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탐욕이 불러온 죽음 - 화신 和珅

촛불횃불 2021. 11. 7. 11:30

 안팎의 여러 신하들이 소를 올리며 화신이 큰 죄를 저질렀다고 아뢰었다. 황제는 일찍이 화신을 재상에 임명했었기에 차마 저자에서 사형시키지 못하고 스스로 자진하도록 하였다.

(內外諸臣疏言和珅罪當以大逆論, 上猶以和珅嘗任首輔, 不忍令肆市, 賜自盡.)

<청사고淸史稿> '화신전和珅傳'

 

오십 년이 참으로 꿈이로다,

오늘 이 세상 떠나려네.

뒷날 태평한 날 말할 때,

그 넋이 나라고 인정하리라.

 

五十年來夢幻眞,

今朝撒手謝紅塵.

他日唯口安瀾日,

認取香魂是後身.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 흰 비단을 제 목에 걸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신和珅이 남긴 절명시이다. 절명시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또는 목숨을 끊기 전에 지은 시를 말한다. 그렇다면 화신은 왜 흰 비단으로 목을 매어 스스로 제 목숨 끊어야 했을까? 그것도 이제 갓 쉰 한창 나이에.

 

 

화신의 모습

 중국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부를 쌓은 이는 꽤 많았다. 촛불횃불의 이 블로그 <역사 인물 산책> ' 우리가 함께 본 석숭도 서진에서 첫손 꼽히는 부호였다. 이보다 훨씬 앞서 춘추시대에는 범려范蠡가 큰돈을 모았다는 기록이 사마천의『사기』「화식열전」에 전한다. 또 한나라 때는 등통鄧通이라는 이가 동전 주조하는 일을 황제로부터 명받아 부호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많은 재물을 쌓았던 인물이 바로 화신이었다. 그가 죽은 뒤 국가가 몰수한 그의 재산은 당시 청나라 한 해 세수의 열다섯 배가 되었다. 그것도 청나라 전성기 때의 세수를 기준으로 셈했다니 그가 가졌던 재물의 양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화신은 건륭황제의 글씨체를 본받기 위해 밤낮 연습했다.

 

 화신은 청나라 건륭제의 굄을 받으며 승승장구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인물이다. 건륭제는 그의 할아버지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지 않겠다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예순 해만에 열다섯째 아들 옹염에게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상을 뜰 때까지 여전히 권력을 옹글게 행사했기에 중국의 긴 역사에서 가장 오래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화신은 열아홉이 되어 벼슬길에 오르려고 과거에 응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몇 해 뒤, 건륭 37년(기원후 1772년), 나이 스물두 살 때 드디어 3등 시위에 낄 수 있었다. 그는 만주어, 한어, 몽골어, 장어藏語 등 네 개 언어에 능통한데다 어려서 익힌 유학 경전이 받침이 되어 곧장 건륭제의 굄을 받으며 의장대 시위로 뽑혀 자리를 옮겼다.

그의 벼슬길은 순풍에 돛단배였다. 곧바로 어전시위가 된 그는 말을 탄 채 궁궐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까지 누리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에 나라의 국고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호부시랑에 오른 그는 절강성 순무 왕단망의 뇌물 착복 사건을 수사하면서 건륭제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받았다. 왕단망이 착복한 어마어마한 재물을 국고로 환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호부상서로 승진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건륭황제의 모습

 그러나 벼슬길에서 그가 지킨 청렴은 여기까지였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지면 청렴쯤이야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는 신발, 그것도 해어진 신발에 지나지 않았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도 무섭지 않았고 콸콸 넘치는 물결도 두렵지 않았다. 한번 맛들이기 시작하면 뇌물의 크기가 아무리 키를 더하고 무게를 높여도 오히려 눈에 차지 않을 정도였다. 이 점은 화신만이 아니라 모든 왕조의 부패한 관리들이 한결같았다. 양의 동서가 따로 없었고 때의 예와 이제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인간 본성을 꿰뚫어보았기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법으로 탐욕이 저지를 범죄를 엄격하게 규제했지만 끝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겁먹을 줄 몰랐다.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권력, 이미 서른여섯 살에 이부상서를 비롯한 병부상서와 형부상서 등 여섯 부의 상서를 두루 거친 데다 그를 총애하던 건륭제는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고륜화효固倫和孝 공주를 장차 그의 맏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조한 터라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권력에 날개까지 달아준 터였다. 서른아홉 살 나던 해, 화신은 건륭제의 열 번째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권세가 꼭짓점에 이르면 절제할 수 있는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 지점에서 욕망을 절제할 줄 알았던 이에게 뒷날 역사는 다시 살려 영광을 안기지만 언제나 흔한 일은 아니었다.

 

건륭황제가 예순다섯 늦은 나이에 얻은 고륜화효 공주의 모습 

 이익을 챙기는 데 기를 쓰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형용할 때 흔히 혈안이 되었다는 표현을 쓴다. 눈에 핏발이 선 모습, 화신이 바로 그랬다. 뇌물을 올리며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자는 언제나 있었다. 뒷돈이 마구 생기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자리로 옮기기 위하여, 지방 관아에서 서울의 관아로 영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줄을 찾았고, 그 줄의 정점에는 화신이 있었다. 화신은 이런 뇌물을 챙기는 데 한껏 뻔뻔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횡령까지 일삼으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뿐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공납품도 자기 손을 거쳐야 하는 점을 이용하여 진귀한 물품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제 손에 넣었다.

그렇지만 한 오라기 부끄러움은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약간의 두려움도 고요한 밤이면 가슴을 조였던 모양이다. 혹시나 닥쳐올지도 모를 탄핵을 예방하려고 조정 대신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힘을 쓴 걸 보면 한 점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 양심을 하늘과 통하는 길로 삼아 더 깊이 성찰했더라면 하나밖에 없는 제 목숨을 온전히 지키며 천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 자기를 보호할 둑으로 삼았지만 그 둑은 영원히 그를 보호할 수 없었다. 황제의 권위 앞에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지켜야 했던 이들이 황제가 바뀌자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가경제의 모습

건륭제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가경제는 살아 있는 태상황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화신의 목을 내리지 못했다. 가경제는 모든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 화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신의 나이 마흔아홉 살 나던 해에 건륭제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경제는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다. 화신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 가경제는 그의 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밝히기 시작했다. 죄상은 무려 스무 가지나 되었다. 가경제는 화신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몰수된 재산은 은 팔백억 냥, 건륭황제 때 청나라 조정이 해마다 거둔 세금 수입은 칠천만 냥에 불과했으니, 화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 들인 재물은 당시 청나라 정부의 열다섯 해 세수와 맞먹었다.

“동쪽 저잣거리에 내다 능지처참하라.”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고륜화효 공주가 울며 매달렸다. 대신 유용劉墉도 앞을 막아서며 이렇게 건의했다.

“화신이 지은 죄가 비록 극악무도하지만 돌아가신 황제께서 곁에 두던 대신이었습니다. 하오니 옥중에서 자진하도록 다시 고쳐 명을 내리시옵소서.”

 

두 얼굴의 화신

 결국 황제는 화신이 자기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고쳐 명령했다. 황제가 내린 흰 비단을 받고 화신은 그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앞서 든 칠언절구는 화신이 이때 읊은 절명시이다. 화신의 맏아들은 건륭제의 열 번째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기에 연좌되어 처형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가경제는 조정의 안정을 위하여 화신이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난 이튿날 조서를 내려 조정의 백관이 연좌되는 일을 막았다.

그런데 화신이 남긴 절명시를 살펴보면, 그가 자기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듯하다. 앞으로 어느 날 태평성대가 되면 자기의 넋을 기릴 것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곤 하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그런 말도 한 마디 한 적이 없다고 시치미 뚝 떼는 모습을 오늘의 뉴스 화면을 통해 보노라면, 아, 며칠도 지나지 않아 금세 밝혀질 사실을 두고 이럴 수도 있구나, 절로 탄식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이제나 변한 건 하나도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비단자락을 목에 걸고 자진하는 화신(극중 장면)

  화신도 같은 부류의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데 뛰어난 아첨 기술을 발휘했다. 황태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화신은 다른 대신들처럼 아픔을 덜어줄 몇 마디 말만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건륭제 곁을 지키며 몇날 며칠 먹을 것도 입에 대지 않고 마실 것도 마시지 않으며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게다가 화신의 수려한 미모는 건륭제의 사랑을 받다가 떠나버린 후궁과 너무도 닮았기에 황제의 남다른 굄을 받을 수 있었다. 또 화신은 재기가 남달리 번쩍였다. 그는 건륭제가 <맹자孟子>를 읽다가 주해한 부분을 어두워진 날씨로 잘 알아내지 못하자 바로 불을 밝힌 뒤 그 자리에서 모두 외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황제의 신임을 몽땅 차지할 수 있었다.

 

청나라 무관의 복장

만주족이 일으킨 청나라 조정에는 한족 출신의 관리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화신은 만주족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갖추었다면 능히 청나라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재물이 그의 총명을 가렸을까? 아니면 권력이 그의 앞날을 망쳤을까? 어쩌면 둘 다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탐욕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이 끝 간 데 없이 지나치면 탐욕이 된다. 탐욕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다. 한 인간은 죽음으로 그의 우주를 끝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결국 인간은 탐욕 때문에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 없이 불길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된다.

-분수 지켜 만족하는 자는 군자요, 지나치게 탐하는 자는 소인이니라.

(知足稱君子, 貪婪是小人)

중국 민간에 전하는 속담이다.