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晋 나라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일흔인데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요?”
사광이 물었다.
“어찌 촛불을 밝히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평공이 되받았다.
“아니, 신하된 자가 어떻게 임금과 농지거리를 할 수 있소?”
이에 사광은 이렇게 일렀다.
“눈 먼 제가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농지거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떠오르는 태양 같고, 장년이 되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한낮의 태양 같고, 늘그막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의 밝음과 어둠 속을 걷는 것,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평공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외다!”
(晉平公問於師曠曰:“吾年七十欲學,恐已暮矣.” 師曠曰:“何不炳燭乎?”平公 曰:“安有爲人臣而戲其君乎?”師曠曰:“盲臣安敢戲其君乎? 臣聞之,少而好學,如日出之陽;壯而好學,如日中之光;老而好學,如炳燭之明. 炳燭之明,孰與昧行乎?”平公 曰:“善哉!”)
서한 시대, 문학으로 이름을 날린 유향劉向의 『설원說苑』「건본建本」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의 연주에 학의 무리가 춤출 정도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사광師曠은 춘추시대 진晋 나라 사람이다. 그는 기원전 572년에 태어나 기원전 532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겨우 마흔 해를 이 세상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는 뒷사람의 마음을 감동으로 출렁거리게 만든다. 그는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그는 아예 ‘눈 먼 신하’라고 자처하였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임금 귀에 달콤한 말로 아첨하며 꼬리치는 무리와는 아예 함께 두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곧은 인물이었다.
눈먼 장님은 세상을 전혀 보지 못할까? 나는 눈먼 장님이 눈 밝은 사람보다 세상을 훨씬 더 깊이 꿰뚫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을 못 가지만 눈먼 장님은 서울을 간다는 우리 속담에 벙어리보다는 장님이 더 나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사전에서는 한정하여 풀이했지만 나는 그 이면에 눈먼 장님의 마음에 깊이 감추어진 혜안을 짚었다고 믿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의 끝장을 보노라면 이들은 눈 뜨고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그대로이다. 눈은 멀었지만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이미 세상의 참모습을 누구보다 잘 보아 판단할 수 있다. 사광이 바로 그랬다.
평공은 앞 못 보는 사광을 볼 때마다 사뭇 안타까웠다.
“어두움 속에서 당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크겠소!”
귀 밝은 사광이 이 말을 지나칠 리 없었다.
“이 세상에는 다섯 가지 어두움이 있습니다. 신하가 뇌물을 챙긴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임금이 알지 못하면 이게 바로 어두움입니다. 임금이 인재를 바로 골라 쓰지 못하면 이것도 어두움이며, 임금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분별하지 못함도 어두움입니다. 또 임금이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마구 전쟁을 일삼는 일도 어두움이고, 임금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해 아무런 생각도 없음이 또한 어두움입니다.”
평공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조리정연한데다 강건하여 힘이 넘치는 그의 정치적 견해에 깊이 감동할 뿐이었다. 사광은 이런 인물이었다.
지금, 2천 5백여 년 전의 인물 사광을 그린다. 최고지도자의 전횡을 보고도 입을 다물었던 이들은 앞 못 보는 장님이면서도 바른 말을 꺼리지 않았던 춘추시대의 사광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또 배움의 길에 끝이 없다는 말은 예나 이제나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데는 지금도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 사광의 용기가 더욱 빛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