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하찮은 궁녀에서 황제가 된 여인-무측천

촛불횃불 2022. 7. 20. 14:30

1. 아름다운 소녀의 첫 입궁

 때는 정관貞觀 11년(637년) 동짓달, 당태종 이세민은 열네 살 난 무측천의 용모는 물론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반듯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은 그녀를 재인才人에 봉하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내렸다. 당나라 때 궁녀는 정1품 귀비貴妃에서부터 정8품 채녀采女까지 그 등급이 촘촘한데, 재인은 정5품, 중간에서 좀 아랫쪽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궁녀 중에서도 아랫쪽에 위치한 하찮은 궁녀였다. 이 하찮은 궁녀가 종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무측천은 입궁하기 전날, 홀로 된 그 어미 양씨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진 천자를 모시는 일이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어린아이처럼 훌쩍훌쩍 우십니까?"

 

당나라 때 궁녀의 복장
 당태종 이세민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무측천의 궁중 생활을 어떠했을까? 역사에는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단지 무측천이 늘그막에 지난 날을 돌으킨 토막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태종 이세민에게는 '사자총獅子騘'이라는 이름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이 말은 살도 찌고 우람한 데다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였다. 어느 누구도 이 말을 길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곁에서 이세민을 모시던 무측천은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말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폐하께서는 세 가지만 제게 내려주소서."

 귀를 기울이던 태종 이세민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그 세 가지란 무엇인고?"

 "쇠채찍과 쇠몽둥이와...... ."

 잠시 뜸을 들이자 태종은 재우쳤다.

 "나머지 한 가지는 또 무엇인고?"

 "그리고 비수 한 자루입니다."

 "그것들로 사자총을 길들인다?"

 눈을 반짝이며 태종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이렇게 아뢨다.

 "쇠채찍으로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몽둥이로 사자총의 머리를 내리칠 것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딸 것입니다."

 당돌했다. 어린 그녀의 패기가 넘쳤다. 태종 이세민은 그녀의 이런 점을 높이사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태종 이세민

 

 그러나 무측천은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열두 해 동안 재인의 자리에 머물렀을 뿐이다. 단지 황제가 병석에 있을 때, 태자 이치李治와 남몰래 사랑을 싹 틔웠을 뿐이다. 

  정관 23년(649년) 태종 이세민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관례에 따르면 세상을 떠난 황제를 모시던 궁녀들은 그의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면 머리를 깎고 절집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어야 했다. 무측천도 이런 관례를 따라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당고종 이치와 남몰래 줄곧 인연의 끈을 이어오고 있었다.

 

2. 두 번째 입궁

 

 고종 이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꼭 한 해가 되는 날, 아버지 이세민의 제를 올리기 위하여 감업사에 들렀다. 물론 고종 이치와 무측천은 이 자리에서 만났다. 무측천은 헤어진 뒤 애타게 그리워했던 감정을 드러냈다. 아들 없어 사랑 잃을세라 고심하던 왕황후도 무측천을 궁중으로 데려오는 데 능동적으로 찬성했다. 당시 왕황후의 연적 소숙비蕭淑妃를 제압하려고 눈에 불을 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치는 당장 이를 허락했다.

 

당고종 이치

 

 고종 이치는 복상 기간이 끝나는 날, 곧 영휘永徽 2년(651년) 5월, 무측천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궁중에 들어오기 전, 무측천은 이미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고, 입궁하자마자 아들 이홍李弘을 낳았다. 그녀는 또 하나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했으니, 그것은 소숙비를 무릎꿇리는 일이었다. 이로써 고종 이치의 총애를 더욱 두터이한 그녀는 다음해 5월, 정2품 소의昭儀로 껑충 뛰어올랐다. 당시 왕황후와 소숙비는 고종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헐뜯으며 싸움을 벌였지만 이치는 본체만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 빠른 셈속에 악랄한 행동

   영휘 5년(654년), 서른 살을 이제 막 넘긴 무측천이 맏딸을 낳았다. 이 곧 안정사공주安定思公主이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무측천이 이 아이를 낳은 지 한 달쯤 뒤에, 왕황후가 문안을 와서 한참 아이를 어르며 놀다가 간 뒤, 무측천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아직 젖냄새 풍기는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이불을 덮어버렸다. 마침 고종 이치가 들르자, 무측천은 거짓 웃음을 웃으며 이불을 제끼고 함께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이어 무측천은 이미 목숨을 잃은 아이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곁에 있던 이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왕황후께서 방금 여기 오셨지 않습니까?"

 고종 이치는 발끈 화를 화를 내며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

 

왕황후

 

 무측천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왕황후의 잘못을 하나하나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종 이치는 왕황후를 물리고 무측천을 그 자리에 올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무측천  

  영휘 6년(655년) 유월, 궁중에는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왕황후와 그녀의 친정어머니 유씨柳氏가 어떤 사람을 저주하며 그를 제압하는 술수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귀로 들은 고종 이치는 크게 화를 내면 유씨를 궁중에서 쫓아내도록 하였다. 게다가 무측천을 소의에서 등급을 올려 정1품의 신비宸妃에 봉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재상 한원韓瑗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는 장손무기長孫無忌(태종 이세민의 황후 장손황후의 친정 오라비임)와 저수량 褚遂良을 머리로 하는 원로대신들의 세력이 자못 강하여 고종 이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무측천은 정치적으로 고종 이치의 '전우戰友'가 되었다. 

 

장손무기

 그러나 황제는 고종 이치였고, 장손무기와 저수량은 원로로서 그에 맞서는 정적이 궁중에 없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중서사인中書舍人 이의부李義府가 왕황후를 폐하고 무측천을 그 자리에 앉히는 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고종 이치는 물론 무측천의 환심을 얻었음은 물론 조정에서도 자기 의견을 지지하는 중간 관원들이 생기며 힘을 얻었다. 이어 무측천을 황후에 자리에 앉히려는 이들이 점점 세력을 더해갔다. 마침 당왕조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원로 이적李勣의 말 한 마디가 고종 이치의 마음을 더욱 굳히게 만들었다. 

 "이건 폐하 집안의 일인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세의 역전, 그랬다. 이해, 시월 열사흗날, 고종 이치는 마침내 조서를 내려 '독살을 획책하고 음모한 죄'를 물어, 왕황후와 소숙비를 서인으로 폐위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 형제를 자리에서 내쫓고 영남으로 유배했다. 이레 뒤, 고종 이치는 다시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황후의 자리에 올렸다. 이로부터 모든 권력은 고종 이치의 손 안에 집중되었다. 

 

*남은 이야기는 <유일한 정통 여황제-무측천②>로 이어집니다. 기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