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중국 옛적에도 권력이 있으면 돈도 따른다고 했겠다, 춘추 말엽 중국 동남방에 치우친 큰 땅, 월越 나라 군주 구천勾踐을 재기하게 만든 범려쯤 되면, 재물을 통째로 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범려는 현명한 인물이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성신퇴功成身退'를 몸소 실천했다. 공을 세워서 이룬 뒤에는 자리를 물러나는 지혜, 그렇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지식'이라지 않고 '지혜'라고 이른다.
때는 기원전 536년, 춘추시대 초楚 나라 땅에서 태어난 범려는 집안은 비록 한미했지만 끊임없는 자기 연마로 박학다재했다. 이런 그를 당시 초나라 위정자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정치가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곳에서 제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동쪽으로 이웃한 월나라를 찾았다. 이 나라의 상대부에 이어 상국에까지 이른 그는 일찍이 북쪽으로 이웃한 오나라 군주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을 힘껏 보좌했다.
이보다 앞서 오나라 군주 부차의 선왕 합려는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화살을 맞은 후유증으로 세상을 버려야 했다. 합려는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태자를 곁에 앉히고 아비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패배의 아픔을 딛고 군사력 강화에 힘쓴 부차는 월나라를 깨뜨리고 승리를 움켜쥔다. 승리한 자가 승리의 기쁨에 깊이 빠지는 시간이 길어지면 패배의 날은 빠른 속도로 앞당겨진다. 기쁨의 달콤함은 치국을 게으르게 만들고 무릎 꿇은 상대방은 절치부심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게 마련이다. 오나라 군주 부차와 월나라 군주 구천이 꼭 이러하였다. '와신상담', 이 네 글자는 당시 구천의 모습 그대로이다. 긴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구천은 부차를 향한 원망과 분노를 현명한 인재의 등용과 백성들을 위무하는 데 쏟으며 오나라를 무너뜨릴 힘을 쌓기 시작했다. 등용된 인재로서 범려가 손꼽힌다.
구천은 월나라 땅을 손에 넣고 오나라 군주 부차를 무릎 꿇림으로써 마침내 패자가 되었다. 패자가 된 구천은 지난날, 회계산에서 겪은 치욕과 이 치욕을 함께 견디며 이겨낸 범려에게 이렇게 일렀다.
"월나라 땅의 한 부분을 떼어 내어 그대에게 주려 하오. 받지 않으면 짐이 그대로 벌하겠소."
이때, 범려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범려의 계책으로 패자의 자리에 오른 구천은 계속하여 그를 중용하려고 했지만, 범려는 한밤에 배를 띄웠다. 이 시대의 제일가는 미녀 서시와 함께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그는 제나라로 향했다. 그곳에 이른 그는 자기 이름까지 바꾸었다. ‘치이자피鴟夷子皮'를 취함으로써 스스로 '범려'에서 멀어졌다.
범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이는 계연이었다. 계연은 본시 물고기 잡는 어부였지만 그의 타고난 바탕은 아예 현인이었다. 구천이 패자가 된 데는 계연의 계책을 일곱 가지 가운데 다섯 가지 정도만 쓰고도 가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책략은 무궁무진했다. 경제에 관해서도 대가라는 명예를 얻은 계연은 여러 방면에 박학하여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범려가 88세에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자연의 이치에 거슬리는 않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크게 모은 재물을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흔쾌히 나누어 준 것도 자연의 이치를 버리지 않으려는 그의 철학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에도 지난날 계연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했다.
나아갈 때와 물러 설 때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적당한 때에 멈출 줄도 알았다. 또 가진 것이 많으면 잃는 것도 많다는 철리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제나라를 떠나 도陶 땅에 정착했을 때는 도주공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사는 곳을 옮기며 지낸 약 20년 동안 억만 금이나 되는 큰 돈을 세 차례 모았으나 또 많은 이들에게 나눠주기를 두 차례 함으로써 '재신財神'과 '상성商聖'이라는 명예를 세세대대로 누리고 있다. 범려는 정치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상업에서도 크게 성공했다.
그가 장사를 하여 크게 재물을 모은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가장 큰 관심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돈 버는 방법을 묻는 사람에게 그가 들려준 말 한 마디를 가져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재산도 한 푼밖에 안 되는 작은 데서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드리 나무가 한 톨 자그마한 씨앗에서 시작하듯이 말입니다. 또 그대가 얼마를 벌든지 열의 하나나 둘은 쓰지 않고 꼭 쥐고 있어야 합니다.
또 있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내다 팔아야 합니다.
이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주식 투자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말 아닌가. 상투 잡지 말라는...... .
비결은 또 있다.
-가물 때는 배를 사들이는 데 투자하고 장마 때는 수레를 사들이는 데 투자해야 합니다.
범려의 위대함은 억만 금이나 되는 큰 돈을 가난한 친구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는 데 있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그를 일러 '장사하는 데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맡겼다'라고 했다. 신은 자연의 시세를 아는 눈은 베풀 줄 아는 이에게 주었는지도 모른다.
'값이 비싸면 오물을 배설하듯이 내다 팔고, 값이 싸면 구슬을 손에 넣듯이 사들여야 합니다.'
이 말은 범려의 스승 계연이 한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실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 년 전 범려는 이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했다. 그러했기에 그는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첫손 꼽히는 부호로서 '상성商聖'이라는 명예까지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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