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한무제 유철의 두 번째 여인-위자부衛子夫

촛불횃불 2022. 7. 15. 19:50

  집안은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마저 구차하고 변변치 못했던 위자부의 팔자가 백팔십도로 바뀐 건 오로지 황제의 느닷없는 굄 때문이었다. 기원전 139,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던 해 춘삼월, 열여덟 살 난 황제 유철은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멀리하려는 마음으로 황궁 동남쪽 패상霸上으로 나아가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던 무제 유철이 손윗누이 평양공주의 집에 잠시 들른 게 위자부와의 첫 만남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당시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한낱 가희였을 뿐이었다. 평양공주 집에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위자부도 이들 여러 미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평양공주는 이들을 무제 유철에게 보였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전혀 달가운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외척세가에서 무제 유철과 위자부의 첫 만남을 가져 온다.

 

  공주가 시중드는 미녀들을 보였으나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게 한 뒤 가희를 들여보냈는데 황제가 바라보더니 오로지 위자부만을 좋아했다. 이날, 무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을 때, 위자부가 휘장을 친 수레 안에서 시중을 들다가 총애를 받았다. 무제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매우 기뻐하며, 평양공주에게 황금 1천 근을 내렸다. 평양공주는 이 틈을 타서 위자부를 궁궐로 데려가 시중을 들게 하라고 아뢨다. 위자부가 수레에 오를 때, 평양공주는 그녀의 등을 도닥도닥하며 이렇게 말했다.

 “떠나게, 밥 잘 먹고 힘내고! 만약 높고 귀해진다면 나를 잊지 말게.”

 

主見所侍美人. 上弗說. 旣飮, 謳者進, 上望見, 獨說衛子夫. 是日, 武帝起更衣, 子夫侍尙衣軒中, 得幸. 上還坐, 驩甚. 賜平陽主金千斤. 主因奏子夫奉送入宮. 子夫上車, 平陽主拊其背曰 : “行矣, 彊飯, 勉之! 卽貴, 無相忘.”

 

위자부

  ‘수레 안에서 총애를 받았다는 말은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참으로 느닷없는황제의 이 이 여인의 운명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너무도 뜻밖이고 갑작스럽게 일어났기에 느닷없는 굄이었다. 자신의 사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위자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위자부는 아비의 성도 몰랐기에 자기를 낳은 어머니 위온衛媼을 따라 성을 취했을 정도였다. 이런 위자부가 평양공주의 말처럼 높고 귀해질 수 있는가능성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그런데 무제 유철은 평양공주 집 뜰에 세워진 황제의 휘장 친 수레 안에서 위자부를 단 한 차례 사랑한 것으로 끝이었다. 함께 입궁한 지 한 해가 지났지만 위자부는 두 번 다시 무제 유철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무제 유철은 궁인들 가운데 나이 들고 허약한 자를 골라서 궁 밖으로 내보내 집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즈음, 위자부는 공교롭게도 무제 유철을 보게 되자 먼저 눈물부터 흘리며 궁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간절히 청했다.

 

한무제 유철

  여인의 눈물이 황제의 마음에 측은함을 일으켰을까, 아니면 여인의 눈물이 황제의 지난 추억을 불러냈을까. 이날, 위자부는 또 한 번 황제의 굄을 받았다. 이 한 번의 굄으로 위자부는 마침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한 번의 사랑뒤 길고 긴 한 해가 지나 다시 사랑을 얻어낸 데다 임신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마침내맺어진 값진 결과였다. 무제 유철의 총애는 이제 나날이 더해졌고 평양공주의 기대처럼 높고 귀해지는데 이르렀다. 위자부는 계속된 총애와 은총을 받으며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무제 유철에게 안겼다.

  위자부의 동생 위청衛靑도 손윗누이 위자부를 따라 높고 귀한 신분으로 바뀌었다. 위청이 지체가 구차하고 변변하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 한 도막이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에 있다.

 

  위청이 일찍이 어떤 이를 따라 감천궁甘泉宮 안에 있는 감옥에 간 일이 있는데, 겸도鉗徒 하나가 위청의 관상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귀인이 될 상이외다. 벼슬이 후에 봉해질 것이오.”

  위청이 웃으며 말했다.

  “남의 종으로 태어났으니 매질 안 당하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떻게 후로 봉해질 일이 있겠소!”

 

靑嘗從入至甘泉居室, 有一鉗徒相靑曰 : “貴人也, 官至封侯.” 靑笑曰 : “人奴之生, 得毋笞罵卽足矣, 安得封侯事乎!”

 

대장군 위청

 

 감천궁은 옛 진나라 궁터에 무제 유철이 터를 더 넓혀 지은 궁궐이다. 그리고 겸도란 목에 칼을 쓴 죄인을 가리킨다. 사마천이 무대에 올린 관상쟁이와 꿈을 풀이하는 이는 하나같이 영험하다. 이번에도 역사는 목에 칼을 쓴 죄수였던 이 관상쟁이를 영험하게 만들었다. 위자부가 황제의 소첩으로서 위부인이 되자 위청은 궁중에 들어가 태중대부太中大夫라는 벼슬을 받았으며, 아들을 낳은 위부인이 위황후가 되자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었다.

  이제 위자부와 같은 성을 가진 피붙이들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위자부의 맏언니 위장유衛長孺는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의 아내가 되었고, 진장陳掌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둘째언니 위소아衛小兒는 남편 진장을 높고 귀한 신분으로 만들었다. 모두 무제 유철의 배려였지만 위자부의 베갯머리송사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천궁이 있던 자리 표지석

  이 가운데 무제 유철의 숙원인 흉노를 물리치는 데 세운 공훈으로 말한다면 엄지손가락은 단연 거기장군 위청이었다. 사마천이 열전’ 7십 편 가운데 그 중 한 편에 위청을 입전시킨 사실이 이를 잘 알려준다. 만리장성 북쪽의 유목민족 흉노는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 때도 큰 골칫거리였다. 당시 아버지 두만頭曼 선우를 죽이고 자리에 오른 묵돌冒頓에게 백등산에서 이레 동안 포위당했던 고조 유방의 굴욕을 무제 유철은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무제 유철 앞에 나타난 사나이가 위청이었다. 이는 손윗누이 위자부의 뒷심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지만 그의 출현은 한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곽거병霍去病도 무제 유철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위자부의 뒷심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서 흉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했다. 열여덟 살 새파란 나이에 기병 800명을 이끌고 수백 리 떨어진 전쟁터로 달려 나가 적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2천 명이 넘을 정도였다. 스물세 살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손에 잡히거나 죽은 흉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위자부의 둘째언니 위소아가 평양후平陽侯의 집에 여종으로 있을 때 평양현平陽縣의 말단 관리 곽중유霍仲孺와 남몰래 관계를 맺으며 낳은 사생아였다. 그 뒤, 곽중유는 임기가 되어 떠나고 위소아는 평양공주의 시녀가 되어 다른 사내 진장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곽거병이 일약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그의 남다른 용기와 능력 외에도 이모 위자부가 받은 무제 유철의 총애가 바탕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곽거병

  위자부는 세 딸을 낳은 뒤 잇달아 아들 유거劉據를 무제 유철에게 안겼다. 태자의 자리에 오른 유거는 한창 젊은 나이에 무고巫蠱 사건으로 아버지 무제 유철의 의심을 받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위자부가 세상을 떠난 지 17년 뒤, 유거의 손자 유순劉詢이 서한의 열 번째 황제가 되어 자리에 올랐으니, 위자부는 무덤 속에서나마 가슴에 맺혔던 한을 풀었을 것이다.

위자부는 무제 유철보다 네 해 앞선 기원전 91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