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의 생모는 왕지王娡이다. 이 여인은 애초 금왕손金王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녀의 어미를 따라 황태자 유계劉啓의 궁중에 들어와서 미인美人에 봉해진다. 유계는 서한의 여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 곧 경제景帝이다. 왕미인이 경제에게 안긴 아들이 바로 유철이다. 유철은 왕미인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지만 경제에게는 열 번째 아들이다. 왕미인의 몸으로 낳은 유철에게는 유모가 따로 있었다.
유모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자못 특수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만들어진 따스한 젖을 받아먹으며 자란 아이가 귀족의 자제일 경우 이 여인의 신분도 따라서 현귀해질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왕공 귀족의 자제는 그 아비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어린 시절 자기를 보듬으며 키워준 유모를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어린 유철을 보듬으며 키워준 유모는 동무후東武侯의 어머니였다. 사마천은 이 여인이 얼마나 자주 어린 유철을 품에 안고 젖을 주었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철의 생모 왕미인이 아들의 배를 부르게 할 만큼의 젖이 나오지 않을 때면 그녀에게 대신하게 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 뒤 유철은 장년이 되어서 그녀를 ‘대유모大乳母’라고 한껏 높여 불렀다. 무제 유철의 마음속에는 이 여인이야말로 참으로 ‘특수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유모’가 어린 시절 유철에게 젖을 물렸다는 옛일은 말할 것도 없이 당장 황제가 자신을 특별히 대우한다는 점을 무기삼아 눈에 띌 정도로 경박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한 달에 두 차례나 입궁하여 황제 유철을 뵈려고 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의 은혜를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오히려 이용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황제는 총애하는 신하 마유경馬游卿을 시켜 ‘대유모’에게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리고 이와 함께 맛있는 먹을거리도 한 아름씩 안겼다. 그녀의 경박한 행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골계열전」에서 가져온다.
언젠가 유모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어느 곳에 공전公田이 있는데 그것을 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제가 말했다.
“유모는 그 땅을 가지고 싶소?”
그리고는 그 땅을 유모에게 내려 주었다. (무제는) 유모가 하는 말을 일찍이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서를 내려 유모가 수레를 탄 채로 천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로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乳母上書曰 : “某所有公田, 原得假倩之.” 帝曰 : “乳母欲得之乎?” 以賜乳母. 乳母所言, 未嘗不聽. 有詔得令乳母乘車行馳道中.
그녀의 욕망은 만족을 몰랐다. 한 달에 두 차례나 입궁하여 황제가 하사하는 비단을 50필이나 받았다. 이 정도에서 만족했더라면 ‘대유모’라는 존칭은 길게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공전까지 요구했다. 공전이란 소유권과 수조권收租權을 국가가 가지고 있는 논밭을 말한다. 그녀는 이런 공전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냥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옛적에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이에게 땅덩어리를 뚝 떼어 봉지로 내주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황제의 유모가 공전을 요구한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무제 유철의 ‘대유모’는 여기까지 이르렀다. 게다가 ‘천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로 통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었다. 이는 무제 유철이 ‘대유모’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도가 지극함을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득 차고도 뒤집히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이는 공자孔子가 제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살피다가 기울어진 그릇 모양의 용기를 보고 탄식하며 내놓은 말이다. ‘가득 찬’ 대유모의 언행은 장차 뒤집히지 않을 수 없음을 충분히 예고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었더라면 뒤집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릇에 가득 찬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리기 시작하면 바로 위기의 시작이기 십상이다. ‘대유모’ 집안의 자손과 하인들이 제 잘난 체하며 거만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들먹거리는 순간 지켜야 할 자기 본분은 머릿속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서한의 도성 장안성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벌건 대낮에 남의 거마를 세우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옷까지 빼앗는 일을 벌였다. 소문은 멈출 줄 모른다. 날개까지 달고 구중궁궐 높은 담도 뛰어넘는다. 대신들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칫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세라 저어했던 것이다.
도성 안 백성들이 ‘대유모’집안 자손과 하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보내는 미운 눈길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담당 관리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 시대에나 군중의 분노는 힘으로 누른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힘으로 누르다가는 큰 힘으로 폭발하기 때문이다. 담당 관리는 황제의 심기도 상처내지 않고 유모도 받아들일 만한 타협점을 찾았다. 유모의 집을 변경으로 옮기는 안을 무제 유철에게 올렸다. 황제는 이 안을 받아들였다.
떠나야 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유모는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이때, 번개처럼 유모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곽사인郭舍人이었다. 곽사인은 광대였다. 사마천은 이 사람이 늘어놓는 말들이 큰 도리에 맞지 않았지만 황제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 주었다고 기록했다. 또 사마천이 곽사인을「골계열전」속의 한 인물로 입전시킨 것도 그가 재치 있는 말이나 행동으로써 상대방을 웃게 만드는 데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무제 유철의 ‘대유모’가 변방으로 내침을 당하기 전에 곽사인을 만나 도움을 청한 건 참으로 절묘한 선택이었다. 다시「골계열전」에서 이 부분을 연다.
유모가 이보다 앞서 곽사인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곽사인이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서 작별 인사를 올리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시오.”
유모는 그의 말대로 작별 인사를 올리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면서도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곽사인이 빠른 말투로 유모를 꾸짖어 말했다.
“허허, 이 노파 좀 봐, 어찌하여 빨리 가지 않는고! 폐하께서는 이미 장년이 되셨는데, 아직도 그대 젖이 있어야만 사실 줄 아는가? 이제 와서 뭣 때문에 돌아본단 말인가?”
乳母先見郭舍人, 爲下泣, 舍人曰 : “卽入見辭去, 疾步數還顧. ”乳母如其言, 辭去, 疾步數還顧. 郭舍人疾言罵之曰 : “咄! 老女子! 何不疾行! 陛下已壯矣, 寧尙須汝乳而活邪? 尙何還顧!”
이를 지켜보던 무제 유철이 ‘대유모’를 불쌍히 여겨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려는 마음을 접고 이미 내렸던 조서를 없던 것으로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제 유철은 자기 ‘대유모’를 헐뜯던 자들을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 보냈다.
황제 한 사람이 세상을 오로지하던 때였기에 내렸던 조서를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었고 제 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 소리를 올렸던 신하를 오히려 멀리 귀양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대유모’가 황제의 ‘감은感恩’을 무기로 벌인 분에 넘치는 행동이 정당한 행동으로 바뀔 수는 없다. 게다가 황제가 나라를 오로지하던 시절, 황제가 만든 왕법王法, 곧 국법은 끊임없이 야금야금 침식되어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이와는 다른 편에서 백성들의 원한은 그때그때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조끔조끔 쌓이다가 마침내 화산이 되곤 했다. 이게 바로 역사이다.
사마천은 ‘대유모’의 자손이나 하인들의 오만하고 방자한 행동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도 감히 큰소리치지 못하고 물밑에서 수군거렸을 백성들의 뒷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사기』에 등장한 몇몇 ‘생모’와 여기 무제 유철의 ‘유모’를 비교하고 대조하지도 않았다. 사마천은 그저 배우를 무대에 불러내었을 뿐이다. 감상과 평가는 오로지 관객이 된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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