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마당

말의 가치

촛불횃불 2022. 10. 2. 08:07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 유정식劉廷式은 본시 농민의 아들이었다.

  째질 듯이 가난한 옆집 노옹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젊은이와 혼인을 약속했다. 뒷날, 정식은 여러 해를 떨어져 지내며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옆집 노옹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딸은 병으로 두 눈이 멀고 집안은 끼니조차 이을 형편이 못 되었다. 정식은 사람을 넣어 예전의 혼약을 다시 살리려고 했지만 그쪽에서는 여자의 병을 까닭으로 정식의 청을 물리쳤다. 머슴살이로 살아가는 집안이라며 감히 사대부와 혼인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식은 예전의 약속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물리지 않았다. 노옹이 세상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이전에 이미 약속한데다 딸이 병을 얻었다고 하여 어떻게 혼약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둘은 결혼을 하였다. 게다가 결혼 뒤 부부 사이도 지극히 화목했다. 곁에서 부축해야만 걸을 수 있었던 그녀는 아이를 몇이나 낳기까지 했다. 정식이 그만 잘못을 저질러 자리를 물러날 형편에 감사가 폄적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가상히 여겨 너그럽게 봐주기도 했다.

뒷날, 정식이 강주江州의 태평궁太平宮을 관리할 때,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몽계필담>

  『몽계필담夢溪筆談』 「인사1人事一에서 가져왔다.

  제 입으로 나온 말은 곧 자기 생각이다. 말이 곧 생각이기 때문이다. 말에는 그 사람의 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다.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인물은 이미 성숙한 인격을 말할 자격이 없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언약한 바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식언食言은 자기 얼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자기를 온전히 세우려면 자기 입으로 내놓은 말을 삼켜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유정식은 참 선비이다. 말 집어삼키기를 예사로 아는 지식인이 하나둘이 아닌 지금이기에 그의 언행은 참으로 돋보인다. ‘공약쯤은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으로 셈하며 스피커 앞세우고 볼륨 높이는 정치인이 어디 한둘에 그치는가. 댐에 물 다 채우기도 전에 이미 똥물이 된 강을 바라보며 환경영향평가에 크게 고개 끄덕인 대학교수도 말의 책임을 등지고 양심을 내버린 가짜 선비일 수밖에 없다.

 

 위 가져온 글의 원문을 여기 붙인다.

 朝士劉廷式本田家. 鄰舍翁甚貧有一女約與廷式爲婚. 後契闊數年廷式讀書登科歸鄉閭. 訪鄰翁而翁已死女因病雙瞽家極困餓. 廷式使人申前好而女子之家辭以疾仍以傭耕不敢姻士大夫. 廷式堅不可與翁有約豈可以翁死子疾而背之卒與成婚. 閨門極雍睦其妻相攜而後能行凡生數子. 廷式嘗坐小譴監司欲逐之嘉其有美行遂爲之闊略. 其後廷式管幹江州太平宮而妻死哭之極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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