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고趙高는 부소扶蘇에게 내리는 황제의 조서를 제 손에 쥐고 있었기에 공자 호해胡亥에게 이렇게 일렀다.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왕으로 봉해진 여러 아들에게 내린 조서는 없고 오로지 맏아들에게 내린 조서만 있을 뿐입니다. 그가 오면 곧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될 터인데, 그러면 그대에게는 한 뼘의 봉토도 없을 터이니, 이를 어쩌렵니까?”
趙高因留所賜扶蘇璽書, 而謂公子胡亥曰:“上崩, 無詔封王諸子而獨賜長子書. 長子至, 卽立爲皇帝, 而子無尺寸之地, 爲之奈何?”
사마천의『사기史記』「이사열전李斯列傳」가운데 환관 조고가 정변을 획책하는 부분만 떼어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부분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으스스하다.
나에게는 이제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렇다, 내 나이 열세 살이 되던 해였다. 그날, 국방색 지프차 한 대가 학교 가는 길에 바람을 가르며 지나갔다. 지붕 없는 이 차에는 운전병 곁에 선글라스를 쓴 군인 하나가 한 쪽 발을 바깥쪽으로 비스듬하니 내민 채 앉아 있었다. 우리의 미래는 이날 이 지프차가 일으킨 안개보다 더 진한 먼지로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날, 나는 교무실에 들어갔다가 선생님들이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다. 무서웠다. 어디서 총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혁명공약을 외워야 했다. 나는 이들이 무언가 더 나쁜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언제나 불안했다. 이 어른들에게는 밝은 대낮에 모두에게 알리지 못할 무슨 음모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쉿, 어머니는 곧게 편 집게손가락을 꼭 다문 입술 가운데에 곧게 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쉿, 이 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럴 때면 찬바람이 으스스 우리 곁을 언제나 에워쌌다.
그해, 서른을 갓 넘어 첫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 궁정동에서 울린 총소리와 함께 그 사람의 우주는 끝났지만 ‘서울의 봄’은 한파 앞에 열리지 않았다.
‘민주공화국’은 교과서 안에서만 찬란하게 빛났다. 나의 슬픈 현대사는 ‘민주’도 ‘공화’도 없었다. 아, 이제야 '민주공화국'이구나, 하다가도 금세 사라질 때면 통한이 가슴에 똬리를 튼다.
지금, 나의 간절한 소원은 ‘민주공화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