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자부의 아름다운 용모도 나이를 먹어가자 스러지기 시작했다. 무제 유철의 시선은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조나라 출신의 왕부인王夫人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부인은 아들 하나를 무제 유철에게 안기고 그만 일찍 세상을 버렸다.
이때 이부인李夫人이 때맞춰 등장한다. 이부인의 오라비 이연년李延年이 무제 유철 앞에서 부른 노래 한 곡이 이부인을 황제 곁으로 오게 만들었으니 역사는 우연이 만드는 필연처럼 극적이다.「영행열전佞幸列傳」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아첨쟁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이 이연년이다. 이 부분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연년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그는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 모두 노래와 춤을 추던 배우였다. 이연년은 법을 어겨 궁형을 받은 뒤 황제의 사냥개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일했다. 그런데 평양공주가 황제에게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고 말하자 황제는 그의 누이동생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영항永巷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이연년을 불러 지위를 높여 주었다. 이연년은 노래를 잘 부르고 새로운 운율도 변화시킬 줄 알았다.
李延年, 中山人也. 父母及身兄弟及女, 皆故倡也. 延年坐法腐, 給事狗中. 而平陽公主言延年女弟善舞, 上見, 心說之, 及入永巷, 而召貴延年. 延年善歌, 爲變新聲.
이연년은 노래와 춤을 생업으로 하는 집안 출신이었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두 하나같이 음악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으로써 밥 먹고 사는 광대였다. 그도 광대의 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노랫말에 곡을 붙이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젊은 시절, 그는 법을 어긴 죄로 궁형을 받았다. 그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사마천은 밝혀 적지 않았다. 단지 궁형을 받은 그가 궁중에서 개를 돌보는 일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음을 잘 아는 데다 노래와 춤에도 능했기에 황제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영행열전」은 평양공주가 무제 유철에게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고 말하자, 그의 누이동생을 자기 앞으로 불러 춤을 추게 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무제 유철이 기뻐하며 그녀를 궁녀들이 머무는 영항으로 들여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 자료에는 이연년이 무제 유철 앞에서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세상에 하나뿐인 뛰어난 미인,
한 번 눈길 주니 성이 기울고,
다시 눈길 주니 나라가 기우네.
성이 기울고 나라 기우는 줄 어찌 모르랴만,
아리따운 여인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낱말을 골라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곱게 그려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간단하면서도 단조로운 낱말로써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찬양했을 뿐이다. 하지만 남달리 뛰어났던 이연년의 음악적 재능이 소리로써 표현되는 순간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 한껏 상승하며 무제 유철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이연년이 지어 불렀다는 이 시를 사마천은『사기』어느 곳에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한서漢書』「외척전外戚傳」상편에는 이 노래를 부른 상황과 더불어 이 시가 그대로 실려 있다. 그 뒤,『이연년가李延年歌』로 이름 붙여진 이 자그마한 시는 북송北宋의 곽무천郭茂倩이 편찬한『악부시집樂府詩集』에도 그대로 옮겨 실린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 노래를『가인가佳人歌』라고 이른다. 어떻든『한서』「외척전」상편에는 이 노래가 끝난 뒤, 무제 유철이 ‘멋지오, 세상에 이런 미인이 진짜 있기나 하오?’, 이렇게 입을 떼자 곁에 있던 평양공주가 ‘바로 이연년의 누이이지요.’라고 대답한다. 잘 알다시피 평양공주는 무제 유철의 손윗누이이다. 앞 꼭지에서 다룬 위자부도 평양공주가 무제 유철에게 안기지 않았던가?
한낱 평민에 불과했던 이부인이 무제 유철의 굄을 받으며 아들 유박劉髆까지 안기자 이부인의 형제들에게도 황제의 총애가 베풀어졌다. 이부인의 바로 위의 오라비 이연년은 협성률協聲律로 불리며 2천 석의 인수까지 차게 되었다. 그의 음악적인 천재가 그의 위치를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린 바탕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누이 이부인이 없었다면 음악 담당 장관이 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사형 다음가는 중형인 궁형을 받은 큰 죄인이었던 그가 이만한 관직을 제수 받은 건 누이 이부인의 뒷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합리적이다.
이부인의 맏오라비 이광리李廣利의 한때 반짝였던 영광도 이부인이 무제 유철의 총애를 받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광리는 무제 유철이 내린 군사를 이끌고 서역 저 먼 대원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불리게 된다. 문제와 경제의 치세를 거치며 제법 두터워진 국부에다 무제 유철의 야심까지 보태지면서 당시 서한은 국제 관계에서 주도권을 움켜쥔다. 따라서 장군 이광리를 앞세운 대원 공략은 승리의 월계관을 처남의 머리에 얹어주려는 무제 유철이 직접 기획한 각본일 가능성이 높다. 처갓집 말뚝에라도 절하고 싶을 만큼 무제 유철의 이부인 사랑은 자못 각별했던 것이다. 이는 위자부의 동생 위청이나 그녀의 이질 곽거병이 전쟁터에서 거둔 공적이 이들의 무장으로서의 천재에 바탕을 둔 점과는 구별된다.
이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사마천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중산국 출신 이부인이 총애를 받아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졌다.’라는 문장에 바로 뒤이은 ‘이부인은 일찍 죽었는데,’라는「외척세가」의 구절 때문에 이 여인이 창읍왕 유박을 낳으며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어떻든 무제 유철의 사랑을 한껏 받던 이부인이 떠난 뒤 이들 형제의 최후는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했다. 무제 유철의 부름으로 황제와 잠자리를 함께할 정도였던 이연년도 이부인의 죽음으로 그 총애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사랑과 미움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아 참으로 그 변화가 무상하다. 어떻든 이들 형제의 최후가 슬프고 끔찍했던 원인을 이들 형제가 만들어 제공했다고는 하지만 이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온 가족이 주살되는 화는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영행열전」의 한 부분을 잠시 보자.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연년이 점점 궁녀들과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궁중을 드나드는 태도도 교만하고 방자했다. 더구나 누이 이부인이 죽은 뒤로는 이언년에 대한 황상의 사랑도 식자 이연년과 형제는 잡혀 주살되었다.
久之, 浸與中人亂, 出入驕恣. 及其女弟李夫人卒後, 愛馳, 則禽誅延年昆弟也.
이때, 기병 6만과 보병 10만을 거느린 이광리는 기병 10만을 이끌고 나타난 흉노의 선우와 여오수余吾水 남쪽에서 맞붙었다. 이광리는 접전 중에 자신의 가족이 모두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끌고 있던 부하들과 함께 흉노에 투항했다.
기원전 87년, 무제 유철이 세상을 떠난 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소제昭帝를 보좌하여 국정을 돌보던 곽광霍光은 무제 유철의 평소 소원을 잊지 않고 이부인을 종묘에 배향하고 효무황후孝武皇后로 추존했다. 살아서 ‘부인’이었던 이 여인은 죽은 뒤에 ‘황후’에 추봉되는 영예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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