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마당

독서법讀書法

촛불횃불 2022. 10. 4. 21:04

  책을 모으고 간직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잘 보는 자는 오로지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며, 책상을 깨끗이 닦고 향을 피운다. 그리고 책을 말거나 책장의 귀를 접지 말 것이며, 또 손톱으로 글자에 자국을 내지도,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도 말 것이며, 게다가 책을 베개 삼지도 말 것이며 자르고 찌르지도 말 것이니라. 훼손되면 바로 손을 보고, 책을 볼 때는 펼치고 보지 않을 때는 덮어 놓아야 한다.

 (聚書藏書, 良匪易事. 善觀書者, 澄神端慮, 淨几焚香, 勿卷腦, 勿折角, 勿以爪侵字, 勿以唾揭幅, 勿以作枕, 勿以夾刺, 隨損隨修, 隨開隨掩.)

 

 

 

  명나라 때 학자 호응린胡應麟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에서 데려온 구절이다. 이만하면 책이 곧 제 몸이다. 속독, 정독, 통독, 발췌독……,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호응린이 가졌던 이런 자세부터 새기는 게 독서법의 출발일 듯하다.

  내가 사는 곳 도서관에서 빌려온 박완서 선생의 산문집노란 집을 읽다가 어느 쪽 한 장이 반 남짓 접힌 자국으로 앓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 , 세상에, 이런 일이! 책 읽는 이가 어째 이런 일을. 내 몸 한 부분이 접질린 듯 무지근하게 아프다.

일화 한 가지. 젊은 친구가 논문 한 편을 내게 보내왔다. 1백 쪽 되는 글을 몇 차례 읽은 뒤 소감을 곁들여 꼭 집어 가리킬 점을 적어 이메일로 보냈더니, 이렇게 답신이 왔다.

  -참으로 부족하지만, 몇 해 동안 공부하여 엮은 글입니다. 자칫 뜨거운 라면 냄비 받침이 될세라 노심초사했었는데, 드디어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의욕만으로 재단한 저를 양해하시고 함부로 책을 만든 죄를 용서해 주소서. 비록 명산에 보관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간장 항아리 덮개로 쓰지는 마소서. 

  (伏望聖上陛下, 諒狂簡之裁, 赦妄作之罪, 雖不足藏之名山, 庶無使墁之醬瓿.)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어 임금께 올리며 쓴 글이다. 예나 이제나 힘 쏟아 작품을 만들어낸 이의 심정이 이러함을 글 읽는 이는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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