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한무제 유철이 죽인 여인-구익부인鉤弋夫人

촛불횃불 2022. 7. 16. 10:13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은 열여섯에 등극하여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쉰다섯 해 동안 절대 왕권을 휘둘렀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역사에 남긴 업적도 적지 않지만 어두운 흔적도 또한 적지 않다.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대한 제국의 바탕을 마련하며 지구 서쪽 로마 제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이룩한 데는 무제 유철의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오랫동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던 북방의 흉노를 복속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큰 업적이다. 반면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 궁중을 혼돈으로 밀어 넣은 무고巫蠱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자 유거劉据와 그의 어머니 위자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이르게 만들었다.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는 무제 유철이 자신의 이런 허물을 뉘우치며 쓴 반성문이다.

 

<윤대죄기조>

  무제 유철의 곁에는 모두 아홉 명의 여인이 있었다. 정실 진황후는 한 점 혈육도 남기지 않았지만 나머지 여인이 무제 유철에게 안긴 아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그 가운데 첫째가 바로 유거였다. 당시로서는 스물아홉 살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무제 유철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말할 것도 없이 유거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무고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자는 어머니 위자부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무제 유철의 나이 예순여섯에 그토록 사랑했던 맏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아비의 마음은 참으로 비통하였다. 자기를 배반하고 등을 돌려 모반을 꾀했다고 지레 판단한 잘못은 두고두고 황제의 늘그막을 괴롭혔다.

  태자 유거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세상을 떠났다. 둘째아들 유굉劉閎은 이미 오래 전에 병으로 세상을 버린 뒤였다. 그러니 이제 태자 자리는 자신에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 유단劉旦이 부왕에게 글을 올렸다. ‘도성으로 돌아가서 입궁하여 보위를 담당하기를 바라옵니다.’, 무제 유철은 이 글을 읽고 노여움을 삭이지 못했다. 당장 사신을 보내어 연왕燕王으로 봉해졌던 아들 유단의 목을 내렸다.

 

저소손

  사마천은 이런 내용을사기어느 곳에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훗날 저소손褚少孫이 사마천이 빠뜨렸다고 생각하며 덧대어 기워 넣음으로써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사마천은사기130편이 모두 5265백 자로 이루어졌다고 밝혔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사기130편의 글자 수효가 이보다 많은 건 덧대어 기워 넣은 이들 때문이다.

  무제 유철은 죽음이 제 곁에 가까이 왔음을 알았던지 감천궁甘泉宮에서 몸을 다스리던 어느 날 화공을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있는 모습을 그리도록 했다. 서주西周를 개국한 군주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난 뒤 자리에 오른 성왕은 아직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주공은 세상 사람들이 무왕의 죽음을 듣고 모반할까 두려워하여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하며 국정을 장악했다. 아직 공고하지 못했던 서주 초기의 바탕을 굳게 만든 건 온전히 성왕의 숙부 주공의 노심과 초사에 힘입었다. 그렇다면 무제 유철은 무슨 까닭으로 포대기에 싸인 어린아이 성왕을 업은 주공의 모습을 그리게 했을까?

 

감천궁 옛터

  무제 유철이 곁에 두었던 아홉 명의 여인 가운데 구익부인鉤弋夫人이 있다. 이 여인은 성이 조씨趙氏이며 하간河間 사람이었다. 무제 유철과 이 여인의 만남은 사뭇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무제 유철이 동쪽으로 순유하며 이 고장을 지날 때 구름을 보고 길흉과 운세를 점치는 시종이 기이한 여인이 이곳에 있다고 아뢰었다. 시종들이 한참 만에 찾아낸 그녀는 과연 젊고 아름다운 소녀였지만 안타깝게도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이 불끈 쥐어진 채로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이 벌써 열 몇 살이었지만 여전히 두 손이 불끈 쥐어진 채였다. 무제 유철은 그녀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자기 손으로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펼쳐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손바닥에는 자그마한 옥고리가 쥐어 있었다. 무제 유철은 이 소녀를 수행하는 마차에 태워 도성의 궁궐로 돌아왔다.

 

구익부인 석상

  그녀는 무제 유철의 굄을 받으며 도성의 구익궁鉤弋宮에 거주했기에 구익부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황제의 후궁으로서 첩여婕妤의 칭호를 받았기에 조첩여趙婕妤라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무제 유철에게 아들 유불릉劉弗陵을 안겼다. 이 아들은 무제 유철에게는 여섯째아들이며 또한 막내아들이었다. 무제 유철은 스물아홉 살에 위자부에게서 첫아들 유거를 얻었고 예순 살이 넘어 구익부인에게서 막내아들 유불릉을 얻었다. 무제 유철은 첫아들로서 태자에 세워진 유거가 무고 사건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감천궁에서 쇠약해진 몸을 다스리던 중 화공을 불러 주공이 포대기에 싸인 성왕을 업은 모습을 그리게 했다. 주위에 있던 신하들은 재빨리 황제의 속마음을 읽었다. 작은아들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려는 황제의 뜻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한소제 유불릉

  무제 유철의 총애를 받던 구익부인은 뜻하지 않게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되는 행운을 안았다.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어머니도 존귀해진 예는 역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궁중 여인은 아들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투쟁에서 패자가 되는 순간 자식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 또한 적지 않았다. 구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시종의 말 한 마디로 황제를 뵙고 궁중에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 이제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태자로 세워졌으니 그녀의 미래는 영광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칭호는 이제 첩여가 아니라 태후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궁중 여인의 운명을 손에 쥔 이는 자신이 아니라 황제였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구익부인을 말하지 않았다.외척세가뒷부분에서 운명이 뒤틀린 구익부인 이야기를 저소손이 기워 넣었다. 여기 가져온다.

 

  며칠이 지나자 무제는 구익부인을 질책했다. 부인은 비녀와 귀고리를 뽑아 버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제가 말했다.

  “끌어내어 액정옥掖庭獄으로 보내라!”

  부인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무제가 일렀다.

  “어서 가거라, 그대는 살 수가 없다!”

  부인은 운양궁雲陽宮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거센 바람이 먼지를 일으켰으며 백성들도 슬픔에 잠겼다. 사자가 밤에 관을 가지고 가서 그녀를 묻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표지를 해 두었다.

 

後數日, 帝譴責鉤弋夫人. 夫人脫簪珥叩頭. 帝曰 : “引持去, 送掖庭獄!” 夫人還顧, 帝曰 : “趣行, 女不得活!” 夫人死雲陽宮. 時暴風揚塵, 百姓感傷. 使者夜持棺往葬之, 奉識其處.

 

  당시 구익부인의 나이를 알 수 있는 역사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무제 유철은 일흔 살 나이로 감천궁에서 신병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제 몸으로 낳은 유불릉이 겨우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으니 새파랗게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감천궁에서 무제 유철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드는 이는 구익부인이었다. 무제 유철은 그런 그녀를 질책했다지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비녀와 귀고리를 뽑아 버리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그녀의 행동만 기록했을 뿐이다. 그녀는 운양궁에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려야 했다.

  그녀를 액정에 가둔 뒤, 무제 유철도 세상 사람들의 입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입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신하들은 사람들의 말이 그녀의 아들을 세우려고 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그의 어머니를 없애려고 하는가!라고 한다고 아뢨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무제 유철이 한 말이외척세가뒷부분에 실려 있다. 물론 사마천의 기록이 아니라 저소손이 보유한 기록이다. 여기 가져온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소. 이런 일은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오. 예로부터 나라에 난이 일어난 까닭은 군주는 어리고 그 어머니는 장년이기 때문에 비롯되었소. 여인이 홀로 살면 교만하고 거리낌이 없으며 음란하고 방자하여 막을 이가 아무도 없소. 그대는 여후呂后가 한 일을 들어보지 못했소?”

 

. 是非兒曹愚人所知也. 往古國家所以亂也, 由主少母壯也. 女主獨居驕蹇, 淫亂自恣, 莫能禁也. 女不聞呂后邪?”

 

  무제 유철이 제국의 안녕을 위해 내린 현명한 판단이라고 치부해야 할까? 저소손은 이를 두고 무제 유철의 현명하고 원대한 식견에서 비롯된 계책으로써 평범한 선비는 도달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사마천이라면 저소손의 이런 평가에 고개 끄덕이며 찬동했을까?

 

한무제 화상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와 술수에 젊은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은 깃털처럼 가볍고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한 해가 지나 무제 유철도 세상을 버렸다. 태자로 책봉되었던 그녀의 아들 유불릉이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이 곧 서한의 여덟 번째 군주 소제昭帝이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는 대제국의 황제였지만 자신을 낳은 어머니 구익부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도.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유철은 서한의 열두 황제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무려 54,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자리에 올라 일흔 살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여느 황제들처럼 그에게도 곁을 지킨 여인들이 많았다. 황제이기 때문에 그러했지만 여느 황제와는 달리 그의 장수 때문에도 더욱 그러했다.

  하늘은 황실 여인에게 고종명考終命을 허락하지 않았던 걸까? 이들의 비단옷자락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운명처럼 얼씬거렸다. 이들의 슬픔에는 끔직한 괴로움이 떨어지기 싫어하는 풀처럼 끈적거렸다. 황제의 굄이 멀어지는 순간 행복은 신기루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다툼은 감추어 둔 적의 때문에 언제나 신산했다.

  한 남자를 여러 여인이 함께하는 곳에 하늘은 천국을 마련하지 않았다. 황실 안쪽은 겉에 드러난 화려함 뒤쪽에 찬바람 휘도는 더 넓은 공간이 있다. 사마천이 무대에 올린 한무제 유철의 여인들을 만나 본다. 우리는 이제 꽃무늬 수놓은 비단 휘장 뒤에 감추어진 음모와 강샘을 만나게 된다. 2천 년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제 이들을 위로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