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백 년 이어오던 주周 왕실이 무너진 것도 또한 왕조가 바뀔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당장은 서북쪽 변방에 살던 이민족 견융족犬戎族의 공격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태자의 자리에서 내쳐졌던 의구宜臼가 제후들의 추대로 평왕平王으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동주東周의 시작이다. 때는 기원전 770년, 바로 춘추전국시대는 이로써 비롯된다. 그 앞쪽,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좌전左傳』에 따르면 14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경계를 맞댄 이웃끼리 벌어졌을 다툼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지 130년을 이제 막 지난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맞붙었다. 당시 송나라의 군주는 양공襄公, 초나라의 군주는 성왕成王이었다.
여기서 주周의 제후국 송나라는 상商 왕조의 마지막 군주 주紂의 배다른 형 미자계微子啓에게 주무왕周武王이 내린 봉국이다. 망해버린 상 왕조의 유민을 이끌고 시작된 송은 몇 백 년이 지난 양공에 이르러 여러 제후국 가운데 일정한 정치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제법 기운찼다. 즈음하여 양공의 가슴속에 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세차게 타올랐다. 때는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 제환공齊桓公이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다섯 해, 양공은 비어 있는 패자의 자리에 앉고 싶은 욕망을 누르지 못했다.
그러나 양공은 자기 힘을 헤아리는 데도 주위의 형세를 셈하는 데도 서툴렀다. 제나라는 환공이 세상을 떠난 뒤에 벌어진 내란으로 어지러웠고, 진晉 나라와 진秦 나라도 각자의 고충이 컸기에 앞으로 나설 틈이 없었다고 하지만, 남방의 초나라는 달랐다.
이럴 때면, 패배의 징조는 자연에서부터 나타난다.「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사마천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송나라 땅에 유성이 비처럼 쏟아졌고, 빗방울도 함께 떨어졌다. 여섯 마리 익조鷁鳥가 뒤로 날아가니, 바람이 세찼기 때문이다.
宋地霣星如雨, 與雨偕下; 六鷁退蜚, 風疾也.
뿐만 아니라 군주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려는 신하도 어김없이 무대에 등장한다. 신하의 간언에 귀를 여는 군주는 역사에 성군으로 기록되며 부활할 테지만 어리석은 군주의 공통점은 타인의 말보다 자기 말을 더 신뢰하는 공통점이 있다. 양공이 패자가 되려고 회맹을 서두를 때에도, 이웃 정鄭 나라를 치려고 했을 때에도, 초나라 성왕을 상대로 홍수에서 전쟁을 벌일 때에도, 기울어진 성왕을 일으켜 세우려는 간언은 때마다 있었다.
하늘이 상 왕조를 버린 지 오래되었으니 맞서서는 아니 되옵니다.
天之棄商久矣, 不可.
「송미자세가」에 기록된 자어子魚의 목소리이다. 이미 망하여 사라진 상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영광을 드러내려는 양공의 속셈을 꿰뚫어 본 그의 목소리는 사뭇 간절하다. 그러나 기어이 전쟁은 터졌다. 전쟁터는 홍수. 11월, 겨울이었다. 강 이쪽에 진을 친 양공이 강 남쪽 기슭에 도착한 초나라 군사가 이제 막 강을 건너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공자 목이目夷가 양공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저쪽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이들이 강을 건너지 못했을 때 이들을 칩시다.
彼衆我寡, 及其未濟擊之.
귀를 닫은 양공 앞에서 공자 목이는 안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을 다 건넌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도 또 한 번, 지금이라도 공격하면 된다고, 채근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열을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이랬다.
전쟁의 결과는 뻔했다. 송나라 군대는 대패했고 양공은 넓적다리에 상처까지 입었다. 그것도 중상이었다. 정예 금위군이 초나라 군대의 창 아래 전멸했다. 대사마 공손고公孫固를 비롯한 몇몇의 죽음을 무릅쓴 엄호가 없었더라면 양공은 겹겹 포위를 뚫고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초나라 승리, 송나라 패배. 이때까지 춘추시대 일류국가였던 송나라는 이류 국가로 전락하며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만큼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데 있었다. 자신이 패배한 원인을 도무지 짚어내지 못하는 양공이 바로 문제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대신들이 자기 군주의 어리석음에 불평을 터뜨렸지만 정작 본인은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하나 조리를 갖추어 변해하기까지 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을 곤궁에 빠뜨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않았을 때 북을 두드리지 않소.
君子不困人於厄, 不鼓不成列.
『좌전左傳』「희공僖公 22년」의 기록도 한 번 보자.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공을 원망했다. 그러자 양공은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이미 부상당한 적군을 더 이상 해쳐서는 안 되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흰 적군을 포로로 잡아서는 안 되오. 옛적에 병사를 이끌고 작전을 벌이면서 지세가 자기편에는 유리하고 적군에게는 불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상대를 막아서지 않았소. 과인이 비록 망해버린 상 왕조의 후예일지라도 전열을 가다듬지도 않은 적군을 공격할 수는 없소.”
國人皆咎公. 公曰 : “君子不重傷, 不禽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송나라 군대가 비록 상대적인 열세에 처했다고는 하지만 홍수의 험난한 요새라는 이점을 살리고 초나라 군사가 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먼저 공격하는 작전을 펼쳤더라면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이기는 기록을 역사에 남겼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송나라 양공은 자어나 목이로 대표되는 참모들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높여 받든 ‘인의仁義’는 패자가 되려는 욕망과 짝을 이루기에는 전쟁터에서 맞는 궁합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한 해 뒤, 양공은 홍수에서 입은 부상이 도져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약 1백 년이 지나 제齊 나라에서 태어난 손무孫武는 그가 펼친『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전쟁은 일종의 간사한 속임수로 상대방을 속이는 책략이다.’라고 이르게 된다.
송나라와 초나라가 홍수에서 벌인 이 전쟁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으나 앞으로 벌어질 크고 작은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가늠하는 방향타가 된다. 또 ‘인仁’이나 ‘의義’와 같은 소중한 가치는 도외시되고 더 많은 땅덩어리와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다.
홍수에서 벌어진 전쟁도 느닷없이 비롯된 것 같지만 찬찬히 톺으며 살펴보면 언제나 원인이 있고 그 결과 또한 뚜렷하다. 물론 많고 많은 원인 가운데 가장 밑바탕에 놓인 고갱이는 항상 ‘욕망’이다. 더 많이, 더 넓게, 더 크게, 더 높이, 이런 욕망이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인간을 지배하는 고갱이이며 불쏘시개이다. 이 점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도 역시 변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에도 짧은 시간 찾아오는 평화는 사막 저 편에 자리한 호수처럼 고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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