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의 첫 번째 남총男寵-설회의薛懷義

촛불횃불 2023. 6. 11. 19:00

 당나라 세 번째 황제 고종 이치李治가 세상을 떠났다. 기원후 683년 섣달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앞서 한 장의 조서를 남겼다. 

 -태자 이현李顯을 황제의 자리에 즉시 앉혀라. 하지만 나라의 큰일 처리에 성근 부분이 있을 때는 천후天后의 가르침에 따라 결단토록 할지니라.

 여기서 이르는 천후란 바로 무측천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구도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고종 이치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조서는 대당의 땅덩어리를 두 손 받들어 다른 이의 손에 넘길 뻔한 일로 발전했다.

 사흘 뒤, 이현은 당나라 네 번째 황제 중종으로서 자리에 올랐고, 무측천은 황태후로 높여졌다.

 바로 이해, 무측천은 나이 예순으로 당시로서는 자못 늙은이였다. 그런데 온 천하를 흔들 만큼 큰 권세를 손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가슴 가득 넘치는 우수와 적막함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당 중종 이현

 바로 이때,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설회의'라는 사내가 등장한다. 사실 '설회의'의 본명은 '풍소보馮小寶'였으니, 이 사내가 무측천을 만나기 전까지는 낙양성 저자에서 잡화나 일용품을 지고 다니며 파는 장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낙양성은 지극히 번화하여 온갖 유혹에 넘치는 도시였다. 어떻든 풍소보는 일정한 거처마저 없는 떠돌이로서 낙양성 구석진 곳에서 전을 펴고 접으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건장한 체격에 자못 뛰어난 기상까지 넘쳐흘렀다. 장바닥에 펼친 잡화나 일용품이야 다 팔아도 큰 돈 손에 쥘 리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생계를 겨우겨우 이어갔다. 이렇게 평범하여 별 볼 일 없는 사내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권세가 뜨르르한 인물이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헤아릴 길이 없다. 

풍소보 곧 설회의

 제일 먼저 이 '천리마'을 알아본 '백락伯樂' 은 누구였을까? 바로 무측천의 양딸 천금공주千金公主 집안에서 종살이하던 하녀였다. 풍소보가 장마당에 펼쳐놓은 난전 앞을 지나던 이 하녀는 햇볕 아래 거므스름하게 빛나는 이 사내의 울퉁불퉁 불거진 근육을 보자 그만 가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는 풍소보와 눈 맞고 입 맞고 배까지 맞아 그 뜨거움이 대단해졌다. 제 발로 걸어온 이 미녀를 만나 깊은 관계까지 맺게 된 풍소보는 당연히 기쁨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었다. 

 얼마 뒤, 이 하녀는 풍소보를 남몰래 천금공주의 거처에까지 데리고 올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 이렇게 되자 봇물은 마구 터지기 시작하여 틈만 나면 이들 둘은 가만히 뒤섞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으랴, 일흔 살 된 공주가 이 하녀의 방문을 벌컥 열어제쳤겠다, 아, 눈앞에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천금공주의 눈빛은 젊고 건장한 사내의 몸뚱이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천금공주, 곧 안정공주-당고조 이연의 딸.

 풍소보의 입장에서는 시루째로 안겨진 복이었다. 천금공주를 받들던 하녀의 침대에서 공주의 화려한 침대로 옮겨졌으니, 이야말로 하늘 끝까지 오른 셈 아닌가. 천금공주는 풍소보를 손에 넣은 뒤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두려움에 젖기 시작했다. 사실 천금공주는 당나라 개국 황제 고조 이연李淵의 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측천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때, 무측천의 눈을 벗어난 순간 가차없이 제 목을 내려놓을 수도 있잖은가.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천금공주는 밤이면 밤마다 외로움으로 몸 뒤척일 무측천에게 풍소보를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천금공주에게는 무측천의 호감을 얻는 게 훨씬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천금공주는 남몰래 풍소보를 데리고 무측천의 침궁으로 찾아갔다. 

무측천

 젊은 데다 훨칠한 풍소보를 본 무측천은 그만 뜻밖의 기쁜 일을 만나 어쩔 줄 몰라라 했다. 며칠 뒤, 그녀는 천금공주에게 한아름 큰 상을 안겼다. 물론 그녀는 풍소보를 정식으로 자기 곁에 머물게 했다. 이제 풍소보는 낙양성 저잣거리 장사아치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던 사나이에서 태후의 새 애인이 되었다. 물론 천금공주는 자칫 제 모가지 날아갈세라 전전긍긍하하며 두려움에 떨던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고, 무측천은 마침내 독수공방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날마다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영예는 풍소보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지만 마침내는 이 역할을 소화하는 데 거침이 없게 만들었다. 

   남의 눈을 슬그머니 피해야 하는 이런 생활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무측천은 풍소보에게 정식 이름을 주어 오랫동안 제 곁에 두기로 마음을 굳혔다. 밤낮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얼마 뒤, 무측천은 풍소보를 출가한 스님으로 만들고, 이름도 회의懷義로 내리며 천고의 이름난 사찰 백마사白馬寺의 주지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풍소보는 불경을 강의한다는 명목으로 무측천의 궁전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아, 여기에 더하여 무측천은 평양공주의 남편의 성을 그에게 내렸으니, 이제는 풍소보에서 설회의로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변했다. 하찮은 방물장수요 장돌뱅이였던 풍소보는 고귀한 스님 설회의가 되어 여황제 무측천의 남총으로 권세를 누렸다.  

 

 무측천의 첫 번째 남총 풍소보, 아니 설회의의 권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했던 무측천의 타고난 끼(?)도 문제였지만, 권력의 맛을 안 남총 설회의의 탐욕, 더 큰 권력을 휘두르려는 욕망이 그를 나락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