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마천이 만난 장군 이광
먼저 사마천이「태사공자서」에서 밝힌「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쓴 이유를 한 번 보자.
적을 대적함에 용감하였고, 병사들에게는 인자하고 정이 많았으며, 명령이 번거롭지 않았기에 부하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勇於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鄕之.
여기에 더하여 ‘열전’ 일흔 편의 배치를 눈여겨 살피면 위청衛靑의 여러 부장 가운데 오로지 이광李廣만이 한 편을 넉넉히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큰 전공을 세우며 널리 이름을 날렸던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조차「위장군열전衛將軍列傳」뒤쪽에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며 단 몇 줄로 기술된 점과 비교하면 사마천이 장군 이광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 말미에 붙인 ‘태사공왈’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본 이장군은 투박하고 소탈하기가 시골사람 같았으며 말도 잘하지 못했다.
余睹李將軍悛悛如鄙人, 口不能道辭.
사마천은 그가 직접 만났던 이광의 시골사람처럼 투박하고 소탈한 면모에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적을 앞에 두고서는 용감했지만 병사들에게는 인자하고 정이 넘쳤고 명령은 번거롭지 않았던 그는 사마천이 생각하는 참 장군이었을 터이다.
길게 국경을 맞댄 북쪽 흉노는 당시에도 골칫거리였다. 때로는 화친공주를 매개로 평화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이들과의 잦은 전쟁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민족을 다룬 몇 편의 ‘열전’ 가운데「흉노열전」의 편장이 유독 긴 것은 이들과의 크고 작은 부딪침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흉노열전」을 가운데 두고 바로 앞에「이장군열전」을, 그리고 바로 뒤에「위장군열전」을 둔 사마천의 깊은 뜻이 잡힐 듯하다. 또 장군 이광이 칼을 뽑아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모습에 깊은 동정을 보내며 함께 아픔을 같이한 사마천의 눈물이 보이는 듯하다. 여기에 더하여 이광의 손자로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투항한 이릉李陵을 변해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며 궁형을 당한 사마천으로서는 장군 이광에 대한 관심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지혜와 담력
기원전 167년, 문제가 자리에 오른 지 열네 해째 되던 해, 북방의 흉노가 소관蕭關을 통해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한나라 땅으로 쳐들어왔다. 소관은 지금의 닝샤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구위안固原 동남쪽에 위치한 관문으로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소관이 뚫리자 이광은 지체 있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기에 종군하여 무공을 세웠다. 무술을 인정받은 이광은 봉록 8백 석을 받는 무기상시武騎常侍로 임명되어 황제를 가까이 따르며 호위하는 임무를 충실히 해냈다. 이 무렵 문제의 행차를 호위하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무용을 드러낸 일과 사나운 짐승을 맨손으로 때려죽인 일 등은 이 시대 장수라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장군으로서 그의 지혜와 담력은 적은 병력으로 흉노의 대군을 만났을 때 비로소 드러났다.
그가 맞닥뜨린 흉노의 기병은 몇 천 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거느린 기병은 겨우 1백 명. 이때, 이광이 자기 기병에게 내린 명령은 ‘전진’이었다. 그리고 흉노의 진지를 불과 2리里 앞두고 멈춰선 뒤 말안장을 풀게 했다. 부하 기병들이 겁에 질리며 흉노의 급습을 걱정했지만 이광은 오히려 흉노의 기병들이 자기편을 유인병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기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흉노는 어딘가 또 다른 복병이 있을세라 의심하며 밤을 틈타 자기 군사를 이끌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자칫 기병 하나도 건지지 못할 위기를 돌파한 것은 오로지 이광의 지혜와 담력의 결과였다.
지혜와 담력이 넘쳤던 이광도 흉노의 대군을 만나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한나라 황제는 무제武帝였다. 물론 이광이 이끄는 군대도 흉노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흉노의 선우單于는 이광의 현명함을 유달리 아끼고 존경했다. 비록 적장이긴 했지만 목숨을 앗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러했기에 흉노 선우는 이광을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부상까지 입었던 이광은 말 두 필 사이에 엮은 그물에 갇혀 누운 채로 십여 리를 끌려갔다.
위기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이광의 담력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죽은 척하며 누운 채로 곁눈질하던 이광의 눈에 훌륭한 말을 탄 흉노 소년의 모습이 들어온 순간, 이광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훌쩍 흉노 소년의 말에 올라타는가 싶더니, 그대로 흉노 소년을 밀어 떨어뜨리고 그의 활을 빼앗은 뒤 남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광석화였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였다. 순식간에 결정하고 한 순간에 행동으로 옮기며 다시 그의 요새로 돌아왔지만 조정에서는 그를 형리에게 넘겨 문초했다. 그는 목이 베이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큰돈을 내어야 했다. 그리고 평민이 되었다.
설령 흉노에게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했을지라도 남다른 지혜와 담력으로 수천 기병의 추격을 따돌리고 생환했으니, 이는 한무제 유철劉徹이 아끼고 보듬던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보다 훨씬 앞선다. 사마천도 이런 점을 들어 그의 용맹을 찬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광리는 유철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이부인李夫人의 친정오라비, 곧 무제 유철의 처남이었다.
원광元光 말년, 곧 기원전 129년, 이 해는 한무제 유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열세 해째로 접어든 때였다. ‘원삭’은 기원전 129년, 위청이 군사를 이끌고 삭방朔方(곧 북방을 가리킨다)의 흉노가 그들의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곳, 곧 용성龍城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연호였다. 당시 이광은 황제의 부름으로 후장군後將軍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전선으로 나아가 흉노를 공격하는 일에 함께했지만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두 해 뒤, 이광은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우북평右北平을 향해 출발했다. 지도를 펼치면 허베이성河北省과 랴오닝성遙寧省이 만나는 경계선 북쪽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지역에 닝청寧城이란 도시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이 바로 우북평이다. 한나라 도성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우리 대한민국 제주도 남쪽 끝에서 함경북도 경원慶源까지보다 좀 더 멀다. 물론 직선거리이다. 우북평은 흉노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한나라 때는 유능한 장수를 보내어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장건張騫도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과는 길을 달리하여 흉노 정벌에 나섰다. 이번에도 이광은 흉노 좌현왕左賢王이 이끄는 기병 4만 명에게 단단히 포위되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한나라 군대는 절반이 넘게 전사했지만 이광은 겁에 질려 사색이 된 부하들을 다독이며 격려함으로써 다시 용기 있는 장군의 모습을 널리 드러냈다. 장건은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고, 이광은 공적도 과실도 비슷하여 아무런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보인 이광의 지혜와 담력, 그리고 용기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에게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3. 파멸
황제의 친척이나 잘 아는 인물이 아니면 가까이 두려고도 쓰려고도 하지 않기, 그리고 재주와 능력이 있는 이를 멀리하고 박해까지 하기, 이런 일이 옛 봉건 왕조에서는 자못 흔했다. 이광도 이런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을 애초부터 짊어져야 했다.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공격할 때도 이광은 철저히 배척당했다. 당시 위청은 사로잡은 흉노 병사를 통해 선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 위청은 정예부대를 이끌고 선우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이광에게는 동쪽 길로 전진하도록 하였다. 그 길은 멀리 돌아가야 하는 데다 물과 풀이 적은 곳으로 조건이 매우 불리했다. 이광은 대장군 위청에게 목숨 걸고 선우와 맞서 싸울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제 유철이 대장군 위청에게 은밀하게 건넨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이장군열전」에서 황제가 위청에게 이른 부분을 가져온다.
“이광은 늙은 데다 운수까지 사나운 인물이니 선우와 맞서게 해서는 안 되오. 맞서도 아마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李廣老, 數奇, 毋令當單于, 恐不得所欲.”
당시 이광은 벌써 예순이 넘는 늙은이였다. 위청은 한사코 이광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우장군 조이기趙食其와 함께 동쪽 길로 나아갔지만 길안내도 없이 헤매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당연히 대장군 위청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위청은 흉노의 선우와 맞서 싸웠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다. 이래저래 화가 난 대장군 위청이 장사長史를 보내 이광을 심문하고 엄히 질책하도록 했다. 젊은 시절부터 70여 차례 흉노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였던 이광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하들에게 남긴 말을 여기 가져온다. 「이장군열전」이다.
“나 이광은 젊은 시절부터 흉노와 70여 차례 크고 작은 싸움을 했다. 이제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싸움터에 나서 선우의 군사와 맞서려는데 대장군이 또 나 이광의 부서를 옮겨 멀리 길을 돌아가게 했고, 게다가 길을 잃기까지 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나 이광의 나이 예순이 넘었으니 이제는 도필리刀筆吏의 심문을 받을 수 없다.”
“廣結髮與匈奴大小七十餘戰, 今幸從大將軍出接單于兵, 而大將軍又徙廣部行回遠, 而又迷失道, 豈非天哉! 且廣年六十餘矣, 終不能復對刀筆之吏.”
이 말을 끝으로 스스로 칼을 뽑아 제 목을 찔러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르면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도 헛말이 아닌 듯하다. 이광은 타고난 본성이 꼿꼿하고 곧았기에 업신여김을 도무지 참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자기가 속한 집단 내부에서 자기를 향해 옥죄는 갖가지 압력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끝내 맞섰다. 선우와 맞서 싸웠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대장군 위청과 만났을 때 허리를 굽혔더라면 심문당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을 터이지만 이광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성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의심할라치면 쓰지 말 것이며 자기 곁에 두고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 일렀지만 무제 유철은 그리하지 않았다. 무제는 위청을 시켜 남몰래 이광의 팔꿈치를 잡아당기도록 부추겼다. 싸움터에 나서면 언제나 병사들 앞에 서서 나아갔던 장군 이광은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통치자의 압력까지 겹치며 철저하게 불행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거느렸던 병사들을 소리 높여 울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보통 백성도 모두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세상을 떠난 그는 이들의 눈물 속에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4. 악연
위청은 출신 자체가 구차하고 변변치 못했다. 말단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서한 개국 공신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의 증손 조수曹壽 집에서 일하다가 주인어른의 첩실 위온衛媼과 가만히 정을 통한 뒤 낳은 아들이 바로 위청이었다. 이런 위청이 구차하게 보내던 시절, 감천궁 안 감옥에 갔다가 만난 죄인이 위청의 관상을 보더니, 귀인이 될 상이오, 벼슬은 후에 봉해질 터이고, 이렇게 말했다. 관상쟁이를 용하게 만들려는 하늘의 뜻이었을라, 그의 누이 위자부衛子夫가 무제 유철의 굄을 받으며 위청의 앞길도 환히 열리기 시작했다.
기세등등 거칠 것 없었던 대장군 위청 앞에 이광의 꼿꼿하고 강직한 모습은 오히려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위청이 흉노와의 싸움에서 일곱 차례 맞서 일곱 차례 모두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이광도 일흔 차례 흉노와 맞붙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런 점 때문에 위청이 이광을 거북한 존재로 느끼지는 않았을까. 대장군으로서 자기의 지휘를 받아야 할 부하 장군의 존재가 환한 빛으로 빛날 때, 자신의 존재는 어둠 속으로 묻힐 가능성을 위청은 분명히 셈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청이 이광의 성격적인 결함을 이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했을 수도 있다.
기원전 99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40여 년이 지난 때, 무제는 또 다시 흉노 정벌에 나섰다. 천산天山 일대에서 활동하는 흉노 우현왕右賢王이 공격 목표였다. 이광리李廣利가 무제의 명을 받아 기병 3만을 이끌고 주천酒泉을 출발했다. 이때, 무제는 이릉李陵에게 군량과 말꼴을 운송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한사코 용감히 나아가 싸우기를 청하는 이릉에게 무제는 보병 5천 명을 떼어주며 흉노와 맞서도록 했다. 여기 이 이릉이 바로 스무 해 전 칼을 뽑아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장군 이광의 손자이다. 인연도 이렇게 만들려면 힘들 터인데,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는 별호로 이름난 이광리는 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李夫人의 친정오라비였다. 황제의 처남 위청과 장군 이광, 그리고 세월 흘러 황제의 처남 이광리와 장군 이광의 손자 이릉, 이런 짝지음은 서로의 선택은 아니었을 테지만 우연이라고 셈하기엔 풀 수 없는 신묘함이 숨어 있는 듯하다.
대장군 위청이 이광에게 길잡이 없이 동쪽 길을 택하여 나아가라고 명령했듯이 이사장군 이광리는 보병 5천 명밖에 거느리지 아니한 이릉에게 거연居延 북쪽에서 1천 리나 나아가도록 명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릉을 곤경에 빠뜨렸다. 흉노의 대군을 둘로 쪼개어 이들이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집중되지 않게 하려는 작전이었지만 홀로 떨어지게 된 이릉은 선우 군사 8만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릉은 결사적인 항전을 벌이며 여드레를 버텼지만 이광리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이릉은 결국 흉노에게 무릎을 꿇었다. 흉노의 선우는 이릉 집안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지라 자기 딸을 이릉에게 아내로 주고 귀하게 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했다.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한 것은 뒷날을 도모하려는 데 있을 것이라는 사마천의 변해는 오히려 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라비 이광리의 작전 탓으로 화살이 돌아올 가능성도 황제의 노여움에 불을 붙였으리라. 이 때문에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마음과 힘을 다하며 떨쳐 일어나 불후의 명작『사기』를 완성한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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