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62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260년까지 무려 세 해 동안 장평長平(지금의 산시성山西省 가오핑시高平市) 땅에서 벌어진 ‘장평대전長平大戰’은 전국시대 막바지 누가 마지막 패자가 되느냐를 놓고 겨룬 큰 전쟁이었다. 맞상대는 조趙 나라와 진秦 나라. 당시 조나라 군주 효성왕孝成王은 ‘호복기사’로 이름을 떨친 무령왕의 손자였으며, 진나라 군주 소왕昭王(소양왕昭襄王이라고도 함)은 상앙商鞅이 추진했던 개혁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밀고 나간 혜왕惠王의 손자였다. 이들이 천하를 둔 건곤일척의 패를 던졌다.
상앙을 곁에 두었던 진나라 효공 이후 이 나라의 모든 얼개는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이 되기 위한 전시 체제였다. 전쟁터에서 베어 온 적군의 머리 숫자가 곧 논공행상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체제를 몇 십 년 동안 이어온 진나라는 지금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그러나 진나라와 장평에서 맞선 조나라도 진나라 혼자서는 쉽게 꺾을 수 없는 상대였다. 불과 3십여 년 전, 무령왕이 호복기사로 닦은 나라의 힘이 아직은 약하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조나라에는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그리고 조사趙奢 등의 쟁쟁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싸움은 장평을 포함한 상당지구上黨地區라는 이익을 앞에 두고 조나라 효성왕이 부린 욕심이 화근이 되어 터졌다. 상당지구는 성읍이 열일곱 개나 될 만큼 커다란 땅덩어리였다. 이곳은 애초에 한韓 나라 땅이었지만 진나라가 이곳을 공격하자 한나라에서는 이 땅을 조나라에 넘기기로 결정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조나라 효성왕이 굴러온 이 땅을 공짜라며 냉큼 받아들인 게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키웠던 것이다. 이를 진나라 소왕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내세웠고, 진나라는 왕흘王齕을 장군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태가 지나도록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몇 개의 성읍을 이미 진나라에 내어준 상태에서 싸움터에 나선 염파는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쌓은 채 자리를 굳게 지켰던 것이다. 진나라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상당지구까지 군량과 마초를 공급하는 데 어려움이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조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에서 상당지구까지의 거리보다 진나라 도성 함양에서 상당지구까지의 거리가 직선거리로 두 배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나라도 느긋할 수만은 없었다. 아무런 전과도 없는 싸움이 길게 이어지자 궁궐 안에서부터 조바심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진나라가 꺼내 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반간계’였다. 진나라가 무서워하는 조나라 장군은 조괄趙括이지 염파가 아니라는 말을 슬금슬금 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귀가 얇았던 조나라 군주 효성왕은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을 대장으로 내세웠다. 이는 결과적으로 효성왕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조괄이 앞으로 나서자 진나라는 비밀리에 백기白起를 대장으로 내세웠다. 이제 싸움은 조괄과 백기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전국 칠웅 가운데 백기에 맞설 만한 장군은 없었다. 조괄의 아버지 조사라면 백기의 상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 조사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괄이 효성왕의 명령을 받아 장군이 되어 떠나기에 앞서 그의 어머니가 급히 효성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먼저 이렇게 말했다.「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이다.
“(제 아들) 괄括을 장군으로 삼으면 아니 되옵니다.”
왕이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括不可使將.” 王曰 : “何以?”
효성왕의 이 물음에 조괄의 어머니의 답이 길게 이어진다. 조괄의 아버지 조사를 곁에서 가까이 함께했던 여인이었으며 조괄을 제 몸으로 낳아 기르며 곁에서 가까이 보았던 어머니였기에 먼저 아버지와 아들을 자세히 비교한 뒤 장군으로 파견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예전에 제가 괄의 아버지를 모실 때, 제 아들의 아버지는 당시 장군이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먹여 살리는 이는 수십 명이었고, 벗이 된 자도 수백 명이었습니다. 그분은 왕이나 종실에서 내려 준 물품은 모두 군대의 벼슬아치나 사대부에게 주었으며, 전쟁터로 나아가라는 명령을 받으면 그날부터 집안일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아들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자 동쪽을 향해 앉아 부하들의 인사를 받고 있지만 군대의 벼슬아치 가운데 우러르는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 내리신 금과 비단도 집으로 가져와 감추어 두고 날마다 이익이 될 만한 땅과 집을 살 만한 것은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어떻게 그의 아버지와 같으리라 믿으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씀씀이가 다르니 왕께서는 부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始妾事其父, 時爲將, 身所奉飯飮而進食者以十數, 所友者以百數, 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 受命之日, 不問家事. 今括一旦爲將, 東向而朝, 軍吏無敢仰視之者, 王所賜金帛, 歸藏於家, 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 王以爲何如其父? 父子異心, 原王勿遣.”
이 여인이 왕께 올린 요청은 논리가 자못 정연할 뿐만 아니라 간절하고 정성스럽기 그지없다. 일찍이 똑똑하기로 소문난 아들을 도시 칭찬하지 않는 남편이 야속하여 까닭을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 조사는 ‘그 아이는 너무 쉽게 말을 하오. 조나라가 그 아이를 장군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장군으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대는 틀림없이 파멸당할 것이오.’, 이렇게 대답했었다. 이론에만 밝을 뿐이지 실제 전투에 임하면 아들에게 해결 능력이 부족함을 이미 잘 알았던 것이다.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아비였고, 남편의 말을 들으며 가슴에 깊이 새긴 이는 아내 된 여인이었다.
이 여인의 요청에 효성왕이 내놓은 대답은 단 두 마디였다.
“어머니는 간여하지 마시오. 내 벌써 결정했소이다.”
그러나 조괄의 어머니는 할 말 다하고 물러섰다.
“내 아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내게 아들의 잘못을 연루시켜 벌을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어쩔 수 없게 되자 집안이 함께 망하는 최악의 경우를 막으려는 여인의 지혜였다.
장평대전의 결과는 조나라의 참패였다. 진나라가 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이 되기까지는 아직 4십 년 가까이 남았지만 장평대전을 끝으로 천하의 대세는 이미 진나라가 확실하게 잡았다. 조나라는 장평대전을 교훈으로 삼으며 다시 일떠서기에는 패배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무릎 꿇은 조나라 병사 45만 명을 생매장하며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쇄기를 박았다. 그러나 이렇게 땅에 묻은 원한은 통일 진나라 말엽부터 유방이 한나라를 열기까지 벌어진 ‘새 전국시대’를 피로 물들이는 참혹한 모습을 재현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백기가 식량운송로를 끊어버리자 위기에 빠진 조괄이 정예부대를 이끌고 직접 앞장섰지만 전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조괄은 결국 백기 앞에 목을 내려놓아야 했다. 도성 한단까지 포위망으로 둘러싸인 효성왕은 초楚 나라와 위魏 나라 제후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오면서 조괄의 어머니를 죽이지 못했다. 이 여인이 앞서 자기에게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 말마저 없다면 역사를 읽는 재미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만약’은 역사 읽기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만약 조나라 효성왕이 이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더라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인의 현명한 판단에 군주가 자기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조나라는 그렇게 빨리 기울지 않았을 것이고 진나라는 최후의 일웅이 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부디 제 아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효성왕은 이 말에 귀를 열었어야 했다.
어떻든 예나 이제나 올바른 입이 있어도 열린 귀가 없으면 만사가 헛일이다. 귀를 닫으면 온갖 잡된 유혹이 눈을 어지럽힌다, 예나 이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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