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치 3

최후의 승자-박희薄姬

여치呂雉와 척부인戚夫人의 화해 없는 갈등 1. 어귀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얼개로 3천여 년의 역사를 아울렀다. 역사의 지평을 한껏 밀어 올리며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의 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본기’는 자신의 눈에 비친 제왕들의 이야기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이 ‘본기’ 열두 편 가운데 보란 듯이 의젓하게 한 편장을 차지한 「여태후본기」를 두고 뒤의 여러 학자들이「항우본기」와 더불어 갑론을박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여태후본기」는『이십사사二十四史』로서『사기』의 바로 뒤를 이은『전한서前漢書』도「고후기高后紀」로써 황제의 역사에 편입시켜 사마천과 같은 시각으로 취급했다. 이는「항우본기」를『한서』에서는「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으로 한데 엮은 것..

백등산白登山에 갇힌/가둔 군주-유방劉邦 & 묵돌冒顿

백등산白登山은 지금의 마포산馬鋪山, 산시성山西省 북쪽 네이멍구 자치주와 접경을 이루는 다퉁시大同市 동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00년,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이곳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찬찬히 짚어 보자. 더하여 잠시 찾아온 평화도 한번 셈해 보자. ▶ 머리 먼저「고조본기」부터 펼친다. 고조 7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한왕 신은 곧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모반했다. (그의 부장) 백토만구신白土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원래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漢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토벌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 信因與謀叛太原. 白土曼..

세 치 혀가 살린 목숨-괴통蒯通

고조 유방의 반응 기원전 191년, 이 해는 한나라 고조 11년, 나라를 연 지 이제 겨우 10년을 넘겼지만 나라 안팎의 형세는 태평성세가 아니었다. 스스로 ‘대왕代王’을 자처하던 진희陳豨가 지금의 허베이河北 땅에서 획책한 모반도 이때였다. 당시 그는 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는 뛰어난 인재들도 여럿이었다. 진희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며 모반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조 유방은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유방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평정하는 길에 나섰다. 바로 이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고조 유방의 출정에 따르지 않고 도성에 남아 진희의 모반에 호응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을 진희에게 은근한 방법으로 알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신은 먼저 도성 안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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