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음淮陰 소년 한신韓信을 괴롭힌 건달
사마천의 ‘열전’에는 같은 이름의 ‘한신韓信’이 둘이다. 고조 유방에게 등을 돌리고 흉노의 선우 묵돌과 손을 잡은 한신이 그 하나로서「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에서 그를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뒷사람들에 의해 ‘병선兵仙’이니 ‘신수神帥’니 등으로 높여 불린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이다. 사마천은 작위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회음후열전」에서 그를 다룬다. 오늘, 이곳에서 이르는 한신은 ‘회음후 한신’이다.
‘회음후 한신은 회음 사람이다.’(淮陰侯韓信者, 淮陰人也.), 사마천은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한신을 시작한다.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는 뒤를 이은 여러 개의 긴 문장 중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진나라 말엽 농민 전쟁을 시작으로 초한전쟁을 거치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때까지 치러진 전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한신은 그를 뛰어넘는 장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큰 무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렇다면 몰락한 가문이라 셈해도 그 조상 가운데 이름을 떨친 장수 한 명쯤은 있을 법하다. 사마천도 이 점을 궁금하게 여기며 여기저기 귀 기울였을 게 분명하다. 사마천이『사기』집필을 위해 자료를 모을 때, 한신을 직접 만났던 인물도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의 생몰 연대의 차이가 불과 1백 년이 조금 넘을 뿐이기 때문이다.
‘회음’은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화이안시淮安市. 고조 유방의 고향 패현과는 우리 대한민국이라면 서울에서 대구 정도 떨어진 곳이다. 한신은 이곳 ‘회음’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두 가지 일화를 남긴다.
하나.
회음의 저잣거리에서 한신을 업신여기는 어떤 건달에게 당한 치욕이다.「회음후열전」에서 이 부분을 가져온다.
회음의 건달 가운데 어떤 젊은이가 한신을 모욕하며 말했다.
“네놈이 비록 키는 커서 칼 차고 다니기를 좋아한다만 사실은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여러 사람 앞에서 한신을 모욕하며 말했다.
“네놈이 죽음이 겁나지 않으면 그 칼로 나를 찔러 봐라. 하지만 죽음이 겁나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가거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몸을 구부리고 땅바닥을 기어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온 저잣거리 사람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淮陰屠中少年有侮信者, 曰 : “若雖長大, 好帶刀劍, 中情怯耳.” 衆辱之曰 : “信能死, 刺我 ; 不能死, 出我袴下.” 於是信孰視之, 俛出袴下, 蒲伏. 一市人皆笑信, 以爲怯.
한신을 욕보인 이 건달은 단역 배우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 배우의 역할은 몇 십 년 뒤, 초나라 왕으로 봉해진 한신이 고향땅으로 왔을 때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그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 부분을 한 번 더 읽으며 맛보면 답이 나온다. 한신은 이 건달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회음후열전」을 다시 펼친다.
(한신은) 일찍이 가랑이 밑으로 기어서 지나가게 하며 자기를 욕보인 젊은이를 불러 중위中尉로 임명한 뒤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장사이다. 나를 모욕했을 때,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해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의 치욕을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다.”
召辱己少年令出胯下者以爲楚中尉. 告諸將相曰 : “此壯士也. 方辱我時, 我寧不能殺之邪? 殺之無名, 故忍而就於此.”
회음의 젊은 건달이 한신에게 안긴 치욕의 긍정적인 효과가 대단하다. 한신은 일시적인 치욕을 참으며 매진했기에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널리 드날릴 수 있었으니, 무대에 잠시 등장했던 단역 배우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위로 임명되었지만 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건달은 한신에게 임명장을 받으며 당당하고 자랑스러웠을까, 아니면 자기가 한신에게 준 치욕보다 더 큰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했을까?
2. 표모漂母
둘.
‘빨래하는 아낙네’는 가난한 한신에게는 구세주였다. 거의 모든 회음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신에게 매번 밥을 주었기 때문이다. 능력 없는 젊은이 한신은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다른 이의 추천을 받아 벼슬아치가 될 수도 없었다. 회음의 어느 정장亭長 집에 기대어 때가 되면 슬쩍 찾아가서 얻어먹기도 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한신이 찾아가도 아예 밥을 차려 주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푸대접은 이뿐이 아니어서 동네 건달이 자기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게 하는 치욕을 안기던 때, 이 아낙네는 수십 일 동안이나 굶주린 한신에게 밥을 주었다.「회음후열전」에서 이 장면을 펼친다.
한신이 성 아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빨래하던 여러 아낙네 가운데 어떤 아낙네가 한신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밥을 주었는데 빨래가 끝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을 그렇게 했다. 한신이 기뻐하며 이 아낙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반드시 은혜에 크게 보답하겠습니다.”
이 아낙네가 화를 내며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 먹고살지 못하기에 내가 왕손王孫을 가엾게 여겨 밥을 준 것일 뿐이지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
信釣於城下, 諸母漂, 有一母見信饑, 飯信, 竟漂母曰 : “吾必有以重報母.” 母怒曰 : “大丈夫不能自食, 吾哀王孫而進食, 豈望報乎!”
이 아낙네가 무대 위에서 한신에게 한 말은 딱 한 문장뿐이다. 앞서 회음의 젊은 건달이 한신을 모욕하며 건넨 말은 그나마 두 문장이었지만 ‘빨래하는 아낙’의 대사는 한 문장으로 끝난다.
하지만 나는 이 한 문장에서 두 가지를 읽는다. 하나는 ‘사내대장부’. 이 낱말 속에는 ‘자네는 능력이 있어, 그리고 실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포부도 대단하잖아.’, 이렇게 추켜서 올리는 의미가 있다. 우리말도 그렇지 않은가? ‘사내대장부’는 모진 어려움도 굳센 의지로 헤쳐 나갈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을 때 흔히 쓰지 않는가.
또 하나는 ‘왕손’이다. 한신은 왕후장상의 후손도 아니요 아무개 귀족의 후예도 아니다. 한신의 ‘열전’에는 그의 조상에 대한 어떤 소개도 한 마디 없다. 사마천도 자신보다 불과 1백 년 전에 살았던 한신의 가계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자료 수집에 온 정성을 기울였던 그이기에 한신의 가계도를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한신은 매우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그에게 ‘빨래하는 아낙네’는 ‘왕손’이라고 치켜세웠다. ‘왕손’은 ‘젊은이에 대한 경칭’이다. ‘양반집 자식’이나 ‘뼈대를 자랑하는 집안의 자식’ 정도가 우리 한국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가난한 데다 능력도 없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얻어먹고 지내는 처지에 놓인 한신에게 ‘빨래하는 아낙네’가 건넨 한 마디는 큰 용기와 힘을 북돋우는 청량제가 되었을 것이다. 단역 배우로 무대에 이렇게 등장했던 이 아낙네는 몇 십 년 뒤 다시 무대에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한신이 초왕이 되어 고향 회음에 들렀을 때, 일찍이 밥을 먹여 주었던 ‘빨래하는 아낙네’를 불러 1천금을 내렸다. 그리고 끝이다. 사마천은 앞의 ‘건달’처럼 이 여인의 무대 위 표정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신이 초한전쟁의 고비마다 보여준 장수로서의 천재를 볼 때마다 ‘건달’과 ‘빨래하는 아낙네’, 이 두 사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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