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여인-진아교陳阿嬌

촛불횃불 2022. 7. 15. 16:19

  사마천의 외척세가세 번째 인물 첫 번째 단락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여태후는 자신이 득세할 때, 궁녀들을 각각 다섯 명씩 나누어 여러 제후 왕들에게 내려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조나라 땅 두 씨 집안의 딸 하나가 여태후를 시중드는 직분을 받으며 입궁했었는데, 자기 뜻과는 달리 대 땅으로 가게 되었다. 대 땅에 이른 이 여인 두 씨는 이곳 제후왕 유항의 굄을 받으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대왕 유항에게 안긴다.

 

여태후

  유항은 여태후 천하가 끝난 뒤, 여러 대신들의 추대를 받으며 서한의 다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문제이다. 여태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 두 씨는 두황후가 된다. 문제가 붕어하자 그녀의 몸으로 낳은 맏아들 유계가 자리를 이어 오르니 이가 곧 경제이다. 대 땅에서 유항의 굄을 받으며 두 씨가 낳은 딸 표를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장공주長公主라고 일컫는다. 임금의 손윗누이나 손아랫누이를 이르는 이름이다. 달리 관도공주館陶公主라고 이르는데, 이는 그녀의 봉읍封邑이 관도현館陶縣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대장공주大長公主라 부르는데, 이는 황제의 고모이기에 특별히 붙여진 이름이고.

 

드라마 <미인심계>에서 장공주 유표로 등장한 치우에이戚薇

  서한 여섯 번째 황제 경제의 누이 표는 무슨 까닭으로 대장공주라고 불릴까? 서한 2백여 년 역사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황제 무제의 고모이기 때문이다. 황제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망은 참으로 혼란스럽게 얽혀 있어 표를 만들며 살펴야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장공주 표는 서한 개국 공신 진영陳嬰의 손자 진오陳午에게 시집을 간다. 진오를 만난 뒤, 장공주 표가 낳은 딸이 진아교陳阿嬌이다. 진아교, 이 여인이 바로 무제 유철의 첫 번째 부인이다. 무제가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로 등극함에 따라 장공주 유표는 이제 대장공주가 되었고, 또 무제 유철의 장모가 되었다. 관계의 복잡성은 이런 근친혼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아교

 

  선황제 경제에게는 아들만 해도 열넷이나 있었다. 황제의 자리를 이은 유철은 이 가운데 나이 서열 열 번째였다. 맏아들로서 태자였던 유영劉榮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뒤, 유철이 태자가 된 데에는 경제의 총애는 물론 그의 남다른 총명함도 있었을 테지만 무엇보다 장공주 유표의 도움이 참으로 큰 작용을 했다.

  원래 장공주 유표는 자신의 딸 진아교를 경제의 맏아들로 태자의 자리에 있던 유영에게 시집보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유영을 제 몸으로 낳은 율희栗姬가 장공주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제의 굄이 수많은 후궁에게 쏠리고 있는 상황이 장공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를 뛰어넘는 총애에 솟구치는 시샘을 끝내 다스리지 못한 율희의 반대에 부딪친 장공주 유표는 어쩔 수 없이 눈길을 유철에게로 돌려야 했다. 당시 경제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왕부인王夫人이 낳은 아들 유철은 겨우 네 살의 어린 나이에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진 상태였다. 왕부인은 장공주 유표가 제안한 혼약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장공주 유표는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오라비 경제에게 걸핏하면 율희의 단점을 대놓고 까발렸다. 이와는 달리 왕부인의 몸으로 낳은 유철의 장점을 한껏 부풀려 칭찬했다. 경제도 왕부인이 낳은 아들 유철이 재능은 물론 덕성까지 갖추었다고 믿게 되었다. 경제는 이제 유영을 태자의 자리에서 내치고 유철을 태자의 자리에 앉히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는 모두 장공주 유표의 계책이 거둔 결과였다.

 

한경제

  경제가 교동왕 유철을 태자로 앉히기로 결심한 데는 또 다른 까닭이 하나 더 있다.외척세가에서 이 부분을 데려온다.

 

 태자가 그녀를 몹시 사랑하여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들이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왕미인은 해가 자기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태자에게 알리자 태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귀하게 될 조짐이오.”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효경제가 자리에 오르고 왕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太子幸愛之, 生三女一男. 男方在身時, 王美人夢日入其懷. 以告太子, 太子曰 : “此貴徵也.” 未生而孝文帝崩, 孝景帝卽位, 王夫人生男.

 

 『사기에는 꿈을 통하여 꿈을 이룬 여인의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한다. 권력을 한 손에 쥔 통치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흔히 등장하는 꿈은 지구 이쪽에서 저쪽까지 두루 통한다. 꿈이나 자연 현상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고 믿었기에 다른 어떤 규범에 앞서는 강제력까지 지녔던 것이다. 왕미인이 해를 품에 안는 꿈을 꾼 뒤 태어난 아들이 바로 유철이다. 경제의 태자 유영이 제 목숨을 스스로 끊자 유철이 뒤를 이어 태자가 되었고, 경제가 붕어하자 유철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장공주 유표의 딸 진아교는 황후가 되었다.

 

한무제 유철

  무제 유철은 고모인 장공주 유표의 도움에 감사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딸 진아교를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정어미가 세운 공을 잘 알았던 진아교는 황후가 된 뒤 남편인 무제 유철에 대하여 언제나 거만하게 굴었다. 말과 행동이 방자하고 난폭하기까지 했다. 사마천은태사공자서에서도 그녀의 교만함때문에 무제 유철이 마침내 위자부衛子夫를 황후로 세우고’, ‘위자부의 덕을 아름답게 여겨외척세가를 썼다고 말한다. 사마천도 황후가 된 진아교의 교만함이 그녀가 몰락한 원인으로 짚었던 것이다.외척세가에서 이 부분을 가져 온다.

 

 애초에 유철이 태자였을 때, 장공주의 딸을 맞아 비로 삼았다. 그가 황제가 되자 비가 황후로 추대되었지만 성이 진 씨인 그녀는 아들이 없었다. 무제 유철이 선왕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은 대장공주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황후는 교만하고 거만했다. 그녀는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을 알자 분노하여 위자부를 거의 죽일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무제 유철은 더욱 노여워했다. 진황후는 남몰래 여자를 시켜 사람을 미혹시키는 저주의 말을 하도록 했는데 이 일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진황후를 폐위시키고 위자부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初, 上爲太子時, 娶長公主女爲妃, 立爲帝, 妃立爲皇后, 姓陳氏, 無子. 上之得爲嗣, 大長公主有力焉, 以故陳皇后驕貴. 聞衛子夫大幸, , 幾死者數矣. 上愈怒. 陳皇后挾婦人媚道, 其事頗覺, 於是廢陳皇后, 而立衛子夫爲皇后.

 

  무제 유철은 진황후의 교만한 언행에 더하여 고모이면서 장모였던 대장공주 유표의 지나친 간섭까지 겹치자 그만 등을 돌렸을 가능성이 높다. 진황후가 몰래 다른 여자를 시켜 사람을 미혹시키는 저주의 말을 하게 한 점도 황제를 노엽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진황후는 첫 번째 황후로서 뒤를 이을 아들을 무제 유철에게 안겨야 했지만 그러지 못 했다. 황후 진아교는 아들을 낳으려고 9,000만 전이나 되는 큰돈을 의약으로 썼지만 끝내 아들을 낳지 못했다.

 ‘내가 힘써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내 딸을 버렸으니 이는 근본을 저버린 행동이라는 대장공주 유표의 나무람에 평양공주平陽公主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들이 없는 까닭에 폐출되었을 따름입니다.

 

평양공주

  평양공주는 무제 유철의 손윗누이이다. 진황후가 폐출된 까닭 가운데 한 가지를 그대로 짚었다.

  기원전 139, 평양공주가 가희 위자부를 무제 유철 곁으로 보냈다. 진황후는 위자부가 무제 유철의 굄을 크게 받는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몇 차례나 죽느니 사느니 했다. 이 때문에 무제 유철은 진황후를 더욱 싫어했으니, 이도 그녀를 폐출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진황후는 사태를 주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머니 대장공주가 황제의 고모이긴 했지만 힘은 여전히 남성인 황제의 손에 쥐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