통해 이 세상에 비로소 부활할 수 있었다. 외딸이 낳은 작은아들을 통해 그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사기』가 세상에 빛으로 부활했고, 수많은 외손들도 빛나는 별로 이 세상을 수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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