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백등산白登山에 갇힌/가둔 군주-유방劉邦 & 묵돌冒顿

촛불횃불 2022. 6. 12. 09:15

 백등산白登山은 지금의 마포산馬鋪山, 산시성山西省 북쪽 네이멍구 자치주와 접경을 이루는 다퉁시大同市 동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00,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이곳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찬찬히 짚어 보자. 더하여 잠시 찾아온 평화도 한번 셈해 보자.

 

지금은 눈썰매장이 된 백등산

 

머리

 

 먼저고조본기부터 펼친다.

 

 고조 7,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韓王 을 공격했다. 한왕 신은 곧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모반했다. (그의 부장) 백토만구신白土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원래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토벌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 信因與謀叛太原. 白土曼丘臣, 王黃立故趙將趙利爲王以反, 高祖自往擊之.

 

 우선, 여기서 이르는 한왕 신, 곧 한신韓信으로 이름을 남길 만한 인물이 이 시대에는 둘이었음을 알아야겠다. 따라서 사마천은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하여 백등산 사건의 가까운 원인을 제공한 한신은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에서, 초한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사자성어로 이름난 한신은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다루고 있다.

 유방이 직접 이끈 32만 대군은 기세도 등등하게 흉노를 맞아 맞받아쳤다. 동곤銅輥(지금의 산시성 친현沁縣)에서 첫 승리를 거둔 유방은 승세를 타고 누번樓煩(지금의 산시성 닝우寧武) 일대까지 내달았다.

 

백등산 전투 시의도

 취하면 쓰러진다. ‘취하면쓰러진다사이에는 지난 뒤에 톺으면 놓쳐서는 안 될 요소들이 널려 있다. 추운 날씨에 내려쌓인 흰 눈이 그랬다. 이 경우 빠지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참모의 간언에도 열리지 않았던 최고지도자의 귀도 있다. 먼저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에서 한 구절을 가져온다.

 

 고조 7, 한왕韓王 이 한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이들을 무찔렀다. 진양晉陽에 이르렀을 때, 한신이 흉노와 함께 한왕조를 친다는 소식을 들은 고조는 크게 노여워하며 사신을 흉노로 보내 내막을 파악했다. 흉노는 싸움에 능한 건장한 병사와 살찌고 힘센 소와 말을 감추어 둔 채 늙고 약한 병사와 말라빠진 짐승만 겉으로 내보였다. 사신들이 열 명이나 다녀왔는데, 모두 흉노를 칠만 하다고 말했다. 황제가 다시 유경劉敬을 사신으로 흉노에 보냈다. 그가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두 나라가 맞붙을 때는 서로 자신의 장점을 크게 드러내 보인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가 흉노에 가서 보니 오로지 여위어 비쩍 바른 가축과 늙고 약한 병사들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는 일부러 자기의 단점을 드러내 보였다가 숨겨둔 기병奇兵으로 승리를 거머쥐려는 게 분명합니다. 저는 흉노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황제는 유경의 이 말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며 이렇게 꾸짖었다.

제나라에서 잡혀온 포로 놈이렷다! 두 입술을 놀려 벼슬을 얻더니 이제는 허튼소리로 우리 대군을 막는구나.”

 

 漢七年, 韓王信反, 高帝自往擊之. 至晉陽, 聞信與匈奴欲共擊漢, 上大怒, 使人使匈奴. 匈奴匿其壯士肥牛馬, 但見老弱及羸畜. 使者十輩來, 皆言匈奴可擊. 上使劉敬復往使匈奴, 還報曰 : “兩國相擊, 此宜誇矜見所長. 今臣往, 徒見羸瘠老弱, 此必欲見短, 伏奇兵以爭利. 愚以爲匈奴不可擊也.” …… , 上怒, 罵劉敬曰 : “齊虜! 以口舌得官, 今乃妄言沮吾軍.”

 

 초한전쟁이 이어지던 다섯 해 동안 참모들의 말에 귀를 열어두던 유방이었다. 난세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의 개국 황제가 된 뒤, 고조 유방의 모습은 이렇게 달랐다. 닫힌 귀는 항상 패착을 예고한다. 이때, 유방의 경우도 이러했다.

 

고조 유방

 나라를 새로 세우기보다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가는 일이 더 어려운 법이다. 중원은 평정되었지만 국경 밖의 이민족은 나라 안의 형세 변화에 따라 무릎을 꿇었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을 들이대곤 했다. 역사가 그랬다. 그리고 패권을 다툰 영웅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나라 안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하여 국경을 맞댄 이웃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중국의 역사가 그랬다.

 

가운데 - 흉노의 지도자 묵돌 선우

 

 또 하나, 유방은 아버지 두만頭曼을 죽이고 자리에 오른 묵돌 선우에 대한 정보를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병법에 관한 학문의 세계에서 경전으로 꼽히는손자병법孫子兵法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3백 년, 유방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떤 전쟁에서도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는 말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 없다. ‘취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마련이고, 결과적으로 쓰러진다는 원칙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아니었다.

 

묵돌 선우 시기의 흉노(회색 부분)

 흉노는 중원 북쪽의 소수민족으로 물 찾아 초원 찾아 떠돌며 목축을 위주로 삶을 꾸렸다. 그들은 부족 단위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유목민족의 특수한 환경을 뛰어넘으며 힘을 하나로 모으는 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위의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 길게 국경을 맞댄 흉노의 판도까지 눈에 들어온다. 기원전 200, 당시 흉노의 선우는 묵돌이었다.흉노열전가운데 한 부분을 가져온다. 묵돌 선우의 됨됨이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묵돌이 자리에 올랐을 때, 동호東胡의 세력이 강성했다. 이들은 묵돌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두만 선우가 살았을 때 타던 천리마를 달라고 요구했다. 묵돌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이들은 모두 이렇게 입을 모았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인데, 주지 마십시오.”

 묵돌이 말했다.

 “이웃나라로 있으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소?”

 그리고는 곧장 천리마를 내주었다.

 얼마 뒤, 이들은 묵돌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사신을 보내 묵돌에게 연지閼氏 가운데 한 사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도 묵돌은 곁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모두 화를 내며 이렇게 입을 모았다.

 “무도합니다, 연지를 요구다니! 이들을 치기 바랍니다.”

 묵돌이 말했다.

 “이웃나라로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끼겠소?”

 그리고는 사랑하는 연지를 동호에 보냈다.

 동호의 왕은 날로 더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쳐들어왔다. 두 나라 사이에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 1천 리 남짓 있었는데, 두 나라는 각기 변방에 초소를 세워두고 있었다. 동호는 사신을 보내어 묵돌에게 이렇게 말했다.

 “흉노가 세운 초소 밖 버려진 땅은 당신들이 올 수 없는 곳이니 우리가 차지하겠습니다.”

 묵돌은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 가운데 어떤 이는 이렇게 아뢨다.

 “이곳은 버려진 땅이니 줘도 좋고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 말을 듣자 묵돌은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이거늘 어떻게 줄 수 있단 말이오?”

 묵돌은 땅을 주자고 한 자들을 모조리 베고 말에 올라 나라 안에서 뒤 늦게 따르는 자는 목을 내리겠다고 명령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서 동호를 습격했다.

 

 冒頓旣立, 是時東胡彊盛, 聞冒頓殺父自立, 乃使使謂冒頓, 欲得頭曼時有千里馬. 冒頓問群臣, 群臣皆曰 : “千里馬, 匈奴寶馬也, 勿與.” 冒頓曰 : “奈何與人隣國而愛一馬乎?” 遂與之千里馬. 居頃之, 東胡以爲冒頓畏之, 乃使使謂冒頓, 欲得單于一閼氏. 冒頓復問左右, 座右皆怒曰 : “東胡無道, 乃求閼氏! 請擊之.” 冒頓曰 : “奈何與人隣國愛一女子乎?” 遂取所愛閼氏予東胡. 東胡王愈益驕, 西侵. 與匈奴間, 中有棄地, 莫居, 千餘里, 各居其邊爲甌脫. 東胡使使謂冒頓曰 : “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 匈奴非能至也, 吾欲有之.” 冒頓問群臣, 群臣或曰 : “此 棄地, 予之亦可, 勿予亦可.” 於是冒頓大怒曰 : “地者, 國之本也, 奈何予之!” 諸言予之者, 皆斬之. 冒頓上馬, 令國中有後者斬, 遂東襲擊動胡.

 

묵돌 선우

 초한전쟁으로 북쪽을 돌아볼 틈이 없을 때, 중원의 북쪽, 흉노의 묵돌 선우는 각 부족을 통일하며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묵돌은 영민한데다 부하를 통솔하는 데 자못 과감했다. 흉노는, 중원에서 새로 전개된 후 전국시대를 끝내고 이제 나라를 세운 지 일곱 해밖에 안 된 고조 유방이 맞서기에는, 버거운 상대였다. 게다가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기원전 200, 당시 묵돌 선우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자리에 오른 지 아홉 해, 큰 판세를 읽는 데도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피도 펄펄 끓어오를 만큼 뜨거운 청년이었다. 이에 비해 유방은 진말의 혼란한 시기에 시작된 길고 긴 전쟁터에서의 삶을 이제 겨우 끝내고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나이도 쉰여섯, 당시의 잣대로 셈하면 이미 늙은이였다.

 

  마무리 - 화친공주和親公主로 맞바꾼 평화

 

 포위된 지 옹근 이레. 추위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배고픔은 더 큰 고통을 안겼다. 상황은 매우 위급했다. 이런 가운데 묵돌 선우가 새로 얻은 연지에게 빠져 아침저녁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는 진평陳平이었다.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의 한 부분을 함께 보자.

 

 바삐 행군하여 평성에 다다랐지만 흉노에게 포위당하여 이레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고제는 진평이 내놓은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선우의 연지에게 사신을 보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제는 포위망을 벗어난 뒤에도 진평의 계책을 비밀에 붙였기에 세상 사람들은 내막을 알지 못했다.

 卒至平城, 爲匈奴所圍, 七日不得食. 高帝用陳平奇計, 使單于閼氏, 圍以得開. 高帝旣出, 其計秘, 世莫得聞.

 

 『사기에는 진평이 내놓은 기이한 계책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길 없다. 묵돌 선우가 새로 맞은 연지에 대한 극진한 총애를 눈여겨본 진평이 금은보화 한 아름과 화공이 그린 미녀도 한 장을 미끼로 삼아 베갯밑송사를 벌이게 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호사가가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뱃심 두둑한 묵돌 선우를 달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거둘 수 없다.

 포위에서 풀려난 고조 유방의 행적을 먼저유경숙손통열전을 통해 한번 보자.

 

…… , 이레가 지난 뒤에서 포위에서 풀려났다. 고제는 광무廣武에 이르러 유경을 사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 말을 듣지 않다가 평성에서 곤경에 빠지고 말았소. 앞서 사자로 나섰다가 흉노를 칠 수 있다고 말한 열 명의 목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었소.”

이어 유경에게 2천 호의 봉읍을 내리며 관내후關內侯로 삼고 건신후 建信侯라고 불렀다.

 

 …… , 七日然後得解. 高帝至廣武, 赦敬, : “吾不用公言, 以困平城. 吾皆已斬前使十輩言可擊者矣.” 乃封敬二千戶, 爲關內侯, 號爲建信侯.

 

유경

  앞서 흉노를 쳐서는 안 된다고 직언을 올렸던 유경을 고조 유방이 어떻게 처리했던가? 목에 칼을 씌워 광무현에 가두지 않았던가.

 전쟁 뒤에는 언제나 일정 기간의 평화가 필요했다.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켜 원기를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으며 쌓인 원한을 다스리고 뒷날을 도모하기 위한 예기를 기르는 데도 평화는 소중한 역할을 했다.

 

여치

 

 이번에는 처음부터 유경의 건의에 귀를 기울였다. 한 차례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고조 유방의 귀가 순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화의 소중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맏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황후 여치呂雉가 우네부네 밤낮을 가리지 않자 고조 유방은 마음을 고쳐먹고 종실의 공주를 대신하여 묵돌 선우에게 보냈다. 한나라와 흉노는 형제로 맺어지며 잠시 평화를 유지했다. 이제 장성長城이 두 나라의 경계가 되었다.

 

나가기

 

 이로부터 시작된 화친공주和親公主의 역사는 서한 시대만 해도 기원전 35년 왕소군王昭君이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에게 출가하기까지 모두 여덟 차례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여섯 번은 흉노의 선우에게, 나머지 두 번은 오손烏孫의 국왕에게 출가한다. 세군공주細君公主와 해우공주解憂公主, 그리고 왕소군, 이 셋만 이름이 알려졌을 뿐, 나머지 여섯은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들은 단지 종실의 딸로 기록되었을 따름이다. 이름이 알려진 셋 가운데 왕소군은 사마천 사후의 인물이기에사기에 등장할 수 없었다. 나머지 둘 가운데 세군공주에 대한 기록이대원열전大宛列傳에 단 한 구절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오손烏孫이 말 1천 필을 건네고 한나라 딸을 맞이하려고 하자, 한나라는 종실의 딸인 강도옹주江都翁主를 오손왕의 아내로 보냈고, 오손왕 곤모昆莫(그녀를) 우부인으로 삼았다.

 

 烏孫以千匹馬聘漢女, 漢遣宗室女江都翁主往妻烏孫, 烏孫王昆莫以爲右夫人.

 

서한의 강역, 서쪽 여러 나라 가운데 '오손'도 보인다

 

 ‘강도옹주江都翁主는 강도 지방의 제후왕 유비劉非의 딸 유세군劉細君이다.

전국시대 각 제후국은 군주의 아들을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평화를 도모했다. 서한시대를 시작으로 중원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화친공주를 고리로 평화를 도모한 역사는 계속되었다.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자주 깨졌다. 그리곤 전쟁의 비극으로 치달았다. 비극의 끝에서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가치가 평화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역사는 반복한다. 이제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