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청루의 여자가 된 황후① - 호황후胡皇后

촛불횃불 2021. 12. 5. 15:40

 호황후는 다른 사내와 사통하다가 뒷날 태후가 되고 나서도 줄곧 미남자를 곁으로 불렀다. 뒷날 북제北齊가 망하자, 그녀는 청루의 여자로 전락했다고 한다.[胡皇后便與別人私通, 後來當了太后, 也一直是面首不斷. 後來北齊亡國, 據說她淪落娼門.]

<야사일문野史逸聞> '제왕 뒤의 처량하고 요염한 그림자帝王身後裏的凄艶身影'

 

  호황후胡皇后의 가슴은 아직도 두근두근 뛰었다. 한참이나 지났지만 무성제武成帝 고담高湛 뒤에 섰던 화사개和士開의 모습이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재능과 덕망을 두루 갖추었다는 효소제孝昭帝 고연高演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겨우 이태 만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자 자리를 이은 고담은 날이면 날마다 술과 여색에 깊이 빠져 나랏일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건국에 공이 큰 신하는 물론 친왕까지 마구 죽이고 형수마저 옥죄며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이날, 고담이 심복 부하 화사개를 대동하고 호황후를 찾았던 것이다.

 

 화사개의 선조는 서역의 호인이었다. 서역을 본향으로 둔 이 양반의 핏속에도 작은 일에 거침없는 기상이 뜨겁게 흘렀을 것이다. 화사개의 아버지 화안和安은 남달리 예리한 판단력과 관찰력으로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이르렀다. 화사개는 남보다 더 이른 시기에 고담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가까운 미래에 황제의 자리가 고담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화사개는 고담이 무성제로 황제가 되자 황문시랑黃門侍郞에 임명되었다. 황제 곁을 지키며 모시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이날, 단 한 번 눈길에 불꽃이 인 호황후는 늠름한 모습에 남성다운 기개가 넘치던 화사개를 가만두지 않았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남몰래 오가며 서로 정을 통하기 시작했다.

 무성황후 호씨는 태어난 때도 세상을 떠난 때도 분명하지 않다. 단지 그녀의 아버지는 호연지胡延之, 어머니는 노씨盧氏라는 사실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선제 고양이 황제의 자리에 있던 시절, 장광왕長廣王 고담의 왕비로 뽑힌 호씨는 고위高緯와 고엄高儼, 두 아들을 낳았다. 고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녀는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맏아들 고위는 장차 황제의 자리를 이을 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호황후는 깊고 깊은 궁중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디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술과 여색에 깊이 빠져든 고담으로부터 생긴 깊은 골을 메울 길 없었다.

 한번 붙은 불은 활활 타오르는 데 전혀 거침이 없었다. 고담이 세상을 떠난 뒤, 태자 고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태상황후가 된 호씨는 거의 공개적으로 화사개와의 관계를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화사개도 자기를 총애하는 호황후 곁에 기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끝없이 키를 높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패를 모아 무리를 만들었다. 올곧은 신하들의 바른 소리를 잠재우려고 이들의 목을 내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이런 모습을 보며 남몰래 시퍼렇게 칼을 가는 사나이가 있었다. 호황후의 둘째아들 낭야왕瑯琊王 고엄이었다. 그도 화사개가 어머니의 정부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나랏일을 앞세우며 걱정하는 인물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천성이 바르고 곧았다. 그런 그가 뽑아든 칼은 끝내 화사개의 목을 내리고야 칼집으로 들어갔다.

 

무성제 고담의 모습

 

 곁에 있던 화사개가 사라지자 호황후의 가슴엔 서늘한 바람이 가득했다. 마음은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날리는 궁전 뜰이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온통 다 가린 듯했다. 너무 외로웠다. 그러나 달랠 길 없는 외로움 저쪽 끝에 길이 있었다. 호황후는 자기의 적막함과 외로움을 덜어줄 남총을 찾기 위하여 몇 차례나 대궐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남총으로 등장한 인물은 담헌曇獻이었다. 비구승이었다. 대궐 밖으로 나온 그녀가 찾은 곳이 절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화사개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이 사내를 보는 순간 한눈에 끌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 채 그대로 홀리고 말았다. 절집은 이제 이들 둘이 은밀히 만나 욕정을 푸는 장소로 변했다.

 호황후는 궁중의 웅장하고 화려한 생활이 오랫동안 되풀이되며 이미 몸에 익었기에 절집의 허술하고 하찮은 세간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궁중의 금은보화를 절집으로 가져다 치장했다. 이 정도라면 보는 이를 그런대로 참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고담과 함께 밤을 지내던 침상을 절집으로 옮겨 놓았다는 데 이르면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욕망의 끝을 가늠할 생각은 아예 그만두는 게 좋다. 그런데 욕망은 끝 간 데 없이 키를 높이지만, 그 욕망이 세상을 뒤엎을 만큼 의롭지 못할 때, 세상이 준비해둔 결정적 수단은 있다. 세상은 노란색 카드를 보여도 길 아닌 길로 질주하는 자에게 내미는 카드가 있다. 빨간색 카드가 그것이다. 퇴장 명령이다.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 곧 빨간색 카드는 사형 선고이다. 그래도 제 목숨 다하고 이 세상 떠난 이를 역사는 다시 무대에 불러내 사형 선고를 내린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 불의를 잇달아 저지르면서 세상의 바른 목소리에 귀 닫은 자에게 내리는 빨간색 카드는 가을날 서릿발처럼 차갑다.

 

 둘째아들 낭야왕 고엄이 화사개의 목을 내릴 때, 호황후는 정신을 번쩍 차려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절집으로 찾아가서 담헌을 남총으로 만들었을 때, 여기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세상은 그녀 눈앞에 빨간색 카드를 내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된 방탕한 생활은 호황후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게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담헌도 호황후와의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절집에는 담헌 말고도 준수하게 생긴 비구승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젊은 데다 힘도 넘쳤다. 호황후는 이들 젊고 힘 넘치는 비구승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마음을 달래고 몸의 욕망을 불태우는 데 이용했다. 그런데 호황후에게도 한 줌 양심이 있었던 걸까? 그녀도 비구승들이 궁궐로 드나드는 모습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이들 비구승에게 비구니로 차림을 바꾼 뒤 입궁하도록 했다. 여자로 차림을 바꾸어 꾸민 남자들이 호황후가 거처하는 안방까지 드나드는 형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을 만큼 꼭꼭 숨어도 세상에 드러나는 음흉한 자들의 꼬리를 수없이 보지 않았던가? 호황후가 벌이는 짓은 머리카락도 온전히 드러났고 꼬리도 한없이 길었다.

 

 어느 날, 고위가 어머니 호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고위는 어머니 호황후 곁에 있던 아름다운 비구니를 보자 그만 눈이 뒤집혔다. 일찍이 호황후가 남편인 고담을 수행했던 화사개를 보자 한 눈에 반하며 가슴이 뛰었던 경우와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솟아오르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한 고위는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도 깡그리 잊었다. 호황후 곁을 물러난 고위는 그 비구니를 당장 자기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함께 침대에 들어 뜨겁게 타오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비구니는 한사코 황제의 명령에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여봐라, 게 없느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황제가 소리를 높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문밖에 있던 궁인이 황제의 노여움에 찬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달려왔다.

“저년의 옷을 벗겨라.”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는 그대로 법이었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궁인이 달려들어 이 비구니의 옷을 강제로 벗겼다.

“헉!”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비구니로 분장한 비구승이었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자 놀라움은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황제는 자기 어머니 호황후의 추악한 모습을 단번에 알아냈던 것이다. 황제는 자기 어머니를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깊이 유폐시킬 수밖에 없었다.

 

남북조시대 북제의 강역

 

 훗날, 북제는 서쪽으로 길게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북주北周와의 싸움에서 패하며 무릎을 꿇었다. AD 577년, 28년 동안 계속된 북제는 막을 내렸다. 북주는 북제의 황족들 가운데 남자의 목은 모조리 내렸다. 그러나 같은 황족이라도 여자들은 모두 궁 밖으로 내쫓으며 제 힘으로 살 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호황후도 궁 밖으로 쫓겨나 민간에 섞이게 되었다. 입에 풀칠할 경제적인 바탕도 없었던 데다 농사짓고 길쌈하는 여염 생활도 원하지 않았던 호황후는 지난 날 자기가 황후였다는 명성을 밑천삼아 청루로 들어가 창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녀가 자기 곁에 있던 이에게 내뱉었다는 말 한 마디가 아직도 세상에 전한다.

-기생 노릇이 황후 노릇보다 더 즐겁소. [爲后不如爲妓樂.]

 ‘성性’이었을까? ‘성性’은 ‘심心+생生’이니 ‘하늘에서부터 타고난 바탕’이라, 호황후의 천성이, 아니면 본성이 그야말로 비할 데 없이 음탕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 갈고 닦아서 선하고 곧은 품성을 길러야 했다.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 여기 있다면 마땅히 여기에 길을 내어야 마땅하다.

 호황후도 세월의 흔적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늘그막에 이르러 이마에 늘어나는 주름도 어쩌지 못했지만, 욕정도 나이 따라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서 병으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살아온 한평생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호황후

 

 북제 무성제 고담의 정실 호황후를 생각하면, 이보다 몇 백 년 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의 생모 조희趙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얼핏 보면 호황후와 조희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 이 둘은 우리에게 쓴웃음을 안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희는 전국시대 말엽 조나라의 기녀로서 나중에 황후가 된 인물이지만 호황후는 황후였지만 나중에 기녀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인물이다.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태후로 추존된 조희가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노애嫪毐라는 사내를 구중궁궐로 끌어들여 욕망을 채운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진시황의 어머니 조희의 모습

 사내를 궁궐로 끌어들여 욕정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이 둘은 크게 닮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둘의 끝장이 불행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세상이 보내는 빨간색 카드는 실은 하늘이 만든 카드이다.

-교만, 사치, 방탕, 그리고 쾌락은 스스로를 사악함에 빠뜨린다.[驕奢淫泆, 所自邪也.]

<좌전左傳> '은공3년隱公三年'에서 데려온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