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말/5. 다섯째 마당 - 神

정사초鄭思肖의 지절

촛불횃불 2021. 9. 21. 19:08

 "어떤 놈이 흙을 훔쳐갔다는 것을 그대는 아직도 모르는가?"

 

 "흙도 뿌리도 그리지 않고 잎과 꽃만 그렸으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어떤 이의 이 물음에 정사초가 버럭 목소리를 높인 되물음이다. 

 "아니, 어떤 놈이 흙을 다 훔쳐갔다는 것을 그대는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호통이었다. 이 호통 속에는 원元에 나라를 내어준 송宋의 유민으로서의 애절하고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녹아 있다. 

 나라가 망하자 그는 자기 이름까지 '사초思肖'로 바꾸었다. '초肖'는 '조趙'의 오른편을 취한 글자이다. 조씨가 세운 자기 조국 송宋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다. 송을 세운 황제가 바로 '조광윤趙匡胤' 아닌가.

 

정사초가 그린 묵란, 오른쪽 제시를 우리말로 옮기면 '언제나 고개 숙여 희황에게 묻노니/그대는 어드메 있다가 여기 왔는고/아직 그리기 전에 코를 벌리니/옛날 그 향기 온누리에 가득하구려', 이러하다. 희황은 아득한 옛적 복희씨를 가리키지만 이 시에서는 예스럽고 우아한 묵란을 이른다. 제시 끝에 보이는'소남所南'은 정사초의 이름이다.

 

 정사초의 지조와 절개가 서릿발이다. 그가 그린 국화 제시에도 무릎 꿇지 않으려는 그의 기개가 자못 오롯하다. 

 

 꽃이 피어도 온갖 꽃무리에 함께 있지 않고,

 홀로 성근 울타리 아래 있어도 그 멋은 끝이 없네.

 차라리 가지 끝에 향기 품고 시들지언정,

 어찌 불어오는 북풍에 떨어지랴!

 

 花開不幷萬花叢, 

 獨立疏籬趣未窮.

 寧可枝頭抱香死,

 何曾吹墮北風中.

 

 역사에는 외세의 바람 앞에 자기 한 몸의 이익 좇아 무릎 꿇는 이들도 있지만 죽더라도 서서 죽기를 기꺼이 원한 인물도 많다. 그러기에 역사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는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라고 강조한 추사 김정희는 정사초가  난초로 이름을 얻은 것은 '인품'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인품의 밑바닥에 나라 사랑하는 굳은 신념이 깔려 있다고 믿는다.  

 참, 인터넷 검색창에 '정사초의 묵란도'를 입력하여 열면, 그가 그린 흙 없고 뿌리 없는 묵란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감상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 보시라.  

 

정사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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