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걸이 천하를 두고 패권을 다툰 역사적 사건을 세 가지만 들라면, 중국인은 서슴없이 이렇게 손꼽는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초한전쟁, 조조 曹操, 유비劉備, 손권孫權의 대접전,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의 이른바 국공내전. 역사는 미래를 내다볼 수는 있지만 기록은 지나간 시대와 역사가가 당면한 당대가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사마천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군주 영정贏政이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천하를 통일하며 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른바 진시황제秦始皇帝. 열세 살 어린 나이에 군주의 자리에 올라 서른아홉 장년의 나이에 통일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된 그는 기원전 21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역사에 남겼다. 그러나 이런 업적이 통일 제국의 백성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아니 이를 수 없었다. 마지막 일웅이 되기까지 병탄을 향한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분해될 수 없을 정도로 켜켜이 쌓인 분노와 원한이 문제였다. 게다가 ‘덕치德治’를 베풀어야 할 시대가 찾아왔음을 새 시대의 통치 집단이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위기를 위기라고 느끼면 이미 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위기를 위기라고 느끼지 못하고 더 많은 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날을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순행에 나섰던 시황제가 마흔아홉 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자 황제 곁을 지키던 환관趙高가 벌인 권력 게임에 재상 이사李斯가 제 뜻을 끝내 지키지 못함으로써 제국은 급전직하,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
▶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이때로부터 유방이 개국 황제가 된 한漢 나라가 설 때까지 계속된 혼란의 시기를 슈지츠 대학 리카이위안李開元교수는 그의『진붕秦崩』에서 ‘후전국시대後戰國時代’로 명명했다. 그랬다. 각지에서 봉기한 영웅호걸들이 진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선은 힘을 합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이 이쪽저쪽 어깨를 겯고 겨룰 때면 피와 튀고 창이 번뜩이는 전국시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선봉은 진섭陳涉이었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로 자리에 오른 바로 그 해, 어양漁陽으로 수자리를 살기 위해 길을 떠나 대택향大澤鄕에 머물던 9백 명의 무리 가운데 진섭은 편제된 행렬의 둔장屯長이었다. 때는 7월, 하늘은 이 지방에 큰비를 내렸다. 큰비로 막힌 길이 열릴 때를 기다리려면 도착 기한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 법은 기한을 어긴 자에게 목을 베는 벌을 내렸다.
사졸을 인도하는 책임을 진 장위將尉 몇 명의 목을 내린 진승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사기』「진섭세가陳涉世家」를 펼친다.
“그대들은 비를 만나 모두 이미 기한을 어겼다. 기한을 어기면 마땅히 목을 내놓아야 한다. 설령 그대들이 목을 베이지 않더라도 수자리를 지키다가 죽은 이가 열 가운데 예닐곱이다. 더구나 장사는 죽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죽는다면 이름을 크게 남겨야 할 것이다.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단 말이냐!”
진승의 호소에 무리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公等遇雨, 皆已失期, 失期當斬. 藉弟令毋斬, 而戌死者固十六七. 且壯士不死卽已, 死卽擧大名耳, 王侯將相寧有種乎!” 徒屬皆曰 : “敬受命.”
사마천은 일찍이 하층민 출신으로 머슴살이를 했던 진섭을 제후왕의 이야기를 담은 <세가>에 편입시킴으로써 뒷날 논란을 일으켰지만, 역사에 대한 그의 깊은 헤아림은 다른 어떤 역사가도 따르지 못할 만큼 대단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은 12세기 끝자락, 우리 땅에서 봉기했던 노비 만적萬積도 소리 높여 외친 부르짖음이었다. 사마천은 2천여 년 전에 벌써 무등無等한 세상을 꿈꾼 휴머니스트였다.
진섭의 봉기는 진나라의 폭정은 옛 제후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곳곳에서 뒤를 이었다. 진섭의 죽음도 이 불길을 막지 못했다.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하나였던 남방의 큰 제후국 옛 초楚 나라 땅에서도 요원의 불길처럼 세찬 봉기가 잇달았으니, 이는 벌써 어떤 이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예에 지나지 않았다.『사기』「항우본기項羽本紀」에 이 예언이 있다.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하는 데 초나라는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회왕懷王이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래 초나라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를 가련하게 여겼다. 그러기에 초나라 남공은 이렇게 일렀다.
“초나라에 세 집만 있어도,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건 분명 초나라가 될 것이다.”
夫秦滅六國, 楚最無罪. 自懷王入秦不反, 楚人憐之至今, 故楚南公曰 : “楚雖三戶, 亡秦必楚也.”
▶ 저 자리는 내 자리
역사는 이미 세세대대로 초나라를 위해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운 항씨項氏 집안 누군가의 등장을 예고했다.
진나라 시황제가 회계會稽 지방을 순유하며 절강浙江을 건널 때 항량項梁이 항우와 함께 구경을 했다. 이때, 항우가 이렇게 말했다.
“저 자리는 내가 취하여 앉을 거야.”
항량의 항우의 입을 막으며 일렀다.
“허튼소리 말아라, 삼족이 멸할라!”
항량은 이때부터 항우를 기이하게 여겼다. 항우는 키가 여덟 자 남짓에다 힘은 무쇠 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며, 재주와 기세는 다른 사람을 앞질렀다. 오중吳中 지방의 자제들도 모두 항우를 벌써 두려워했다.
秦始皇帝遊會稽, 渡浙江, 梁與籍俱觀. 籍曰 : “彼可取而代也.” 梁掩其口, 曰 : “毋妄言, 族矣!” 梁以此奇籍. 籍長八尺餘, 力能扛鼎, 才氣過人, 雖吳中子弟皆已憚籍矣.
초나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항우가 진나라의 폭정에 일어난 각지의 호걸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때맞추어 유방도 진나라의 폭정에 맞서 의거했다. 당시 그는 패현沛縣 땅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이었다. 먼저『사기』「고조본기高祖本紀」첫 번째 단락을 보며 사마천이 기록한 그의 탄생을 함께하자.
고조는 패풍읍沛豊邑 중양리中陽里 출신으로 성은 유劉요 자는 계季이다. 그의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며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다. 그의 어머니 유온은 일찍이 큰 물 곁에서 쉬다가 꿈에 신령과 만났다. 이때,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날이 어두워졌다. 태공이 와서 보니 교룡이 아내의 몸 위에 있었다. 이후 아이를 가지게 되어 마침내 고조를 낳았다.
高祖, 沛豊邑中陽里人, 姓劉氏, 字季. 父曰太公, 母曰劉媼. 其先劉媼嘗息大澤之陂, 夢與神遇. 是時雷電晦冥, 太公往視, 則見蛟龍於其上. 已而有身, 遂産高祖.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을 보면, 족보도 없는 평범한 집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 ‘태공’은 그저 ‘동네 할아버지’, 어머니 ‘유온’은 ‘유씨네 아주머니’, 아, 고조 유방의 자 ‘계’는 이 집 아들 가운데 ‘넷째’를 가리킬 뿐이다. 교룡과 교통하여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여느 영웅의 탄생 신화와 닮은 구조로 유방이 개국 황제가 된 다음에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어떻든 십 리마다 하나씩 두어 우편과 치안 등을 담당했던 말단 중의 말단이었던 유방은 귀족 집안 출신의 항우와는 신분상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이런 유방에게도 항우와 비슷한 모습이 있다.「고조본기」의 기록이다.
고조는 일찍이 함양에 가서 요역을 담당했던 적이 있다. (한 번은 진시황이 수레에 올라 바깥 순시에 나섰는데) 사람들과 함께 늘어서서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진시황을 보자 길게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아, 대장부라면 당연히 이래야지!”
高祖常繇咸陽, 縱觀, 觀秦皇帝, 喟然太息曰 : “嗟乎, 大丈夫當如此也!”
어떤가? 결은 다르지만 항우의 ‘허튼소리’와 본질은 하나 아닌가? 행동이 생각을 앞서는 다혈질과 깊은 생각 뒤 조곤조곤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 아니면 그냥 직선과 곡선. 항우와 유방, 사마천은 이 둘을 모두 황제의 위치에 올렸다. 사마천은「항우본기」를 앞에, 그리고「고조본기」를 바로 뒤에 나란히 둠으로써 역사를 보는 그의 시각을 두드러지게 내보였다. 항우와 유방의 다른 결이 두 사람이 천하를 두고 다섯 해 동안 벌인 초한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었다. 유방이 이기고 항우가 졌다. 이긴 자는 서한西漢 2백 년을 여는 개국 황제가 되었고, 진 자는 서른한 살의 피 끓는 한 생을 끝내야 했다.
기원전 206년 8월 한여름에 시작된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벌인 초한전쟁은 기원전 202년 12월 한겨울에 막을 내렸다. 햇수로 다섯 해, 옹근 네 해에 넉 달이 더해진 이 기간에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도 중원의 전역 곳곳이었다. 전투에 앞장섰던 장수들의 이합집산도 다 꼽기에는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였다. 두 진영의 참모들의 계략도 무릎을 치며 탄복할 만큼 기상천외했다. 그런데, 사마천의『사기』130편 곳곳에는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인간의 덕목이 조각조각 깨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죽비를 안긴다.
▶ 장면 하나-전쟁터에서 간신히 지켜진 예의
먼저「항우본기」에서 한 도막을 꺼내 보자.
이때, 팽월彭越이 양梁 땅에서 몇 차례나 초나라 군대에 반격을 가하며 식량 보급로를 끊었기에 항우는 걱정이 컸다. 항우는 높고 커다란 도마를 설치하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를 눕힌 뒤 유방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쳤다.
“지금 급히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아 죽일 것이니라.”
유방이 되받았다.
“내가 너와 함께 회왕懷王의 신하가 되어 그분의 명령을 받으며 형제가 되기로 약조했으니, 내 아버지가 바로 네 아버지이거늘, 네 아버지를 꼭 삶아 죽인다면, 그래, 나에게도 그 고깃국 한 그릇을 보내게.”
항우는 몹시 분노하여 태공을 죽이려고 했다. 이때, 항백項伯이 입을 열었다.
“천하 대사는 아직 예측할 수 없네. 게다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자는 가솔을 염려하지 않는다네. 태공을 죽일지라도 좋은 점은 없고 오로지 재앙만 더할 따름이네.”
항우는 항백의 말을 따랐다.
當此時, 彭越數反梁地, 絶楚糧食, 項王患之. 爲高俎, 置太公其上, 告漢王曰 : “今不急下, 吾烹太公.” 漢王曰 : “吾與項羽俱北面受命懷王, 曰‘約爲兄弟’, 吾翁卽若翁, 必欲烹而翁, 則幸分我一桮羹.” 項王怒, 欲殺之. 項伯曰 : “天下事未可知, 且爲天下者不顧家, 雖殺之無益, 祇益禍耳.” 項王從之.
만약 이때,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 죽였더라면 역사에 오명을 길이 남겨야 했지만, 막냇삼촌 항백의 말을 좇았기에 작으나마 예의를 아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항백의 권고도 실상 예의보다는 그들에게 돌아올 이익을 셈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상대방의 생명쯤은 한낱 파리 목숨이었다. 제 이익 때문일망정 상대편 한 사람의 생명이 지켜졌다는 사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핀 꽃 한 송이, 어쨌든 아름답다.
▶ 장면 둘-매정한 아버지
항우의 초나라 군사도 사람을 보내 패현으로 달려갔다. 유방의 가족을 잡아 손에 넣어야 했다. 유방의 가족은 이미 도망한 뒤였다. 가족은 유방과 만나지 못했다. 유방은 길가에서 아들 효혜孝惠와 딸 노원魯元을 만나 수레에 함께 탔다. 항우의 병사가 유방의 수레를 뒤쫓아 왔다. 다급해진 유방이 효혜와 노원을 수레 밖으로 밀어냈다. 등공滕公이 수레에서 내려 이들을 안아 올렸다. 이렇게 안아 올리기를 여러 차례. 등공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다급해도 수레를 더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어찌 이들을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유방은 마침내 위기를 벗어났다.
楚軍也派人追往沛縣, 掠取漢王家眷. 家眷都已逃亡, 沒有和漢王相見. 漢王在路上遇到了孝惠, 魯元, 就用車拉着一块兒走. 楚軍騎兵追赶漢王, 漢王着急了, 把孝惠, 魯元推下車去, 縢公便下車把他們抱上來, 這樣推下抱上了好幾次. 滕公說 : “事雖危急, 不是可以把車赶得快一些! 怎麽丢棄他們!” 漢王終于脫身而出.
팽성彭城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유방이 쫓기는 장면. 역시「항우본기」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수레에 몸을 실은 유방은 힐끔 뒤돌아본다. 뒤쫓는 적의 기병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잡히면 모든 상황은 끝.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외딸을 난리 중에 만나 적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탈출 중이다. 적보다 빨라야 산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제 살기 위해 사랑하는 자식을 버리려고 했을까. 유방과는 어릴 때부터 동무였던 등공 하후영夏侯嬰의 사람 사랑이 또 한 송이 꽃이다.
한 마디 덧붙이면, 등현滕縣의 현령으로 봉직한 경력 때문에 등공으로 불리게 된 하후영은 뒷날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와 벌인 전투에서 포위당한 고조 유방을 위험에서 탈출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다.
▶ 장면 셋-혈안血眼과 광분狂奔
다섯 해 동안의 초한전쟁 중 크고 작은 전투는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터졌다. 마지막, 해하垓下에서 벌어진 전투로 초한전쟁은 막을 내렸다. 최후의 승자는 유방, 그리고 패자는 항우. 장기판에서 붉은 빛깔의 한漢과 푸른 빛깔의 초楚는 시골길을 잠시 벗어난 느티나무 아래 마주앉은 늙은이 손에서 승패를 겨루고 있지만, 역사에서의 승패는 기원전 202년 11월에 결정이 났다.
한신韓信이 이끄는 30만 대군이 항우가 이끄는 9만 병사와 맞붙은 이 전투의 과정을 사마천은 마치 눈에 보이는 듯이 묘사했다. 여기,「항우본기」마지막 부분, 산 자의 이익을 향한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지, 사마천은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원형 그대로.
오직 항후 한 사람이 유방의 한나라 병사 몇 백 명을 죽였다. 항왕도 몸에 열 군데 넘게 상처를 입었다. 항왕은 고개를 돌려 유방의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자넨 내 옛 동무가 아닌가?”
여마동은 등 뒤로 항왕을 가리키며 왕예王翳에게 일렀다.
“이분이 바로 항왕일세.”
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니, 그쪽에서는 황금 1천 근에 1만 호의 봉읍으로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데, 내 이제 너희들에게 덕을 베풀겠네.”
이 말을 마치자 곧 스스로 제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항왕의 목을 베어 내자 다른 기병들이 항왕의 몸뚱이를 차지하려고 서로 엉켜 짓밟았다. 이러다가 저희끼리 죽인 자가 몇 십 명이나 되었다. 결국, 낭중기郎中騎 양희楊喜, 기사마 여마동, 낭중郎中 여승呂勝과 양무楊武가 각각 항왕의 지체를 하나씩 차지했다. 다섯 사람의 손에 넣은 몸뚱이를 합쳐 놓으니 분명 항왕이었다. 상으로 내리려고 준비한 토지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로, 왕예는 두연후杜衍侯로, 양희는 적천후赤泉侯로, 양무는 오방후吳防侯로, 그리고 여승은 열양후涅陽侯로 봉했다.
獨籍所殺漢軍數百人, 項王身亦被十餘創. 顧見漢騎司馬呂馬童, 曰 : “若非吾故人乎?” 馬童面之, 指王翳曰 : “此項王也.” 項王乃曰 : “吾聞漢購我頭千金, 邑萬戶, 吾爲若德.” 乃自刎而死. 王翳取其頭. 餘騎相蹂踐爭項王, 相殺者數十人. 最其後, 郎中騎楊喜, 騎司馬呂馬童, 郎中呂勝, 楊武各得其一體. 五人共會其體, 皆是. 故分其地爲五 : 封呂馬童爲中水侯, 封王翳爲杜衍侯, 封楊喜爲赤泉侯, 封楊武爲吳防侯, 封呂勝爲涅陽侯.
현상금으로 목에 내걸린 황금의 힘이 하나의 우주와 맞먹는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제 몸 하나 내어주어 덕을 베풀겠다는 항우의 마지막 한 마디는 참으로 비장하다. 전쟁은 항우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겼다. 황금 1천 근과 봉지를 나누어 가진 그들도 인간으로서 치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모든 이를 치욕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승리한 자나 패배한 자나 모두 패자이다.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치러진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은 그때마다 패자를 양산했다. 뒤를 이어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을 피하기로 굳게 다짐했지만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욕망은 긴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쉬지 않고 치솟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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