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분수를 안 사나이-도양열屠羊說과 범려范蠡

촛불횃불 2022. 6. 6. 13:04

 초나라 소왕이 나라를 잃어버리자 도양열은 소왕을 따라 나라 밖으로 몸을 피했다. 소왕이 초나라로 돌아와 자기를 따른 이들에게 상을 내리려고 했다. 도양열에게도 상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도양열은 이렇게 아뢨다.

 “당시 대왕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때, 저는 짐승 잡는 직업을 잃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를 찾으시고 저 또한 제 직업을 되찾았는데 무슨 상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楚昭王失國, 屠羊說走而從于昭王. 昭王反國, 將賞從者, 及屠羊說. 屠羊說曰 : “大王失國, 說失屠羊 ; 大王反國, 說亦反屠羊. 臣之爵祿已復矣, 又何賞之有!”

장자莊子』「양왕편讓王篇

 

 범려가 간언하여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며, 다툼은 일 가운데 제일 못난 것입니다. 남몰래 모의하며 덕을 거스르고, 흉기 쓰기를 좋아하여 자신을 제일 못난 것에 시험하는 일을 하늘도 금하거늘 나선다 해도 이로움이 없사옵니다.

 

 范蠡諫曰 : “不可. 臣聞兵者凶器也, 戰者逆德也, 爭者事之末也. 陰謀逆德, 好用凶器, 試身於所末, 上帝禁之, 行者不利.

사기史記』「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증국번

 증국번曾國藩은 청나라 말기의 중신으로 상군湘軍을 세우고 통솔한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싸움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곧바로 친아우 증국전曾國荃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이 편지 가운데 그가 마음먹고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함께 보기로 하자.

 

한손엔 전공 기록 또 한손엔 헐뜯는 글,

사람 사는 곳 어디나 위험이 도사렸네.

고개 숙여 도양열에게 배워야 하리니,

온갖 일 허공을 지나는 뜬구름이라네.

 

左列鐘銘右謗書,

人間隨處有乘除.

低頭一拜屠羊說,

萬事浮雲過太虛.

 

 

 증국번은 당시 청나라 군대를 오로지할 만큼 군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싸움터에서 세운 공적이 대단하여 나라님까지 흔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분수를 헤아려 행동할 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냉정할 만큼 앞뒤를 찬찬히 살피며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온 마음을 다했다. 그는 자희태후, 곧 서태후의 손에는 자신의 전공이 기록된 문서만이 아니라 자기를 헐뜯는 갖가지 비방 문서도 있다는 것을 벌써 내다보았던 것이다.

 그는 스물여덟 글자밖에 안 되는 짤막한 칠언절구를 편지에 덧붙여 어느 때라도 큰 화가 이마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인즉 분수에 맞는 삶을 살라고 동생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천 몇 백 년 전 춘추시대의 인물 도양열을 본보기를 삼으라고 구체적으로 거명까지 한다. 시의 내용으로 볼 때, 증국번은 도양열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은 지 오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양열屠羊說은 춘추시대 초나라 소왕昭王 때 인물이다. 이름만 봐도 이 양반이 짐승을 도살하는 직업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자기 일에 만족하며 기쁨을 누렸던 것 같다. 어떻든 그는 전국시대보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춘추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춘추시대도 말기에 이르면 창날이 번쩍이며 피비린내를 풍기던 전국시대의 냄새가 조금씩 번지기 시작했다. 기록으로 남아 전하는, 소왕이 싸움터에서 세운 공적을 놓고 논공행상을 벌인 이야기도 춘추시대가 결코 평화만이 계속된 시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초나라는 춘추시대에도 남방에서 큰 땅덩어리를 차지한 대국이었다. 이런 큰 나라를 다스리던 소왕도 국경을 맞댄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몸을 피해야 할 때가 있었다. 이때, 소왕 곁을 지키며 고락을 함께 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도양열이었다. 어려움을 지나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소왕은 마땅히 도양열에게 세운 공에 맞갖은 상을 내리려고 했다.

 

초소왕

 “제게 무슨 상을 내리신단 말씀입니까? 대왕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적에 저도 양을 잡는 제 일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대왕께서 나라를 되찾자 저도 양을 잡는 제 일을 되찾았습니다. 저도 잃었던 벼슬과 녹을 되찾은 것입니다.”

 도양열은 이렇게 말하며 소왕이 보낸 사자를 물리쳤다.

 돌아온 사자의 보고를 받은 소왕은 마음이 불편했다.

 “당장 이곳으로 데리고 올지니라, 내 그에게 큰 벼슬을 내릴지니라.”

 소왕은 사자를 다시 도양열에게 보냈다. 그러나 도양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도 잘 압니다, 대왕께서 제게 내리려는 벼슬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많은 봉록을 받을 수 있는지. 그러나 제가 어찌 높은 자리에 두터운 봉록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높은 벼슬을 함부로 내린다는 악명을 얻게 할 수는 없기에 저는 한사코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가 굴러온 명성을 물리치겠는가? 또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존경과 찬양을 걷어차겠는가? 그러나 도양열은 굴러온 부귀와 영화를 오히려 제 품에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눈앞에 바로 보이는 명리를 탐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알았다. 그는 즐거움이 극에 다다르면 슬픔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진즉 깨달은 자였다.

제가 양을 잡는 백정의 일을 계속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양백열은 끝내 벼슬도 녹봉도 받지 않았다. 나라에서 정한 규정에도 어긋나게 녹봉을 내린다면 임금의 명예에도 손상을 입힐 것이 분명한데다 자신의 분수에도 맞지 않다는 걸 잘 헤아렸던 것이다.

 

범려

 그런데 만약 소왕이 한사코 그를 데려다 삼공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과 거의 같은 시대에 범려范蠡라는 인물의 행적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그는 춘추시대 오나라와 월나라가 힘을 겨루며 맞서던 시대에 월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왕 부차夫差를 무릎 꿇린 정치가요 군사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월왕 구천이 춘추시대 오패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에는 책사로서 범려가 이룬 공적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범려는 서시西施와 함께 자그마한 배에 몸을 싣고 월나라를 떠났다. 그는 권력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슬기도 있었다. 그는 이제 서시와 함께 상업에 뛰어들어 큰 성취를 이루었다. 게다가 상업으로 높게 쌓은 재물을 차지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운 이웃에게 흔쾌히 나누어줄 줄도 알았다.

 

곤극昆剧 《 范蠡와西施 》의 한 장면

 사마천이사기』「화식열전에서 첫 번째로 내세운 인물도 바로 범려였다. 사마천은 결코 허투루 인물을 다루지 않았다. 화식열전에 뽑아 올린 쉰두 명의 상인도 예사 상인이 아니었다. 사마천은 바른 길을 따라 재물을 모을 줄 아는 데다 베풀 데 베풀 줄 아는 이들만 골라 뽑았던 것이다.

 분수를 알았던 도양열은 자기가 가야할 길을 알았기에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범려도 제 갈 길을 갔기에 상성商聖으로 높이 일컬어지며 영원히 사는 길을 걸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골라 갈 줄 아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제게 이익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은 이 많다. 그러나 살얼음처럼 각박한 세상에 자기가 거둔 이익을 어려운 이에게 흔쾌히 나눌 줄 아는 인물도 없지 않다. 이런 인물이 있기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